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에 위치한 파주삼릉(사적 205호)은 능 3개가 함께 있다는 의미에서 ‘파주삼릉’으로 알려지는데 공릉(恭陵)·순릉(順陵)·영릉(永陵)이 자리 잡고 있으므로 ‘공순영릉’이라 고도 불린다. 조선왕릉이 이곳에 처음 자리 잡은 것은 제8대 왕인 예종(睿宗)의 원비 장순왕후(章順王后)가 묻힌 공릉이다. 장순왕후는 성종 대에 영의정을 지낸 한명회의 딸로 예종이 세자 시절에 가례를 올려 세자빈이 되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사후 왕후에 추존됐다. 뒤이어 제9대 성종의 원비였던 공혜왕후(共惠王后)의 순릉이 자리잡았다. 공혜왕후는 장순왕후의 동생으로 역시 한명회의 딸이다. 12세에 자산군(훗날의 성종)과 혼인하고 14세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19세의 나이로 슬하에 소생도 없이 요절했다. 마지막으로 영조의 맏아들이었지만 10세의 어린 나이로 죽은 효장세자 즉 진종(眞宗)의 능인 영릉(永陵)이 들어와 오늘날의 파주삼릉이 되었다. 파주삼릉 주변에는 공릉국민관광지를 비롯해 용미리석불입상, 윤관 장군묘, 오두산성 등이 있어 가족나들이로 많이 찾는다.
① 영릉(永陵)
영릉(사적 제205호)은 제21대 영조 맏아들 추존 진종(1719〜1728) 및 효순왕후(1715〜1751) 조씨의 능이다. 진종은 1725년 7세에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3년 뒤 사망하자 시호를 효장이라 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갇혀 죽게 한 뒤 사도세자의 맏아들인 왕세손(정조)을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켜 왕통을 잇게 했다. 정조가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된 것은 영조의 고도의 정치 감각 때문이다.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한 것은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서다. 그런데 영조는 자신의 조처가 지나친 일이었음을 깨닫고 이 일이 뒷날 가져올 정치적 파란을 우려해 왕세손이던 정조에게 사도세자 처벌 결정을 번복하지 말도록 특별히 주문했다. 그러면서 정조의 왕통 시비를 우려해, 형식상 정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를 끊어 버리고 사도세자의 이복형인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킨 것이다.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니라 효장세자의 아들이므로 정통의 문제를 비켜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엄밀히 말한다면 정조는 법적으로 사망한 효장세자의 아들이지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니다. 정조에게는 두 명의 아버지가 있는 셈이다.
『영조실록』 1728년 11월 16일 효장세자가 죽던 날 밤, 영조가 슬퍼하던 모습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밤 3경(三更) 즉 밤 11시에서 새벽 1시 사이에 왕세자가 창경궁의 진수당에서 훙서하였다. 이날 종묘와 사직에서 두 번째 기도를 거행하였는데, 밤에 병이 더욱 심해져 해시에 훙서하였다. 왕이 영의정 이광좌, 병조판서 조문명 등을 대하며 슬피 곡하며 말하기를, “종묘와 사직을 장차 어찌할 것인가?” 하고, 한참 만에 곡을 그쳤다. 왕이 일어나 안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뒤에 내시를 시켜 흑곤포(黑袞袍)를 담은 검은 함을 들려 앞세우고 왕이 뒤따라 나왔다. 어둑새벽에 예방승지가 세자의 흑곤포를 담은함을 받쳐 들어 내시에게 전해주니, 내시가 전(殿)의 지붕 모퉁이에 올라가 호복(呼復)하고 내려왔다.’
정조가 즉위함에 따라 효장세자는 양부모로서 진종으로 추존되었으며 그 후 1908년 황제로 추존되어 진종소황제가 되었다. 효순왕후 조씨는 풍릉부원군 조문명의 딸로서 1727년 세자빈에 간택되었고 1735년 현빈에 봉해졌으나 37세에 소생없이 사망했다. 정조가 즉위한 후 효순왕후로 추존되었으며 1908년 다시 효순소황후(孝純昭皇后)로 추존되었다.
영릉은 세자와 세자빈의 예로 능을 조성했기 때문에 다른 능들에 비해 간소하다. 동원이봉의 쌍릉으로 봉분 주위에 병풍석과 난간석이 모두 생략되어 있다. 석양과 석호 각 한 쌍이 능을 호위하고 있으며 봉분 앞에 각각 혼유석을 두고 망주석 한 쌍이 서있다. 또 명릉처럼 사각 장명등과 문인석이 설치되었으나 무인석은 생략되었다. 복두공복을 착용한 문인석은 얼굴에 비해 몸은 왜소한 편이고, 겸손하게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석마 다리 사이의 석판에는 꽃무늬를 정성스럽게 장식해 놓았다.
정자각 우측에 비각이 두 채 있다. 2채의 비각에는 3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위에 있는 비각에는 능 조성 당시의 세자 신분의 능비가 있으며 아래 비각에는 정조 때 왕으로 추존한 후 세운 비와 순종 때 황제로 추존하고 세운 비 2기가 있다. ‘진종대왕(眞宗大王)’의 능표석은 역대 왕들 중 최고의 명필로 평가받는 정조의 작품이다.
조선왕릉에도 부장품을 넣었는데 조선왕릉의 부장품은 화려함보다는 예(禮)를 기반으로 소박하게 만들어진 것이 특징이다. 영릉의 부장품에 대한 기록이 의궤에 자세히 나와 있는데 이 기록에 따르면 대례복, 장신구류인 복완(服玩), 실물보다 작게 만든 식기⋅제기⋅악기 등의 다양한 명기(明器)들로 구성되었다. 한마디로 진품이 아니다.
조선왕릉의 상당 부장품이 실제 왕실에서 사용한 물건들이 아니라 장례용로 만든 모조품인데다 무덤 축조가 남달리 견고하여 조선 왕릉이 도굴꾼들의 주목을 받지 않은 요인이기도 하다.
진종과 효순왕후의 부장품 항복은 조금 다르다. 복식과 장식구류는 부부의 성별에 따라 달리 구성되었으며 무기류는 남성인 진종의 부장품에만 있다. 이밖에 나무로 된 노비, 악공 등은 고대 순장 풍습의 흔적으로 조선 초기부터 왕릉의 부장품이었으나 영조가 인의(仁義)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금지하여 효순왕후의 상례를 치를 때부터는 조선 왕실 부장품 항목으로 넣지 않게 되었다.
파주삼릉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재실이 있는데 전면 6칸 측면 1칸 반이다. 그런데 이곳 재실은 매우 흥미있는 공간이 있다. 일반적으로 재실의 아궁이는 건물 외부에 있는데 이곳은 맨 우측 1칸이 부엌으로 이곳에 아궁이가 있으며 재실 마루로 문이 있다. 건물 안에 아궁이와 부엌이 있다는 것이 이상하다고 느낄 만큼 재실 안에 부엌을 만들지 않았다는 뜻인데 이곳처럼 특별한 형식으로 만들어 진 곳도 있다는 것을 보면 엄격하고 딱딱한 왕실 규범이라 할지라도 예외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엌에서 곧바로 필요 제물을 공급할 수 있다는 것이 간편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제향 기신제>
2009년 6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조선 왕릉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할 때 큰 점수를 부여한 것은 조선 왕릉이 갖는 건축과 조경의 독특한 가치뿐 아니라 지금까지 600여 년을 이어온 제례 문화의 높은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조선 왕실에서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제례를 올렸는데 제례는 다소 복잡하다. 우선 큰 틀에서 3대제향으로 종묘대제, 사직대제 그리고 환구대제로 이는 국가 차원에서 시행한다. 둘째로 능ㆍ원ㆍ묘 그리고 칠궁제향이 있는데 이는 각 왕릉민 원, 묘, 칠궁에서 별도로 시행한다.
종묘대제는 국가무형문화재 제56호로 조선의 국가 사당이며 세계유산인 종묘에서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의식이다. 제사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중요하기 때문에 종묘대제(宗廟大祭)라고도 한다. 종묘대제는 봄, 여름, 가을, 겨울, 납일 등 1년에 5번 지냈으나 현재는 매년 양력 5월 첫 번째 일요일과 11월 첫째주 토요일에 봉행되고 있다. 제향 의식뿐 아니라 제례악과 일무 등 유형과 무형의 세계유산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종묘대제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종합적인 의례다.
종묘대제는 1969년부터 종묘대제보존회 즉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 의해 복원되었으며, 제향 행사는 제사 전의 준비과정과 임금이 출궁하여 종묘에 이르는 어가행렬, 제례악 및 일무 포함하는 제례 봉향으로 나누어져 있다.
1975년 국가무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되었고, 2001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2006년부터 국제문화행사로 격상되어 거행되고 있다.
사직단ㆍ사직대제(社稷壇ㆍ社稷大祭)는 국가무형문화재 제111호다. 사직은 원래 토지신인 사(社)와 곡물신인 직(稷)에게 제사하는 단(壇)을 사직단(社稷壇)이라고 한다. 사단은 동쪽, 직단은 서쪽에 설치하였다. 토지신과 곡물신에 대한 숭앙은 이미 고대로부터 그 의미가 중시되어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선 국가제사로 정립되고 봉행되어 왔다. 사직이 종묘와 더불어 국가제사의 대종을 이루어 온 이유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사직에 제사를 지낸 기원은 삼국시대부터다. 사직단에는 중춘(仲春)ㆍ중추(仲秋)의 첫 번째 ‘무(戊)’자(字)가 든 날과 납일(臘日)에 제향을 받들어 국가와 민생의 안전을 기원하였고, 정월에는 기곡제를, 그리고 가뭄ㆍ한발 등 천재지변이 일어날 때마다 기우(祈雨)ㆍ기청(祈請) 등 기양제(祈禳祭)를 가끔 행하였는데, 2000년 10월 사직대제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매년 9월 중에 봉행하고 있다.
환구대제는 주권국가 대한민국의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는 유교의 의례로써 제천의(祭天儀)로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의 천명(天命)을 국제사회에 선포하고 환구단을 설치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유교문화권에서는 천신(天神)은 천명을 결정하는 지고(至高)의 신이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환구단은 일제가 헐어버리고 철도호텔 현재 조선호텔을 세워 제천의식도 중단되었지만 2008년도부터 매년 10월 12일, 환구대제를 봉행하고 있다.
능ㆍ원ㆍ묘 그리고 칠궁제향을 봉행하는 대표적인 제례가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기신제 등이다. 기신제는 선왕과 비가 사망한 기일에 생전의 모습을 기리기 위해 올리는 길례의 하나다. 봉행하는 제로 고려 말과 조선 초에는 능 주변에 사찰을 지어 재궁을 설치하고 불교식으로 모셨으며, 세종 이후에는 원묘와 문소전에서 유교의 ‘국조오례의’ 예에 따라 제향을 모셨지만 선조 때 임진왜란(1592년)으로 문소전이 소실되자 기신제를 각 능에서 모시고 있다.
현직 왕이 직접 제사를 모시는 것을 친행(親行)이라 하고, 삼정승 또는 관찰사 등이 행하는 것을 섭행(섭행)이라 하는데 왕이 직접 많은 왕릉을 친행할 수 없고 비용도 많이 들어가므로 섭행을 자주 했다. 제사를 모실 때 초헌관은 남의 조상이나 문병을 하지 않으며 음악을 듣지 않고, 죄를 다스리지 않으며, 술이나 파, 마늘, 고추 등 자극성이 강한 음식을 먹지 않았다. 그리고 제례 전 목욕재계하고 제례복으로 갈아입고 맑은 마음으로 오로지 제사를 모시는 데만 정진했다. 기신제는 일반적으로 한밤중(새벽 1시부터 2시)에 모셨는데 현재는 낮 12시를 중심으로 봉행한다.
각 왕릉의 경우 지방자치단체장이 초헌관으로 참여하는데 온릉의 경우 양주시장이 초헌관으로 참여한다. 반면에 아헌관, 종헌관, 감찰 등 제관은 모두 전주리씨의 후손들이 맡는다. 참고적으로 40개 릉의 봉향일이 모두 다르므로 <전주리씨대동종약원>에 일정을 확인하여 제향을 참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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