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의 이모저모>
궁중사를 보면 왕비로 인해 수많은 사건들이 일어나는데 대체 왕비가 어떤 위세가 있길래 그렇게 이전투구하느냐 의문이 들 것이다.
조선시대 국왕의 정실부인을 왕비라고 부르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법전에서도‘왕비’나 ‘왕비전’이라는 용어만 사용하였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여러 자료에는 왕비의 칭호로 ‘중궁’도 자주 보인다.
『세종실록』세종 9년 1월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왕이 여러 신하에게 말하기를, “동전(東殿)이라는 칭호를 어느 시대부터 부르게 되었는가? 만약에 ‘중궁(中宮)’이라 한다면 황후와 비슷하여 참람한 듯하니, 칭호를 고치는 것이 옳겠다. 또 왕비에게 아름다운 칭호를 더하여 덕비(德妃)·숙비(淑妃) 같은 칭호는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이전 왕조에서 왕비가 많아 6〜7명에 이르렀으므로 각기 아름다운 칭호를 덧붙여 이를 구별하였다. 그런데 중국 제도에서는 ‘황후’라고만 일컫고 아름다운 칭호가 없으니, 우리나라도 다만 ‘왕비’, ‘왕세자비’라고 일컫는 것이 어떻겠는가.‘
조선시대 왕비는 국왕의 정실부인으로서 막중한 임무와 권한이 주어졌다. 왕비의 막중한 임무는 아들의 출산을 통해 대통을 잇는 일이었다. 나라가 안정되기 위해서는 적통의 왕자가 왕위를 잇는 것이 필수인데 이를 위해선 반드시 왕비가 아들을 생산해야 하는 것이다.
왕비가 적자를 생산하지 못하면 왕위는 서자에게 넘어가는데 이것이 국정 혼란을 초란한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서자 출신의 왕은 힘이 약할 수밖에 없는데 조선은 왕실과 양반을 막론하고 모두 적자 상속을 원칙으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적자를 생산하지 못한 왕비는 발언권이 약했고 이와 연계되어 왕비 친정의 권세도 함께 추락했다.
그러나 왕비의 임무는 출산만은 아니다. 이것은 왕비의 책봉 교명을 보면 알 수 있다.
효종은 부인 인선왕후(仁宣王后)를 왕후로 책봉하는 교명은 다음과 같이 알렸다.
‘왕은 이렇게 말하노라. 나라를 다스릴 때 가정에서부터 하는 것은 인륜의 근본을 펴기 위해서이고, 임어하여 왕후를 책봉하는 것은 왕화(王化)의 기반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부덕의 어짊은 안으로 말미암아 밖으로 미쳐 가고, 곤원(坤元)의 상(象)은 건(乾)을 본받아 가운데 처하였도다.’
현종이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를 왕비로 책봉하는 교명은 다음과 같다.
‘생각건대, 왕이 왕비를 세우는 법은 곧 인륜이 시작되는 기초인 것이며, 종묘를 잇고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참으로 부족함을 보충하는 도에 힘입어야 되니, 후궁들과 궁액(宮掖)들을 바로잡는 데 반드시 근엄하게 모범을 보일 것이다. (중략) 금년 7월 29일 왕비로 책봉하니, 안팎에서 잘 닦아 십란(十亂)의 효험을 이룩하고 음양이 서로 도와 일체의 공을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왕비의 임무는 음양이 서로 돕듯이 왕을 내조하는 것이다. 인륜의 근본이 가정에서부터 시작하듯이 어진 부덕의 힘이 안으로부터 밖으로 뻗어나가 왕의 부족함을 채워주어야 하는데 이 못지않게 중요한 임무가 있었다. 공손히 자신의 궁중 어른을 잘 모시는 것은 물론 후궁들과 궁액 등을 바로잡는 ‘내치(內治)’의 역할이다.
이는 왕비가 명부(命婦)들을 이끄는 최상위 지위에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왕비는 왕실의 ‘사사로운’ 여성이 아니라 국왕과 짝하는 공적인 신분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왕비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왕과 함께 종묘를 받들고 후손을 이어가는 일이었다. 왕비가 적자를 낳는 것이 최우선적이지만 후궁이 낳은 아들도 왕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후궁의 아들이 왕이 되어도 이것이 마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왕실의 후사를 이어야한다는 막중한 책임감과 함께 왕실의 자손을 번창시키기 위해 왕이 후궁을 두는 것도 인정해야 했다. 왕이 후궁에게 마음을 뺏기면 가슴앓이도 심했을 것이지만 그래도 대비의 위치는 후궁이 아닌 왕비가 차지하였다. 말하자면 후궁의 아들을 왕비 자신의 아들로 입적했다. 조선 왕비의 배타적 절대 권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종묘는 이렇게 대타로 거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종묘를 받드는 것은 왕의 적처만이 할 수 있는 일로 후궁들이 대신할 수 없었다. 왕비가 일찍 사망할 경우, 반드시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왕과 함께 종묘를 받들 존재가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왕은 현비(賢妃)를 세워 종묘를 받들고 집안과 나라를 다스린다.’
왕비들이 교지에 자주 나타나는 이유다.
왕비의 직무와 권한 외에 조선정치사에서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왕비가 대비로서 왕위계승자 지명권, 어린 왕을 대신하여 정치를 하는 수렴청정(垂簾聽政) 등의 권한을 가진다는 점이다.
왕이 일찍 죽어 왕위를 이은 세자가 너무 어릴 경우 왕비는 수렴청정을 통해 섭정할 권리가 있었다. 이때 왕위를 잇는 사람이 반드시 적자일 필요는 없었다.
조선 왕비 중 섭정권을 행사했던 사람은 세조비 정희왕후를 비롯하여 종종비 문정왕후, 명종비 인순왕후, 영조비 정순왕후, 순조비 순원왕후, 익종비 신정왕후 등이다. 이들이 섭정권을 행사할 때 이미 대비의 신분이지만 반드시 왕비를 거친 사람만이 섭정을 할 수 있었다. 물론 그 형태가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정희왕후는 아들 예종에 이어 손자 성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도 섭정을 하여 두 왕에 걸쳐 섭정을 했다. 순조비 순원왕후도 손자 헌종과 철종 두 왕에 걸쳐 섭정을 했다.
영조비 정순왕후는 증손자 순조를 대신하여 섭정을 했다. 순조의 어머니는 정조의 후궁 수빈 박씨였으나 후궁 출신은 섭정을 할 수 없으므로 대왕대비였던 그녀가 한 것이다.
유명한 문정왕후는 자신의 아들 명종이 어린 탓에 수렴청정을 했지만 인순왕후와 선정왕후의 경우는 달랐다. 인순왕후는 아들을 낳지 못해 방계인 선조를 양자로 입양하여 왕위에 앉히고 자신이 수렴청정했고 신정왕후는 방계인 고종을 양자로 삼아 섭정을 했다.
수렴청정한 사람 중 신정왕후는 특이한 경우로 그녀는 중전을 지낸적이 없다. 자신의 소생인 헌종이 왕위에 올라 효명세자를 익종으로 추존한 뒤에 그녀가 신정왕후에 책봉되었고 덕분에 섭정의 명분이 생긴 것이다.
왕비가 가지는 가장 중요한 권한은 왕위 부여권이다.
왕이 죽으면 세자가 왕위를 잇는 것이 관리이지만 이때 세자는 왕의 상징인 옥쇄를 왕의 시신을 모신 빈전에서 전달받는다. 이때 세자에게 옥쇄를 내려주는 사람이 바로 선왕의 왕비다. 즉 왕이 죽으면 왕비가 왕을 대신하여 왕위 계승권자에게 왕위를 부여하는 권한을 갖는 것이다.
이런 절차는 사실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왕이 미처 왕위계승자를 경정 짓지 못한 상태에서 죽었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예종이 죽고 성종의 왕위 계승을 결정한 사람은 세조비 정희왕후다. 정희왕후는 당시 예종과 함께 편전에서 수렴청정을 했기 때문에 차기 왕을 결정할 권한이 있었다.
명종이 죽자 선조에게 왕위를 잇게 한 것도 명종비 인순왕후다. 당시 명종에게는 세자가 없었으므로 인순왕후만 차기 왕을 결정할 권한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광해군의 즉위도 인목대비의 추인으로 가능했다.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선조가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확언을 하지 않았으므로 인목대비의 결정으로 왕위가 광해군으로 가지 않을 수 있었다. 당시 인목대비가 영창대군으로 왕위를 잇게 하고 섭정을 했다하더라도 광해군이 아얏소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왕비에게 이런 왕위 부여권은 때에 따라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왕비가 이런 중요한 역할을 맡은 것은 왕의 유고 시 왕권을 대행할 수 있는 권한이 왕비에게 있었다. 그러므로 왕비는 호칭도 ‘전하’로 불렸고 무덤도 능이라 칭하며 왕비의 신주가 왕과 함께 나란히 종묘에 모셔지는 것이다.
왕비의 또 다른 특혜는 부모에 대한 관직 수여, 출산 시 산실청이 마련되는 것, 죽음에 대한 특별한 장례절차, 종묘에의 입실, 왕실의 족보인 『선원록(璿源錄)』에의 기록, 『열성왕비세보(列聖王妃世譜)』에의 기록 등 다양하다.
이처럼 왕비에 대한 권한 부여와 특혜가 많았던 것은 왕비가 왕과 짝하는 존귀한 존재로서 그 권위를 존중받아야 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왕은 태어나는 존재지만, 왕비는 다른 집안에서 왕실로 들어와 왕비로 만들어지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권위가 더 보장되어야 한다는 측면도 중요했다.
고종, 순종의 대한제국 시기에 왕비는 황후(皇后)로 승격되었다. 조선이 중국의 제후국의 위치에서 황제국으로 변화하면서 왕비의 지위도 황후로 격상된 것이다. 황후의 위치는 1910년 한일합방 이전까지 지속되었다.
왕비가 천연일률적으로 신데렐라와 같은 위치에 있지 않고 수많은 격변을 겪기도 하지만 하루라도 왕비가 되고 싶은 사람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만큼 왕비에게 주어진 권한이 크다는 뜻이다. 왕비의 대표적인 직무 중 하나는 내명부(內命婦) 수장 역할이다.
즉 왕비는 왕의 내조자인 동시에, 궁궐 여인들로 조직된 내명부(內命婦)와 왕실소속 여성이나 관료들의 아내로 조직된 외명부(外命婦)의 수장(首長)이었다.
『경국대전』에 정1품 빈에서 종9품 주변궁(奏變宮)까지 18품계의 내명부가 있는데 조선의 왕비는 이들의 수장으로서 내치가 잘 이루어지도록 할 의무가 있었다. 물론 종9품까지 왕비가 직접 다 관리하는 것은 아니고 분야별로 후궁들에게 분담하여 관리하게 하는 형태였다.
왕비는 내명부뿐만 아니라 외명부도 신경쓴다. 외명부는 작위를 가졌지만 궁궐 바깥에 사는 여자들을 말한다. 기본적으로 모든 관리의 부인은 외명부에 속한다. 그들도 남편의 관직에 따라 의례적으로 명부를 받기 때문이다.
외명부는 종9품 유인에서 정1품 부부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데 이들 중에서 종친의 처들이 주로 신경써야 할 대상이고 정2품 이상의 중신, 대신들의 처도 가끔 만나주어야 한다. 왕비는 이들에게 잔치를 베풀어주었다.
왕비가 특별히 신경써야 하는 것은 공주, 옹주, 군주(郡主), 현주(縣主) 들이다. 공주와 옹주는 왕의 적녀와 서녀를 가르키고 군주와 현주는 세자의 적녀와 서녀를 지칭한다. 기도 하고 함께 행사를 치러야 할 때도 있다. 이들 중에서 공주와 옹주는 벼슬을 받지 않으므로 명부에 속하지 않지만 현주는 정3품, 군주는 정2품의 명부를 받는다. 군주와 현주는 외명부에 속하지만 자신들의 손녀들이므로 다른 외명부와 동일하게 취급할 수는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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