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세계문화유산(UNESCO)/조선왕릉

조선 왕릉(44) : 제2구역 서삼릉(10)

Que sais 2021. 4. 5.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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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왕후가 남다른 국정을 전횡했지만 그녀도 세월의 벽을 넘을수는 없었다. 15654, 창덕궁 소덕당에서 65세를 일기로 문정왕후가 사망한다. 그녀가 죽자 사관은 실록에 서경을 인용해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것은 집안의 다함이다라고 적었다.

문정왕후의 사망으로 날개를 잃은 윤원형과 그의 첩 정난정은 사림파의 탄핵을 받고 황해도 강음으로 유배된 후 최후를 맞았다. 보우는 유생들의 탄핵을 받아 제주도에 귀양가서 제주목사 변협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문정왕후는 사후 중종 곁에 묻히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중종의 무덤 옆은 이미 인종의 생모인 제1계비 장경왕후가 지키고 있었다. 1542년 문정왕후는 보우와 의논해 현재의 고양시 서삼릉에 있던 중종 왕릉을 성종의 선릉 부근으로 옮겼다. 중종의 무덤이 아버지인 성종 곁에 가야 한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그러나 새로 옮긴 중종의 무덤이 지대가 낮아 침수 피해가 잦자 문정왕후 사후 아들 명종은 어머니의 무덤을 태릉(泰陵)으로 조성했다. 중종 곁에 묻히려던 그녀의 꿈을 이루지 못했는데 그나마 명종의 무덤인 강릉(康陵)은 태릉 옆에 조성되어 태강릉이 된다. 이 부분은 태강릉 장에서 설명한다.

인종의 장지가 서삼릉으로 결정된 사유는 효심이 두터운 인종의 다음과 같은 유언 때문이었다.

 

내가 우연히 병을 얻어서 부왕께 끝까지 효도를 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망극한 심정을 어떻게 모두 말할 수 있겠는가. 반드시 부왕과 어머니 장경왕후가 계신 정릉(靖陵)의 근처에 내 묘를 써야 한다. 또한 모든 내 장사는 소박하게 하여 백성들의 힘을 펴게 하라.’

 

인성왕후는 금성부원군 박용의 딸로 1524년인 11세에 세자빈에 책봉되고 인종 즉위와 더불어 왕비가 되었다. 세자빈으로 간택될 때의 책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있다.

 

박씨는 명문에서 아름다움을 길러 공경을 갖추고 숙덕(淑德)하여 아름답고 순한 덕을 지녔음에 깊고 조용한 경지에 이르고 예를 지켜 어르러지지 않으며 온순하여 웃사람의 명을 잘 따르니 어찌 번거롭히랴? 지아비가 창도하고 지어미가 따르는 것을 징험하는 것은 바로 혼인의 처음에 달렸으니 이제 사신 영의정 남곤과 병조판서 홍숙을 보내어 그대를 세자빈으로 책명한다.’

 

한 여자에 대한 칭송이 이처럼 높은 것은 매우 드문 일인데 인종의 재위기간은 9개월이므로 인성왕후는 인종 사망 후 32년간을 자녀없이 홀로 살았다. 여하튼 인종의 유언에 의해 만들어진 효릉은 간좌곤향(북동에서 남서 방향)의 언덕 위에 있는 쌍릉으로 효성이 지극했던 인종을 기려 능호도 효릉(孝陵)으로 정해졌다.

기록에 따르면 인성왕후가 사망하자 선조가 인종 곁에 장사지내면서 왕릉의 개수를 명해 병풍석을 둘렀다고 한다. 석탑 기단의 대석과 갑석 사이를 막아 댄 넓은 돌인 면석(面石)에는 12지신상(地神像), 귀퉁이 돌인 우석(隅石)에는 구름 문양을 조각하였는데 많은 왕릉 중에서 이들 조각이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인성왕후 봉분에는 병풍석이 생략되어 간략한데 위 기록에 의하면 인종의 왕릉임에도 불구하고 선조가 개수를 명할 때까지 병풍석도 없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인종이 사망한 후 을사사화로 인종의 외가, 처가 및 가까운 신하들이 큰 피해를 입었던 시대적 상황을 볼 때 왕에 대한 대우가 달라져 왕릉 조성을 소홀히 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왕릉으로 곡장이 둘려진 봉분 주위에는 석양. 석호 등이 호위하고 있고 봉분 앞에는 혼유석과 망주석, 장명등, 문인석, 무인석, 석마 등이 배치되어 있다.

현재 서삼릉의 3개 왕릉 중에서 효릉은 비공개다. 효릉이 <농협중앙회젖소개량사업소> 관할 안에 있어 축협을 통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효릉은 비공개이지만 일반인들에게 완벽하게 공개가 차단된 것은 아니다. 매월 2째 주와 마지막 주 토요일 10시부터 해설사가 동행하여 방문할 수 있는데 동절기에는 답사가 다소 위험하여 공개하지 않으므로 방문 가능 여부를 체크할 필요가 있다.

 

<십이지신상>

효릉에 12지신상이 나오지만 효릉에 특별한 것은 아니다.

한국의 경우 십이지 신앙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까지는 밀교의 영향으로 호국적 성격을 지녔으나, 삼국통일 이후는 단순한 방위신으로서 그 신격이 변모해갔다. 즉 탑을 만들 때 그 기단부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였는데, 8세기 중반에 건립된 경주 원원사지(遠願寺址, 보물 제1429)에 있는 삼층석탑이 그 효시다. 이것은 탑이 불교건축에 있어서 구심점으로 인식된 삼국통일 후의 일반적인 경향에 따른 발명품이다.

삼국통일 전에는 단순히 탑에 사천왕(四天王십이지신상 등을 부조하는 기법이 성행했는데 이후 능묘의 호석에도 영향을 주어 구릉형(丘陵形)의 무덤 밑 부분을 원형으로 돌리고 각각 십이지신상을 안치했다. 대표적인 곳으로는 김유신묘·진덕여왕릉·경덕왕릉·구정동 방형분·괘릉 등이 있다. 성덕왕릉은 호석이 넘어지지 않도록 삼각형 수석(袖石)을 받치고 그 사이에 따로 환조(丸彫) 십이지신상을 세운 특이한 예이며, 그 이후의 왕릉에는 괘릉과 마찬가지로 호석 면에 십이지신상을 양각하였다. 한편 신라에서는 갑옷에 무기를 든 모습이 자주 보이는 데 이는 신라 특유의 모습으로 이들 12지신상의 형태는 한국인의 창안이라 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 와서는 입상뿐만 아니라 좌상도 나타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전대와 거의 같으나, 인조의 장릉(長陵)에서부터는 십이지신상 대신에 모란무늬가 나타난다.

12지신상은 12() 각각을 상징하는 동물을 신격화하여 표현상 상을 말한다. 열두 동물에 대한 개념은 중국의 은대(殷代)에서 비롯되었다고 추정하는데 동양만이 아니라 고대 이집트그리스중앙아시아인도 등 많은 지역에 퍼져있는데 유럽의 경우 고양이나 사자가 들어있기도 한다.

십이지신상이 우리에게 쉽게 이해되는 것은 대부분 사람과 매우 친한 동물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특이한 것은 오래 전부터 인간과 매우 가까이 지내는 고양이가 빠지고 사람들에게 많은 해를 끼치는 쥐가 들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쥐가 부지런하고 한 번에 새끼를 여러 마리 낳는 다산의 습성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이해한다.

12동물을 방위나 시간에 대응시킨 것은 대체로 한나라 중기의 일로 추정하며 시간방위를 상징하는 12지신상을 동물머리에 사람의 몸을 차용한 것은 중국 당나라 중기부터다. 12지신의 배열에 관해 매우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너무 잘 알려져 있어 단순한 흥밋거리 이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 12지신의 배열은 매우 심오한 우주 생성원리와 사람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일상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선 121년이 열두 달로 나뉘는 것, 그리고 공간 개념과 시()와 같은 근원과 숫자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십이지의 시간적 개념은 불교에서 12지연기와 관련이 있다. 불교의 근본 교리에는 행()()()()() 12가지 요소가 상호 작용하면서 윤회하며 존재한다. 즉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흐르는 규칙성 즉 생명의 존재 양식이 12지연기와 관련된다. 한 가지 예로 사람이 죽으면 저승에 이르기까지 12대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이들 대문을 통과할 때마다 갖가지 시련을 견뎌내야 한다. 그런데 이승에서 덕을 베풀면 그 고통을 감내할 수 있다고 한다. 때문에 12라는 숫자는 매우 신성하게 받아들였으며 인간의 염원을 기원하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내용은 이들의 순서가 달리기를 통해 결정되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하늘을 날 수 있는 용이 네 번째로 들어오고 몸집이 가장 작은 쥐나 동작이 느린 소가 1, 2등을 차지했으니 다소 헷갈리기 마련이다. 설화로 알려진 이들의 달리기에는 여러 가지 내용이 있는데 대체로 대동소이하므로 그 중 한 가지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옛날 석가가 세상을 떠나기 전(혹은 새해 인사를 받기 위해) 세상의 뭇짐승들을 소집했다. 부처는 이들 동물이 도착한 순서에 따라 천국으로 통하는 12대문의 수문장으로 삼아 해마다 1년씩 돌아가며 당직을 서는 임무를 부여하기로 했다.

그런데 소는 걸음걸이가 다른 동물들에 비해 너무 느리므로 특별히 간청하여 하루 전날 저녁에 출발케 해 달라고 했다. 부처는 소의 정성을 갸륵하게 여겨 그렇게 하라고 허락했다. 소는 덕분에 석가의 궁궐에 일찍 도착할 수 있었는데 약삭빠른 쥐는 소의 동태를 살피다가 잽싸게 소 등에 올라타 소가 문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재빨리 뛰어 내려 소보다 먼저 문안에 들어와서 1등이 되었다. , 소를 이어 호랑이는 3, 달리기에 자신이 있는 토끼는 도중에 낮잠을 자는 바람에 4등이 되고 속도라면 자신있는 용은 날아오다가 하늘 나라에 열려 있는 과일을 발견하고 이것을 따먹느라 지체해 5등으로 도착했다. , , 원숭이 등의 순으로 도착했는데 닭은 사람들에게 날이 밝은 것을 알리고 출발했기 때문에 늦게 도착했고 이어서 개, 돼지 차례로 들어왔다.’

 

이같은 십이지의 순서가 단순히 달리기에 의해서 선정되었다는 것이 참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지만 십이지에 나타나는 동물을 보면 초월적이고 환상적인 요인들이 배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용이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기린, 봉황은 물론 신성하다고 여겼던 십장생의 사슴, 거북, 학 등도 포함되지 않았다. 이는 십이지신이 각별히 특별한 상징성을 보여주는 동물들을 선택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십이지신은 인간의 일상 생활과 밀착된 동물들로 이들은 모두 농사와 관련된다. 용도 상상의 동물이기는 하지만 농사에 필요한 비를 내리게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쥐를 제외하면 모두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동물들로 이들 동물이 가족의 건강과 농사의 풍작을 기원하는 염원을 담고 있다고 설명된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쥐를 먹기도 한다.

 

12지 동물에서 발견되는 또 하나의 흥미있는 사실은 순서에 일정한 규칙성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동물들의 발가락 수다. 즉 쥐의 발가락은 9, 4, 호랑이 5, 토끼 2, 5, 0, 1, 4, 원숭이 5, 4, 5, 돼지 4개로 12동물의 발가락 수는 홀수, 짝수, 홀수, 짝수의 조합을 이루고 있다. 이런 규칙성을 발가락 우기설(偶奇設)이라 하는데 이는 단순한 조합이 아니라 우리 생활에 깊이 박힌 음양오행사상의 한 부분이라 생각하면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2지가 홀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음양의 순화적 조합을 포함하고도 있는 인간의 물질과 정신 세계를 모두 적합시킨 고도의 산물이라는 뜻이다. 이런 내용을 감안하면 무덤이나 사찰에서 중요한 소재로 12지신을 사용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다.

숙종 30(1704) 효릉에 산달(山獺·너구리, 담비, 족제비를 칭함)이 나타나 수라간의 구도(溝道) 즉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자, 노복인 주명철이 불을 지펴 연기를 넣어 잡으려다 그만 화재를 내 능상까지 불이 번졌다. 조선왕실에서 가장 중요한 왕릉을 태웠으니 사건 중의 사건으로 결국 삼성추국(三省推鞫)의 심문 끝에 해당자는 사형을 당하고 가족과 관리자, 참봉 등 관리인들은 천민으로 강등돼 귀양을 갔다. 왕릉이 타버리는 전례 없는 일이 벌어지자 숙종은 정전에 들지 않고 3일간 업무를 중단하고, 백관들은 천담복(淺淡服) 즉 국상이나 제례 때 입는 엷은 옥색 제복을 입고 위안제를 올렸다고 한다.

 

효릉 좌측은 조선 왕실의 묘가 가장 많이 모여 있는 집장묘로 잘 알려져 있다. 소현세자의 소경원. 조선 말기까지 역대 후궁을 비롯하여 대군, , 공주, 옹주 등의 분묘가 별도로 조성되어 있다. 본래 왕릉 능역 내에는 후궁이나 왕자, 공주의 묘를 사용할 수 없음에도 일제강점기 및 해방 후 도시화에 따른 개발 과정에서 한 곳으로 집장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는 1930년대 일제강점기시 전북 금산군 추부면에 있는 태조의 태반을 묻은 태묘를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산재해 있던 태조부터 순조까지 왕 21위와 대군, 세자, 공주 등 모두 54위의 태를 한 곳에 모은 태실이 있다. 일제는 태실의 형태를 ()’ 자 형태로 만들고 태실 묘석 높이도 3미터에서 1미터 가량으로 대폭 축소하여 민족정기 말살을 시도했으며 서삼릉을 신사참배의 장소로 만들 목적으로 본래의 형태를 훼손해 공원화 했다. 또한 서삼릉에 각지에 있던 태실을 이전한다는 명복으로 태실에 보관했던 이조백자 등 각종 문화재를 모두 빼돌렸다고 왕릉의 저자 이상룡은 적었다.

 

효릉 인근에 특이한 묘가 있는데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의 묘다.

성종이 사망하고 왕이 된 연산군은 자신의 생모가 폐비 윤씨인 것을 알고 윤씨의 묘를 능으로 승격시키고 묘를 회묘에서 회릉으로 고쳤다. 능의 석물 또한 왕릉의 형식을 따라 조성하였고 제향 절차를 종묘에 위패를 모신 연대 왕의 제사 절차에 맞추도록 했다.

그러나 연산군이 중중반정으로 폐위되자 회릉은 다시 회묘로 격하되었다. 회묘로 격하되었음에도 능 자체를 훼손하지 않아 왕릉으로서의 면모를 그대로 갖고 있다. 특히 웅장한 무인석과 문인석, 석호와 석양은 다른 왕릉에서 볼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모습을 갖추고 있어 실제로 연산군 묘보다 한층 돋보인다. 회묘는 원래 서울 동대문 회기동에 있었으나 1969년 경희대학교 공사 때 이곳으로 옮겼다.

 

참고문헌 :

[을 만나다·13]서삼릉-예릉(25대 철종·철인왕후), 염상균, 경인일보, 2009.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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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만나다·24]태릉 (11대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 이창환, 경인일보, 2010.03.11

문정왕후, 김정미, 네이버캐스트, 2010.07.09

25년 세자8개월 재위 꿈을 펼 기회도 없었다, 이창환, 주간동아, 2010.08.09

그저 놀 수밖에 없었던 강화도령백성만 삼정 문란에 신음, 이창환, 주간동아, 2011.02.28.

父王 죽음에 굶다가 비위 상해 요절, 장동민, 문화일보, 2012.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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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의 수수께끼(2), 이덕일 외, 김영사, 1999

경주역사기행, 하일식, 아이북닷스토어, 2000

우리문화이야기, 김진섭, 초당, 2001

악녀의 세계사, 김향, 가람기획, 2005

조선왕릉 답사수첩, 문화재청, 미술문화, 2006

역사로 여는 과학문화유산답사기1 : 조선왕릉, 이종호, 북카라반, 2014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 III, 국립문화재연구소, 2012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 IX, 국립문화재연구소,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