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의 권한과 임무>
왕비는 각종 부신(符信)을 통해 명을 전달했으며, 국왕과 왕세자 부재 시 국왕의 임무를 대행하였다. 또한 왕비는 신료들의 사은숙배를 비롯해 조하(朝賀)와 문안을 받았으며, 주인으로서 주최하는 연회도 있었다. 왕비의 공적 임무는 그야말로 여러 가지다.
놀라운 것은 국왕이 도성 밖으로 거둥했을 경우 왕비가 국왕의 업무를 대행했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에도 조건이 있는데 왕세자가 수행했을 경우다. 법전에는 왕이 도성 밖으로 행차하고 왕세자가 왕을 배종했으면 왕비에게 보고하도록 되어 있다. 곧 국왕과 왕세자가 궐에 없으면 왕비가 국정을 책임지는 책임자였다.
왕비에게 어떤 사안을 보고하는 경우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경국대전』에 따르면, 왕이 거둥 했을 때에 군사(軍事)나 정사(政事)에 중대한 일이 있는데 왕이 있는 행재소에 알릴 수 없을 때에 왕비의 내지로 거행하도록 하였다. 이때에는 수시로 품의하여 지시를 받는데 『대전통편』이나 『대전회통』이나 변함이 없다.
둘째, 대궐문과 도성문의 개폐다. 조선시대 궁성문은 초저녁에 닫고 해 뜰 때 열며, 도성문은 인정(人定)에 닫고 파루(罷漏)에 열었다. 『속대전』에는 왕이 궁궐을 나가서 도성 안에 거둥 할 때에는 궁궐문의 개폐에 관하여 대비나 왕비의 표신 중에서 청하여 거행하였다. 반면 왕세자가 궁궐에 있으면 왕세자의 지휘로 거행하였다.
셋째, 계성기(啓省記)의 보고다. 계성기는 궁궐을 숙위하며 순찰하는 관원 및 장수가 각각 입직 장교 및 군졸의 인원을 자세히 적어서 병조에 보고하는 문서다. 성기는 매일 국왕에게 보고하는데 왕이 교외에 거둥하였을 때에는 대비전이나 왕비전에 보고하고, 세자가 수행하지 않았으면 동궁에 보했다. 그러나 추후 왕이 도성 밖으로 거둥했을 때에는 행재소에서 재가를 받으며 밤을 지낼 때에는 미리 재가를 받아 왕세자나 왕비 등에 보고하지 않았다.
<시련이 많은 왕비>
왕비가 되는 방법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우선 세자빈 또는 종친의 부인으로 간택되었다가 남편이 왕위에 오르면서 같이 격상되는 경우, 처음부터 왕비로 간택된 경우, 후궁이었다가 왕비가 죽고 새로운 왕비가 되는 방법이다.
이 중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중전이 되고, 아들이 대를 이어받아 대비마마가 되는 것이 가장 정통적이고 정상적인 순서다. 세자빈으로 간택되는 경우 대개 10대의 나이에 간택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정작 이 코스를 거쳐 조선의 왕비가 된 인물은 6명에 불과하다.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 연산군의 비 폐비 신씨, 인종의 비 인성왕후 박씨, 현종의 비 명성왕후 김씨, 숙종의 비 인경왕후 김씨, 경종의 비 선의왕후 어씨다. 그리고 현종의 비 명성왕후 김씨는 세자빈에서 왕비로, 그리고 아들 숙종이 왕이 되면서 대비의 위치까지 오른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만큼 세자빈에서 왕비를 거쳐 대비까지 가는 길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조선에 27명의 왕이 있었고 왕후의 자리에 오른 여성은 41명이나 되는데, 국모의 자리에 올라 국민의 사랑을 받는 것이 기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정통 코스를 거친 왕비가 소수에 불과한데 이유는 간단하다. 세자 교체 또는 정변과 반정 등 왕위계승을 둘러싼 정치적 변수도 적지 않았고, 후궁의 득세나 외척의 모반사건 등으로 폐위와 사사(賜死)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적장자가 아닌 차남이나 손자의 즉위, 여기에 더해 후궁 소생의 왕들이 즉위하는 상황도 이어진 것도 한 요인이다.
양녕대군의 세자빈과 같이 세자가 교체되는 바람에 대군 부인으로 강등된 사례도 있고, 인수대비로 널리 알려진 성종의 어머니는 남편 의경세자가 요절하는 바람에 세자빈의 지위를 잃었다가 나중에 자신의 둘째 아들이 성종으로 즉위하면서 대비의 지위에 오른다. 반면에 소현세자의 빈 강씨는 남편의 갑작스런 의문의 죽음으로 세자빈 지위를 박탈당함은 물론 사약까지 받았다. 혜경궁 홍씨 역시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세자빈의 지위를 잃는다.
<왕비가 주관하는 연향>
막강한 권한을 갖는 왕비이므로 왕비가 직접 주관하는 궁중 연회도 있다.
조선시대 궁중 잔치는 연향(宴享), 진풍정(進豊呈), 진연(進宴), 진찬(進饌), 진작(進爵) 등 여러 용어로 표현되는데 연향은 술과 음식을 준비하고 풍악을 울려 신하들이나 빈객(賓客)을 대접하는 잔치를 말한다.
왕비가 주관하는 연향은 회례연과 양로연이었다. 회례연은 신하들을 위무하는 잔치로서 정월 또는 동짓날에 종친 및 문무백관(文武百官)이 모여서 왕에게 절을 올린 후 거행되었다.
회례연은 왕과 신하가 친밀감을 높이기 위해 여는 잔치로서 왕이나 신하 모두 중시하였다. 중종은 회례연이 군신 상하가 주연을 즐기면서 정리(情理)를 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모두 1년에 한 번 있는 성대한 일로 왕과 신하가 주연을 하면서 서로 마음을 소통하는 자리였다고 할 수 있다.
회례연은 국왕과 남성 관료들만의 잔치가 아니었다. 국왕이 회례연을 차리면 내전(內殿)에서는 이에 상응하여 왕비가 주관하는 회례연이 펼쳐졌다. 왕비가 주관하는 회례연도 왕의 회례연과 함께 실시되었는데 왕비책봉, 왕세자 책봉, 왕세손 책봉이 있을 때에도 왕비가 명부들에게 회례연을 베풀었다. 이 때 의식은 정월과 동지에 베푸는 회례연과 같았다. 회례연에는 왕세자빈과 내외명부(內外命婦) 모두 참석하였다.
조선조에서 궁중에서 거행하는 양로연은 매우 중요한 행사다. 조선시대 양로연은 세종대에 스승 공경의 의례로 처음 시행되었다고 알려지는데 『경국대전』에 따르면, 양로연은 대소원인(大小員人)의 나이 80세 이상인 사람을 대상으로 베푸는 잔치다. 조선조에 80세의 나이가 얼마나 어려운 지 알 수 있는데 왕이 양로연을 열 때에 왕비는 서울 소재 대소원인의 부인들을 초청해 내전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물론 양로연은 주로 짝을 이루어 시행되었지만, 국왕만 실시할 때로 있고 왕비만 실시할 때도 있었다. 또 왕과 왕비가 함께 주관하여 남녀 노인들을 함께 참석시키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양로연은 약 80회 정도 실시되었는데 중종연간까지 활발하게 시행되다가 조선후기에는 잘 시행되지 않았다.
왕비가 주관하는 양로연도 28회나 되었는데 매우 흥미로운 기록이 나타난다.
‘중궁이 사정전에 나아가 양로연을 베풀었는데, 사대부 아내로부터 천한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362인이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귀천의 구별이 없이 관료 이외에 일반인 부인도 장삼(長衫)을 걸치지 않고 짧고 편한 의복을 입고 들어와 참석할 수 있었다. 또 여성 노인이 거동이나 오래 앉아 있기가 불편하므로 왕비에게 의례를 올린 뒤에는 임의로 집에 돌아가거나, 귀천의 구별 없이 부축해주는 여자하인을 대동할 수 있었다.
<왕비의 거처>
왕과 왕비가 왕궁에 거주하지만 왕비의 주 거처는 교태전이다. 경복궁의 경우 왕의 침전인 강녕전 바로 뒤쪽 담 하나 사이에 위치하는 교태전은 왕비가 사생활하는 내전이므로 150여 채의 경복궁 전각 가운데 가장 화려하게 치장되었다. 건물 주변은 모두 높은 담으로 막혀있고 그 뒤로 넓은 후원이 있으며 잘 알려진 아미산과 향원정이 있다.
정면 9간 측면 4간 이익공의 겹처마에 무량각 지붕으로 다른 건물에 비해 그 형태가 매우 특이하다. 교태전(交泰殿)은 왕비의 침전(寢殿)이자 시어소(時御所)로, 중궁전(中宮殿)이라고도 한다.
교태전은 궁궐 안에서 가장 깊고 은밀한 곳으로 왕비가 머무는 곳이지만 그저 왕비의 침소 역할이나 혹은 개인적인 용도로만 쓰였던 것은 아니다. 조선왕조에서 왕비가 갖는 지위와 역할은 내외명부(內外命婦)를 총괄하고 왕실의 각종 공식 업무 등을 주관하였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교태전은 왕비의 공식 집무실로 볼 수 있다.
교태전의 뜻은 주역의 원리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즉 태(泰)는 주역의 괘인데 괘의 형상은 양을 상징하는 건(乾)이 아래로 가있고, 음을 상징하는 곤(坤)이 위로 가 있는 형상이다. 이는 '하늘로 솟는 양(陽)과 땅으로 가라앉는 음(陰)의 교합으로 생성(生成)한다'는 뜻이다. 음과 양이 화합하고 교통하는 가운데 왕조의 법통을 생산하고 이어주는 공간이 바로 교태전이기 때문이다.
경복궁 창건 당시 교태전을 세웠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지만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교태전이 세워진 것은 세종 22년(1440) 무렵으로 추정된다.
경복궁의 다른 건물과 마찬가지로 교태전 또한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고종 2년(1865) 재건된다. 그러나 1917년 창덕궁 내전에서 대화재가 나자 일제는 이를 "재건한다"는 핑계로 교태전을 포함한 경복궁 내전 일대를 헐어버린다. 이때 교태전도 함께 철거되어, 현재의 창덕궁 대조전을 재건하는데 사용되는데 1995년 복원되었다.
흔히 궁궐을 구중궁궐이라고 묘사되는 것은 아홉 겹으로 둘러싸인 깊고 은밀한 곳이라는 뜻이지만 궁궐 전체가 그렇게 깊고 은밀한 곳은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활성화된 공간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중궁궐이라는 말에 딱 어울리는 공간이 바로 왕비가 사는 중궁전 즉 중전(中殿)이다. 중전이라면 교태전을 의미하기도 하므로 현재 복원된 건물이기는 하지만 일반인들이 구중궁궐을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복이라고 여길만하다.
왕이 죽고 왕비가 대비가 되면 자경전(보물 제809호)으로 옮겨진다. 교태전 후원에서 일각문인 건순문(健順門)이나 벽돌로 쌓은 월문(月門)인 연휘문(延輝門)을 통해 북쪽으로 나오는데 교태전 후원의 아미산 동쪽에 위치한다.
자경전은 고종 4년(1867)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조대비)를 위해 옛 자미당(紫薇堂)터에 지은 건물로 고종 13년(1876) 화재로 인해 소실되어 고종 25년(1888)에 새로 지은 것으로, 약간의 변화를 거쳐 오늘에 이르는데 고종 때 지은 침전 건물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다.
자경전에서 압권은 자경전 꽃담이다. 이 꽃담은 그 너머로 보이는 자경전 지붕 합각을 치장한 꽃담과 한데 어우러져 화사한 광경을 연출하며 뒤를 돌아보면 교태전의 꽃담장도 시야에 잡힌다. 자경전 꽃담은 가장 아름다운 궁궐 담장의 하나다. 꽃담은 맨 아래 기초에 장대석, 그 위로 네모난 화강석을 세 단 놓은 다음 갖가지 무늬를 장식하는데 붉은 황토색 벽돌을 쌓아올리다가 윗부분에 기와로 지붕을 덮어 마감하였다.
자경전에서 보다 잘 알려진 것은 보물 제810호인 십장생 굴뚝이다. 꽃담처럼 담에 붙여서 만든 굴뚝으로, 너비 381센티미터, 높이 236센티미터, 두께 65센티미터다. 굴뚝벽의 상단 중앙에 나티(짐승모양을 한 일종의 귀신)문전으로 박고 좌우에 학문전(鶴紋塼)을 박았다. 그 아래 중앙벽 구간에 해, 산, 구름, 바위, 솔, 거북, 학, 바다, 사슴, 포도, 연꽃, 대나무, 불로초를 조형전으로 만들어 배치하고, 그 밑에 불가사리 두 마리를 전(塼)으로 만들어 박았다. 그리고 굴뚝의 좌우 좁은 벽면에는 박쥐문과 당초문이 배치되었는데 해·바위·거북 등 십장생은 장수, 포도는 자손의 번성, 박쥐는 부귀, 불가사리는 벽사를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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