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장릉(長陵, 사적 203호)은 조선 16대 인조(1595∼1649)와 인열왕후(1594∼1635) 한씨의 무덤으로 조선시대 후기의 대표적인 능원 양식으로 평가받는다.
장릉을 답사하려할 때 염두에 둘 것은 조선시대 왕릉 중 ‘장릉’이라고 불리는 능이 3기나 되어 사전에 확인하고 출발해야 한다는 점이다. 강원도 영월에 있는 제6대 단종의 장릉(莊陵), 경기도 김포시에 있는 인조의 친부인 원종의 장릉(章陵), 그리고 파주에 있는 인조의 장릉(長陵)이다.
조선 왕조에서 평탄하게 왕위에 앉아있던 왕이 별로 없지만 인조는 조선 왕 중에서 특별히 파란만장한 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인조는 선조의 아들인 정원군(추존왕 원종(元宗))의 아들로 황해도 해주부(海州府) 관사에서 태어났다. 그가 해주에서 태어나게 된 이유는 당시 임진왜란 난중으로 전란이 계속되어 왕자제궁(王子諸宮)이 모두 해주에 있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선조에게는 광해군, 임해군을 포함하여 여러 아들들이 있었으나 그 중 정원군이 일찍 결혼하여 얻은 첫 손자였다. 선조는 그 자신이 서자인 탓에 첫 손자인 능양군(인조)이 서자였음에도 특별히 불러다 왕궁에서 기르며 총애하였으며 특히 할머니뻘인 의인왕후는 그를 더욱 사랑하고 귀중히 여겼다고 한다. 5, 6세가 되어서 선조가 직접 그를 품안에 두고 가르치며 번거롭게 여기지 않았는데, 일찍부터 글자를 해독하고 말귀를 알아듣자 선조가 더욱 기특하게 여겼다.
이후 역사는 매우 드라마틱하게 변화하는데 광해군이 결론적으로 왕위에 오르지만 반정으로 인조가 왕위에 오른다. 반정의 명분은 광해군 정권의 부도덕성과 실정에서 구했다. 그러나 근래 학자들은 광해군을 왕위에서 끌어내린 명분이 코미디와 다름 없다고 지적한다. 반정의 명분인 광해군의 부도덕성과 실정의 근거자료가 인조시대 때 작성된 『광해군실록』과 인조의 아들인 효종시대에 작성한 『인조실록』이 근거인데 이 기록은 역모를 정당화하기 위해 광해군의 부도덕성과 실정을 만들어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지적이다. 놀라운 것은 광해군일기 작성의 근거자료로 사용된 사관들의 기록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록의 기록에 철저한 자부심을 갖고 있던 자료 자체가 없다는 것은 의심을 가하기에 충분하다고 느낄 것이다.
여기에서 반정에 대한 정치적이고 정략적인 문제는 거론하지 않지만 외적으로는 광해군이 즉위 초기 인목왕후를 유폐하고, 영창대군, 임해군을 죽인 것과 후금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일을 문제 삼아 반정을 합리화시켰다. 사실 광해군은 명나라와 만주에서 새롭게 발흥한 후금(後金)과의 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로 중립정책을 펴왔다. 당시 명나라는 임진왜란 등의 여파 등으로 광해군의 책봉을 늦추는 것은 물론 조선의 왕위 계승에 대한 진상조사단을 파견하는 등 광해군에게 적대적으로 나가자 명나라에 극도의 반감을 가졌다.
그런데 명나라와 후금과의 전투는 광해군으로 하여금 실리적인 면에서 정세를 판단토록 했다. 평양감사에 무장 박엽을 임명하여 대포를 주조케 하는 등 전쟁에 대비하던 광해군은 명나라가 후금(청나라) 정벌을 위해 군사파견을 요청하자 강홍립을 도원수, 김응서를 부원수로 1만여 명의 조선군을 파견하면서 강홍립에게 밀지를 내렸다. 전력을 다해 후금과 싸우지 말고 상황을 보아 유리한 쪽에 붙어 전력을 보존하라는 밀지였다. 한마디로 실리외교를 취하자는 것으로 강홍립이 현장에 나가보니 이미 명은 후금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후금과 전투하는 체하다가 항복한 후 조선의 참전이 자의가 아님을 설명했다.
후금은 명과 후금 사이에 낀 조선의 사정을 이해하고 동정을 표했고 강홍립은 후금 진영에서 광해군에게 계속 밀서를 보내 광해군으로 하여금 당시의 정황을 속속들이 파악하게 했다. 간단하게 말해 남의 전쟁에 조선이 피를 흘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광해군은 현실적인 측면을 외교의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임진왜란으로 조선이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일본에 대한 원한도 묻지 않고 전란 때 선정릉을 훼손한 범인의 인도만을 요청하는 형식적인 절차를 거친 뒤 수교에 응했다.
참고적으로 명나라의 요동으로 망명하겠다는 선조를 일본의 앞잡이로 생각해 받아들이지 않은 명나라를 되돌아보면 결국 조선에 파병을 하기는 했지만 얼마나 자국 이기주의적인 관점에서 임진왜란을 바라보았는지 보여준다. 광해군의 이처럼 냉혹한 외교현실을 정확히 읽고 현실적인 외교정책을 펼쳤지만 명나라에 대한 명분론을 앞세운 친명론자들에게는 왕으로서는 낙제점이지 않을 수 없다.
학자들은 인조반정 후에 진행된 보복사태가 더욱 역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광해군을 폐위시켜 강화도로 유배 보내고, 광해군대의 정국을 주도했던 신하들을 수십 명이나 처형했는데 조선시대에 고관대작들을 수십 명을 처형한 것은 물론 일족들을 멸문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서슬이 퍼랬던 세조, 연산군 때에도 존재하지 않은 일로 이런 행위는 인조가 유일하다. 학자들은 인조가 즉위한 직후에 조선시대에 자행된 이런 행위는 수많은 비행으로 얼룩졌다는 연산군조차 발끝에도 못 따라 갈 수준이라고 설명한다.
광해군이 축출되자 인조를 내세운 신하들은 광해군의 정책을 따를 수는 없었다, 결국 친명배금(親明排金)정책으로 전환했는데 이것이 조선에 큰 파국을 불러왔다.
1627년 후금이 군사 3만여 명으로 정묘호란을 일으켜 파죽지세로 평산(平山)까지 쳐들어오자 조정은 강화도로 천도했다가 최명길의 강화 주장을 받아들여 형제의 의를 맺고 철수하게 한다. 하지만 1636년 국호를 청으로 바꾼 후금이 군신의 관계를 요구하자 조선은 강력하게 반발했고 청은 10만 대군으로 재침,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이때 조선의 백성들은 물론이고 인조 자신도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하면서 모진 고초를 겪었다. 척화파와 주화파 간에 치열한 논쟁이 전개된 끝에, 인조는 결국 주화파의 뜻에 따라 성을 나와 항복을 결심하고 인조 15년(1637) 삼전도(三田渡, 현 서울 송파구 삼전동)에서 군신의 예를 맺었다. 성문을 나선 인조가 임금이 눈밖에 쌓인 비탈길을 내려와 수향단에 좌정한 홍타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삼배구고두례를 행했다. 세 번 절 할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땅에 찧는 의식이다. 단 이 때 반드시 머리 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나야 한다. 청태종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다시 할 것을 요구해 인조는 사실상 수십 번 머리를 부딪쳤고 이에 인조의 이마는 피투성이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까지 세우는 등 굴욕의 예를 계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인조에게는 자존심이 있었다. 인조는 항복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스스로 하성(下城)이라 표현했다.
삼전동(지하철 잠실역 3번 출구에서 약100미터 거리)에는 현재도 높이 395센티미터, 너비 140센티미터, 무게 32톤의 이수(螭首)와 귀부(龜趺)를 갖춘 대형 청태종공덕비(淸太宗功德碑, 사적 제101호)가 있다. 인조 17년(1639)에 세워진 것으로 비양(碑陽)에는 왼쪽에 몽고문(蒙古文), 오른쪽에 만주문(滿洲文), 비음(碑陰)에는 한문으로 자경 7푼의 해서로 새겼으며 비액(碑額)은 전서로서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라고 적혀 있다. 내용은 청나라가 조선에 출병한 이유, 조선이 항복한 사실, 항복한 뒤 청태종이 피해를 끼치지 않고 곧 회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청나라에서 한강 상류 삼전도에 주필(駐蹕, 왕이 잠시 머무름)하고 항복 받은 사실을 영원히 기념하여야 한다는 주장에 의해 세운 것으로 몽고문·만주문·한문의 3종 문자로 같은 내용을 담은 것은 조선에서 이 비뿐이다.
비신없는 귀부가 좌측에 있는데 내용이 자못 흥미롭다. 병자호란이 끝난 후 청 태종의 전승기념을 위해 비를 건립하던 중 보다 큰 규모로 비석을 만들라는 청나라 측의 변덕으로 원래 만들어진 귀부가 용도 폐기되면서 남겨졌다는 설명이다. 안내문에는 보다 친절하게 ‘당시 정황을 근거로 청의 강요에 의해 귀부가 새로 제작된 것이라고 문헌사료를 통해 검토하여 기록한다’고 적혀있다.
원래 석촌호(石村湖) 주변에 세워졌으나, 치욕적인 의미 때문에 고종 32년(1895) 매몰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 일제에 의해 다시 세워지고, 1956년 문교부가 국치의 기록이라 해서 다시 땅 속에 묻었다가, 1963년에 다시 세우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2010년 4월 고증과 문화재 경관 심의를 거쳐 최초의 위치인 석촌호수 서호 언덕으로 옮겨졌다.
인조의 첫 번째 비인 인열왕후는 서평부원군 한준겸(韓浚謙)의 딸로 광해군2년(1610년) 능양군(綾陽君, 뒤의 인조)과 가례를 올렸다. 인조반정으로 왕비가 되었으며 소현세자(昭顯世子)와 후일의 효종인 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용성대군(龍城大君)을 낳았다. 1635년 42세의 늦은 나이에 출산을 하다 병을 얻어 타계하였다. 인을 베풀고 의를 따르는 것을 인(仁), 공로가 있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열(烈)이라 하여 인열(仁烈)의 시호를 받았다. 원래 인조는 명헌(明憲)의 시호를 내리길 원하였으나, 대사헌이었던 김상헌이 시호를 정하는 일을 담당 관원이 아닌 군주의 의향대로 할 수 없다 하여 바꾼 것이다.
소현세자도 비운의 세자라고 하는데 이 역시 인조의 작품이기도 하다. 청나라의 화평조건에 따라 청나라에서 인질을 요청하자 소현세자는 자진해서 부인 강씨와 봉림대군 부부, 그리고 주전파 대신들과 함께 볼모로 청나라 수도 심양(선양)으로 가서 심양관에 억류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오랫동안 청나라와 조선을 중재하는 역할을 하면서 함께 끌려와 재판을 받은 반청파 김상헌 등과 조선 백성 보호에 많은 힘을 썼다. 그러나 그는 청나라에 인질로 있으면서 역량이 부족한 조선이 무모하게 청나라에 대적한다는 것은 불가하므로 아버지 인조와는 달리 서양 과학을 들여와 조선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현세자가 이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청나라로부터 상상할 수 없는 굴욕적인 대우를 받았기 때문이다. 1638년 청나라 태종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한 원정에 조선군 5000명을 보내라고 칙서를 내리자 인조는 징병 면제를 요청했다. 인조의 답신에 청 태종이 발끈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왕(인조)은 어찌하여 갑자기 짐을 잊었는가? 또 인질로 와 있는 왕의 두 아들을 망각하였는가?”
청 태종뿐만 아니라 조선을 정복한 용골대와 마부대는 심양에 인질로 와 있는 소현세자에게 황제의 명을 전한다며 세자를 꿇어앉혀놓고 과거에 조선이 명나라 편을 들어 청에 대항한 것 등을 열거하며 은혜를 모른다고 겁박했다. 소현세자는 거듭 황제가 머무는 대궐 앞으로 나아가 대죄(待罪)하는 뜻을 알렸고 결국 스스로 황제의 서행(西行)에 따라갔다. 청나라의 명나라 정복에 참여하면서 소현세자는 동아시아의 급변하는 역관계를 똑똑히 목격하면서 적어도 청나라를 이기려면 청나라보다 전력이 우세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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