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세계문화유산(UNESCO)/조선왕릉

조선 왕릉(43) : 제2구역 서삼릉(9)

Que sais 2021. 4. 5. 10:08
728x90

<철저한 문정왕후>

문정왕후와 인성왕후의 싸움이 100% 진실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여하튼 인종은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측하고 이복동생인 경원대군(명종)에게 전위하도록 분부하여 결국 즉위 9개월 만에 사망한 단명의 왕으로 기록된다.

문정왕후의 악착스러움에 의해 12살의 명종이 등극하자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에 들어간다. 사실 조선왕조에서 수렴청정은 생소로운 것이 아니다. 예종과 성종이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은데 이때는 형식적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문정왕후에게는 어림없었다.

특히 명종 시대에는 문정왕후 이외에도 외삼촌 윤원형과 그의 정부 정난정, 더불어 문정왕후가 힘을 실어준 승려 보우(普雨)까지 줄줄이 등장하면서 명종은 왕이면서도 늘 조연일 수밖에 없었다.

사건이 복잡해진 것은 인종과 명종의 지지세력이 다르기 때문이다.

같은 윤씨이지만 인종의 외삼촌은 윤임이고 명종의 외삼촌은 윤원형이다. 한마디로 외척 간 대립이 심해지고 훈구와 사림이라는 대결구도가 강화되면서 권력 투쟁은 보다 치열하게 전개됐다. 윤임을 지지한 유관·유인숙 등은 대윤(大尹), 윤원형을 지지한 윤원로·윤개 등은 소윤(小尹)으로 불린다.

양측의 세력이 팽팽한 대립속에 중종이 건재할 때는 크게 사단이 벌어지지 않았지만 중종이 사망하자 대윤(大尹)의 지지 속에 인종이 등극했다. 왕위에 오른 인종은 곧바로 이언적, 송인수, 김인후 등 사림파를 등용하고 기묘사화로 희생된 조광조, 김정 등을 복관시켰다.

이동안 문정왕후는 인종이 빨리 죽도록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조처는 모두 취했다고 알려진다. 짚으로 허수아비를 만들고 허수아비의 가슴에 비수를 꽂아 인종의 침전 문 앞 뜰에몰래 파묻기도 했다. 또한 인종을 저해하는 비술을 듣기만하면 즉시 시행했다.

여하튼 인종이 단명하고 명종이 등극하자 정국은 급변했다. 문정왕후와 윤원형은 1545년 소윤 세력과 유관, 유인숙, 권벌 등 사림파를 숙청하는 <을사사화>를 일으키면서 공공연히 외척정치 시대가 열렸음을 알렸다.

문제는 그녀의 수렴청정이 조선 역사에서 많은 면에서 부정적인 면을 이끌어냈다는 점이다. 문정왕후는 윤원형, 정난정과 외척정치 전성시대를 연출한 동시에 반대파를 가혹하게 탄압했다. <을사사화>로 피바람을 부르더니 1547, <양재역 벽서(壁書) 사건>이 이어졌다.

이 사건은 명종실록부제학 정언각이 선전관 이노와 함께 봉서(封書)를 올린 상황으로부터 시작된다.

 

신의 딸이 남편을 따라 전라도로 시집을 가는데, 부모 자식 간의 정리에 한강을 건너 양재역까지 갔었습니다. 그런데 벽에 붉은 글씨가 있기에 봤더니 국가에 관계된 중대한 내용으로서 지극히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이어 보고한 내용은 여주(女主)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李芑) 등과 권세를 농간하고 있으므로 나라가 곧바로 망할 것이므로 기다리기만하면 된다는 것이다. 문정왕후를 여주라 조롱하고, 그 아래에서 이기 등이 권세를 농간하고 있다는 벽서는 곧바로 문정왕후의 반격으로 이어진다.

중종의 아들인 봉성군 등 3명이 역모 혐의로 처형되는 것은 물론 사림파의 중심 이언적, 백인걸, 노수신 등 20여명이 처형되거나 유배를 갔다. 반대파의 씨를 말리자 윤원형이 독재 권력을 유감없이 휘둘렀는데 윤원형의 재산이 나라의 재산보다 많다는 말이 나돌았을 정도다.

1555년 조식은 상소문을 올려 명종을 고아, 문정왕후를 과부로 표현하면서 나라가 심각한 위기 상태라고 지적했다. 그런데 1559년부터 3년간 임꺽정의 반란이 일어났고 농민 생활이 파탄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정왕후는 자신의 뜻을 밀고나갔다. 문정왕후를 조선 왕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권력을 장악하면서 불교의 중흥을 도모했다는 점이다.

 

봉은사

 

명종 5(1550) 12, 문정왕후는 불교의 총본산인 현 강남의 봉은사 주지 보우(普雨)와 의논하여 선종과 교종 양종을 부활시키고 봉은사를 선종의 본사, 봉선사를 교종의 본사로 삼았다. 또한 사찰이 일방적으로 빼앗겼던 토지를 반환하게 하고, 연산군 때 폐지된 승과도첩제를 다시 실시하였으며 승려 보우를 신임하여 봉은사 주지로 임명했다.

문정왕후는 성리학자들인 관료들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첩제를 실시해 선교 양종에서 불과 2년 동안에만 4,000여명의 승려를 뽑았으며 전국에 300여개 사찰을 공인하였다. 전국의 유학자들이 문정왕후의 때 아닌 불교 부흥책에 아연실색하여 반대 상소를 빗발치듯 올렸지만 문정왕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문제는 유생들이 문정왕후에게 불교가 적극적으로 개입할 빌미를 주었다는 점이다.

당시 기본 이념은 유교였지만 왕실에서 많은 사람들이 불교에 의지했다. 그런데 유교에 집착한 유생들이 덕종의 원찰인 정인사(正因寺), 태종의 원찰인 회암사까지 난입하여 소란을 피우는 것은 물론 기물들을 파손했다. 그러므로 문정왕후는 유생들의 사찰 출입을 금지시키고 이어서 불교의 부활을 명령했다.

 

회암사무학대홍읍탑및쌍사자석탑(보물389호)

또한 조선 최대의 사찰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경기도 양주의 화암사에 불화 400점을 그려 봉안하는 등 많은 불교문화재가 조성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화암사에 봉안되었던 문정왕후 발원 불화는 대부분 소실되었지만 국내외에 일부가 남아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문정왕후에 의해 승려들의 과거시험인 승과(僧科)제도와 선교 양종이 부활되자 자연 승려의 자질이 향상되었다.

놀라운 것은 이런 작업을 위해 승려 보우를 병조판서에 임명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산사에 있는 스님 보우를 국방장관에 임명한 것인데 현대였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당대 전제군주의 파워가 얼마나 강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지만 유생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유생들은 선교 양종과 도첩제승과제를 폐지하고 보우의 처벌을 요구하는 상소를 계속 올렸는데 그 상소문 수가 문정왕후의 불교 중흥책을 발표한 지 6개월 사이에 무려 423건이나 되었다고 한다.

승과(僧科)에 대해 보다 설명한다. 승과란 승려의 자질을 높이기 위해 요즈음 국가고시처럼 국가에서 고급 승려들을 배출하기 위해 자격시험을 치룬 것을 뜻한다. 3년에 한 번씩 문무과의 과거와 더불어 치렀던 승과는 선종(禪宗)의 경우 전등록, 교종(敎宗)의 경우 화엄경으로 출제 범위를 제한했다. 지금 직제로 따져 종정(宗正)이 판사이고, 총무원장인 장무(掌務) 1. 교무부장인 전법(傳法) 3, 그리고 존경받는 학승인 증의(證義) 10명이 시험을 관장했고 조정에서 내시별감을 감독관으로 보냈다. 그러나 어느 곳이나 시험에서 부정이 있는데 이곳도 마찬가지다. 중종 때 성현이 지은 용재총화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뇌물을 판사와 중의에게 바치면 급제하고, 뇌물을 바치지 않으면 비록 능력이 있고 이름이 있는 자라도 합격을 못하니 사사로움을 따르는 것이 속세와 다름이 없다.’

 

한 번에 양종(兩宗)에서 30명씩 뽑는데 뽑힌 사람을 대선(大選)이라 하여 여느 대과에 합격한 사람만큼 영예와 선망을 받았다. 대선에서 중덕(中德), 중덕에서 선사(禪師), 선사에서 대선사로 오르고 종정(宗正)인 판사에 뽑히면 도대선사(都大禪師)라 불렸다. 큰 사찰의 주지는 중덕에서 선임하는데 종문(宗門)에서 추천하면 이조판서가 임명했다. 곧 정부에서 종문을 지배했다.

 

승과에 합격, 사명대사

고려 때부터 있었던 이 승과는 배불정책을 썼던 조선왕조 초까지 계속되었으나 연산군이 사찰을 유흥장으로 만들면서 중단되었다가 중종 2년에 폐과했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승과를 부활하여 서산대사 휴정, 임진왜란 때 대활약하는 사명대사 유정과 같은 고승을 배출했으나 문정왕후가 사망하자 다시 폐과된다.

조선이 견지한 기본 명분인 불교 탄압 정책을 정면으로 거스른 정책이므로 신하들의 반대는 물론이고 성균관 유생들까지 나서 동맹휴학으로 맞섰지만 문정왕후는 뚝심 있게 불교 중흥을 추진했다. 특히 봉은사 주지로 임명된 보우는 그야말로 비난의 대상으로 그를 죽여야한다는 장계만 75건이나 올라올 정도였다. 당시 사관들은 문정왕후의 불교 중흥 정책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이때 세자를 갓 잃자 요승 보우가 복을 기원해야 한다는 말을 떠벌려 불교법회의 하나인 무차대회 베풀기를 청했는데, 문정왕후가 그 말에 혹해 그대로 따랐다. 승려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몇 천 명이나 되는지 모를 정도였으며, 조각 장식의 물건을 극도로 화려 사치하게 해 옛날에도 보지 못하던 정도였다. (중략) 또 배위(拜位)를 마련해 마치 왕이 부처에게 배례하게 하는 것처럼 했으니, 그 흉악함과 패악을 형언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