② 순릉(順陵)
순릉은 제9대 성종의 원비인 공혜왕후(1456〜1474) 한씨의 능이다. 공혜왕후는 한명회의 넷째 딸로 순릉과 마주보고 있는 공릉의 예종비인 장순왕후와 자매지간이다. 공혜왕후는 12살 때인 1467년 의경세자(덕종)의 둘째아들 자산군에게 출가했는데 예종이 세조의 장례를 치르면서 건강을 잃어 재위 14개월 만에 사망했다. 이때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은 겨우 3세였고 15세인 월산군은 병약했는데 정희왕후는 덕종의 장남인 월산대군을 왕으로 세우려했다.
그러나 한명희는 정희왕후의 의견에 반대하고 자신의 사위인 자산군을 왕으로 내세우자고 했다. 한명희의 주장에 밀린 정희왕후는 자산군을 왕으로 내세우되 대신 한명희가 왕실을 보호해달라고 요청했다.
여하튼 자산군(성종)이 왕위를 계승함에 따라 왕비로 책봉되었는데 공혜왕후는 관운으로 따지면 그야말로 억수로 운이 좋은 셈이다. 공혜왕후는 어린나이에 궁에 들어왔으나 효성이 지극해 삼전 즉 세조비 정희왕후, 덕종비 소혜왕후, 예종 계비 안순왕후의 귀여움을 받았다고 한다. 1469년 11월 28일 예종이 사망하고 성종이 즉위한 다음 날, 공혜왕후는 어찌 된 일인지 궁궐을 나가 사가에 머물다가 다음해 1월 19일에야 창덕궁 인정전에서 왕비로 책봉됐다. 왕비로 책봉된 지 5년 만인 19세에 후사 없이 사망했다. 계유정난으로 단종을 숙청하며 집권한 한명희는 조선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두 딸을 왕비로 만들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지만 두 딸 모두 19세를 넘기지 못하고 요절하였다. 자매간 요절한 것도 같고 후손을 남기지 못한 것도 닮았다.
순릉의 정자각 앞에는 일반 능역에 있는 신로와 어로가 아닌 한 개의 참배로만 있는데 조선왕릉의 철저한 격식을 볼 때 원형이 아닌 것으로 추정되며 배위석도 규모가 작은 것이 특징이다.
공혜왕후는 왕비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파주삼릉 중에서 유일하게 조성 당시부터 왕릉으로 만들어졌다. 병풍석만 세우지 않았을 뿐 능제나 상설 제도는 모두 조선 초기의 왕릉에 준하는 제도를 따랐다. 난간석의 작은 기둥은 태조의 건원릉과 태종의 헌릉을 본받았으며 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4개의 고석에 새겨진 나어두문(羅魚頭文)도 문종의 현릉(顯陵) 양식을 따르고 있다.
현재 순릉은 상⋅중⋅하계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계에 곡장과 봉분, 석양, 석호, 망주석, 석상을 두었고 중계에는 장명등, 문석인 1쌍, 석마 1쌍, 하계에는 무석인 1쌍과 석마 1쌍을 각각 배치하였다.
석상 앞에 설치된 8각형 장명등은 태조 건원릉 때부터 계승해온 조선 왕릉의 장명등 모습이다. 문⋅무인석은 안정적인 신체 비례를 갖추고 있으며 복식과 갑주(甲胄)의 표현이 정밀하며 얼굴 표정 또한 사실적으로 조각돼 있어 성종대의 우수했던 석조 예술 수준을 보여준다. 순릉의 무석인은 머리에 투구를 쓰고 양손으로는 칼을 잡고, 무관의 갑옷을 입고 목을 움츠린 모습이다. 근엄하고 수염이 팔자형으로 갑옷의 선은 뚜렷하지만 얼굴은 다소 경색된 표정인데 특히 무석인이 홀을 든 손을 노출시키지 않고 한 쪽 소매단을 치켜들어 다른 한 손을 가려 ‘人’자형을 이룬 모습 또한 건원릉의 문석인 공복형태와 유사하다.
장명등은 8각으로 정자석-개석, 격석, 대석-지대석의 3매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적으로 개석과 격석 및 대석의 비례가 균형을 이룬다. 격석과 개석에 표현된 문양은 입체감없이 얕게 부조하였다. 정자석은 원수가 2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단의 것은 연봉형, 하단은 원형을 이루고 사이에는 연주를 돌렸다. 개석은 팔모지붕 형태를 하고 상단은 하엽형의 덮개로 장식했다.
능침을 보호하는 석마, 석양, 석호 세 가지의 모습도 다소 예외적이다. 일반적으로 석마와 석양은 배 부분을 판으로 만들어 문양 등을 조각하는데 이곳에서는 서있는 상태로 배를 보이고 있다. 반면에 석호는 앉아 있는 모습이다. 공혜왕후는 왕비로 사망했으므로 세자빈의 신분으로 사망한 언니 장순왕후의 공릉에 비해 석물이 많이 설치되어 있다.
순릉의 정자각은 다른 정자각과 달리 배위청에 월대가 설치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정전 내외부 바닥과 배위청 및 월대의 바닥에는 모두 방전을 깔아 포장했는데 월대가 설치되지 않았는데도 배위청의 외곽부분을 낮게 하여 비가 쉽게 흘러내리게 했다. 정자각의 우측에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로 지은 팔작지붕 건물의 비각이 있는데 순조 17년(1817) 공릉 표석과 함께 제작된 것이다. 특히 정자각 우측 비각 뒤편에는 수백년 된 물푸레나무가 있다. 이는 다른 능역에서 볼 수 없는 고목이다.
③ 공릉(恭陵)
공릉은 제8대 예종의 원비 장순왕후(1445〜1461) 한씨의 능으로 한명회의 셋째 딸이다.
조선왕은 27명이며 왕비가 41명이나 된다. 모든 왕비가 원비가 아니라는 뜻인데 순릉과 공릉은 두 명 모두 원비인데 그것도 조선의 한 시대를 풍미한 한명희의 셋째와 넷째 딸이다. 한마디로 구설수가 없는 정통 왕비라 볼 수 있는데 남편과 함께 묻혀있지 못한 자매무덤이다.
세조 때 한명회는 영의정까지 오르면서 권력의 중심에 선다. 세조의 세자(덕종)가 죽고 세조의 둘째 아들(예종)이 왕세자에 책봉되자 한명회는 1460년 15세인 그의 딸을 세자빈의 자리에 앉혔다. 이때 해양대군(예종)의 나이는 다섯 살 연하로 불과 10살이었는데 세자빈으로 책봉된 지 1년 7개월 만에 세자빈이 원손(인성대군)을 낳으니 세조가 기뻐서 한명회에게 “천하의 일 가운데 무엇이 오늘의 경사보다 더하겠는가?”라며 술을 올리게 하고, 밤새워 원자와 산모의 건강을 기원했다. 그런데 당시 예종의 나이는 12살이므로 장순왕후의 해산은 대단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과거는 물론 현재도 12살의 어린아이가 아들을 낳는다는 것이 만만한 일은 아니다.
여하튼 그녀는 인성대군을 낳았는데 산후병을 앓다가 17세 어린 나이로 사망했다. 더구나 어렵게 얻은 인성대군도 세살 때 어린 나이에 요절했으므로 인성대군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장순왕후에 이어 예종도 짧은 재위기간을 마감하고 요절했다. 장순왕후는 아름답고 정숙하여 세자빈으로 간택된 뒤 시아버지인 세조에게 사랑받아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해진다.
“그대 한씨는 훌륭한 집안에서 태어나 온유하고 아름답고 정숙하여 종묘의 제사를 도울만하다. 효령대군 보(補)와 우의정 이인손 등을 보내 그대에게 책보를 주어 왕세자빈으로 삼는다. 그대는 지아비를 공경하고 도와서 궁중의 법도를 어기지 말고 왕업을 융성하게 하라.”
공릉은 능 아래쪽의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길인 참도(參道)가 신덕왕후의 정릉처럼 ‘ㄱ’자로 꺾여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참도는 원래 직선으로 만들지만 지형조건 때문에 자연 지형에 어울리게 조영한 것이다. 조선 왕릉 중 참도가 꺾인 곳은 공릉, 정릉 그리고 다소 조성 내역이 다른 단종의 장릉 등이다. 월대 위의 정자각은 앞면 3칸, 측면 2칸으로 다소 작은 규모로 세자빈묘의 형식에 준했는데 조선왕릉 중 정자각을 올라가는 신계의 무늬가 아름답고 선명한 것으로 유명하다.
왕릉의 정자각을 보면 붉은색 기둥 하부에 약 2자 정도로 하얀색을 칠하고 그 위에 하나의 파란색의 줄이 쳐있다. 조선왕릉서부지구 파주삼릉관리소의 조현주 주임은 정자각이 신전과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으로 설명한다. 하얀색은 구름, 파란색은 하늘을 의미하므로 정자각이 하늘에 떠있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녔다는 것이다. 왕릉 건설에 관계되는 하나하나가 높은 뜻을 갖고 있다는 뜻인데 공릉을 비롯하여 몇몇 왕릉의 정자각은 이들 색이 없다. 이런 누락이 고의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철저하기로 남다른 왕릉 규범에서 이와 같은 예외들을 볼 수 있다는 것처럼 흥미로운 것은 없다.
공릉의 봉분은 당시대 세자묘로 조영된 경릉(덕종)의 봉분과 같이 규모는 크나 병풍석이 없는 원(園)의 형식이다. 이는 처음에 세자빈묘로 조성되었기 때문으로 붕분의 난간석과 병풍석, 망주석이 생략되었고 무석인도 없다. 석양, 석호 각 2기씩 능을 보호하고 있는데 왕과 왕비의 능역은 일반적으로 석양·석호가 2쌍 4마리다. 석양은 봉분 밖 곡장 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얼굴과 뿔이 비교적 자세하게 표현돼 있으나 몸통은 단순하게 처리됐다. 석호는 석양과는 달리 앉은 자세다.
봉분 앞에 혼유석과 장명등이 있는데 혼유석의 고석에 문양이 사라졌는지 거의 보이지 않으며 장명등에는 사각의 창이 뚫려 있고 옥개석이 둘러져 있으며, 그 위에 보주가 달린 상륜이 있다. 팔각으로 규모가 크지만 옥개인 지붕돌과 화사석에 비해 간석과 하대부 등 기단부가 낮아 다른 왕릉 장명등에 비해 안정적이지 못한 모습이다.
공릉의 석물 중 다소 특이한 것은 일반적으로 석마는 문인석 옆에 있는데 이곳의 경우 석마가 문인석 뒤에 있다는 점이다. 이 역시 파격적인 배치가 아닐 수 없다. 문인석은 홀을 쥔 손이나 몸에 비해 큰 얼굴, 옷주름 등이 조선 초기의 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얼굴과 마음이 아름다운 장순왕후의 요절에 대한 애절함을 달래기 위해 조각가가 얼굴을 크고 정밀하게 표현했는지 궁금하다고 이창환 박사는 지적했다.
참고문헌 :
「王을 만나다·10]파주 삼릉-영릉(추존 진종·효순왕후)」, 이민식, 경인일보, 2009.11.19.
「[王을 만나다·11]파주 삼릉-공릉(8대 예종의 원비 장순왕후)」, 이창환, 경인일보, 2009.11.26
「[王을 만나다·12]파주 삼릉-순릉(9대 성종의 원비 공혜왕후)」, 이민식, 경인일보, 2009.12.03
「[王을 만나다·27]융릉 (추존 장조·헌경왕후)」, 이민식, 경인일보, 2010.04.01.
「한명회 셋째 딸로 살다 세조의 큰며느리로 죽다」, 이창환, 주간동아, 2010.06.07
「장순왕후와 자매간 요절에 후손 못 남긴 것도 닮아」, 이창환, 주간동아, 2010.06.28
「살아선 왕실의 살림꾼 죽어선 시부모 다섯 분 모셔」, 이창환, 주간동아, 2010.12.13.
「조선왕실 왕비와 후궁의 생활 - <2-1. 왕비전의 구성과 권한>」, 꽃향기 나는 돌, 조선왕조실록, 2015.01.21.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9673
https://m.cafe.daum.net/jeonyewon/BMl8/1211?listURI=%2Fjeonyewon%2FBMl8
『답사여행의 길잡이 (15) 서울』,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돌베개, 2002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 III』, 국립문화재연구소, 2012
『역사로 여는 과학문화유산답사기1 : 조선왕릉』, 이종호, 북카라반,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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