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세계문화유산(UNESCO)/조선왕릉

조선 왕릉(42) : 제2구역 서삼릉(8)

Que sais 2021. 4. 5.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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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릉

효릉은 제12대 인종(15151545) 및 비 인성왕후(15141577) 박씨 능이다.

인종은 희릉에 안장된 장경왕후의 맏아들로 1515년에 태어났는데 생모 장경왕후가 7일만에 사망하여 문정왕후 윤씨의 손에서 자랐다. 1520년인 여섯 살에 세자로 책봉되었는데 놀라운 것은 3세 때부터 글을 배워 익히고 8살 때 성균관에 입학하여 학문을 익혔다고 한다. 인종은 세자 시절부터 인품이 남달랐다. 언제나 몸가짐에 흐트러짐이 없이 바른 자세로만 앉아 공부에 열중했고, 언동은 때와 장소에 어긋남이 없었다고 한다. 특히 검약하고 욕심이 없어서 일찍이 시녀 가운데 호화로운 옷을 입은 자가 있으면 곧바로 궁궐에서 내보내 궁중 안에서 특별히 엄하게 단속하지 않아도 잘 유지될 수 있었다고 한다.

 

인종의 성품을 알 수 있는 예가 있다. 인종이 동궁에 있을 때 한밤중에 불이 났을 때다. 누군가가 여러 마리의 쥐꼬리에 솜방망이 불을 붙여 동궁으로 들여보내 순식간에 불이 나자 인종은 계모인 문정왕후의 짓임을 직감하고 자신을 길러준 계모의 뜻을 어기는 것도 불효라 생각해 꿈쩍 않고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밖에서 중종이 애타게 부르는 소리를 듣고, 계모에게는 뜻을 따르는 것이 효이지만 아버지에게는 불효가 된다고 생각해 불길을 뛰쳐나왔다는 것이다.

중종과 문정왕후, 인종과 명종은 조선 왕실사의 핵심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문정왕후의 릉이 태릉이므로 태릉에 대해서는 별도로 설명하고 이곳에서는 문정왕후의 비하인드 스토리에 대해 설명한다.

문정왕후는 중국의 측천왕후로도 비견될 정도로 조선왕조 내내 왕비가 조금이라도 정치에 관여하려 하거나, 처신에 문제가 있을 때면 부정적인 의미로 자주 거론되는 인물이다. 그녀가 남존여비가 분명한 조선에서 남성 관료들을 호령했고 조선의 국시이던 억불정책을 무시하고 호불 정책을 견지했으며 왕권강화를 위해 강력한 독재 권력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의 수렴청정 이후 조선왕실에는 몇 차례 왕비들의 수렴청정이 있었지만 문정왕후처럼 철저하게 정권을 장악한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그녀에 대한 평가는 매우 혹독한데 이를 역으로 말하면 그러한 권력 행태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있었다는 것은 탁월한 정치 감각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평가도 있다.

문정왕후는 신하들이 주도한 반정 덕에 왕위를 차지하게 된 중종이 세 번째로 맞은 왕비다. 우여곡절 끝에 국모인 왕비의 자리에 올랐지만 아들을 낳지 못하고 딸만 넷을 줄줄이 낳은 탓에 초기 문정왕후의 삶은 그다지 녹녹하지 못했다. 신하들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왕도 갈아 칠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한 문정왕후는 왕궁 내에서 일어나는 정치의 쓴 맛을 골고루 맛보면서 후일의 토대를 차곡차곡 쌓아나갔다. 그녀에게 날개를 달아준 것은 왕비가 된지 20년이 다 되어 아들 경원대군 즉 명종을 낳은 것이다.

중종의 왕비임에도 후계를 이을 아들이 없으므로 그녀는 20년 동안 세자(인종)의 방패막이로 자임했는데 자신이 아들을 낳자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그동안 보살펴준 세자는 자신의 아들인 경원대군을 위해 반드시 제거되어야 할 정적이었다. 그녀는 세자를 끌어내리고 경원대군에게 다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싸움터에 뛰어 들었지만 이 부분만은 그녀의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중종이 사망하자 그녀가 반드시 제거해야할 대상이었던 인종이 왕위를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문정왕후의 정적들이 권력의 핵이 되었는데 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문정왕후는 장차 경원대군과 자신의 친정가문을 죽이지 말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여 인종을 근심스럽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역전의 기회가 돌아왔다. 원래 인종이 병약하기도 했지만 즉위 9개월 만에 사망하자 중종의 유일한 적자로 남은 문정왕후 소생의 경원대군이 12살 나이에 조선 13대 왕 명종으로 즉위한 것이다. 문정왕후는 명종이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하면서 그녀에 반대하던 대윤파를 을사사화를 통해 일소시켰다.

을사사화는 조선 당쟁사에서 가장 비극적이면서도 조선의 정치사에서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혹평하는데 사가들은 문정왕후에 대해 그야말로 고깝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 윤비가 조선 왕조 사상 어두웠던 중세기에 분탕질을 일삼아 사화와 당쟁을 일으켰고 결국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참극을 초래한 장본인 중 한 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학자들은 단적인 예로 문정왕후를 조선조의 악녀 중 한 명으로 거론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작가 김향은 악녀의 세계사에서 역사적으로 악녀라 불리는 42명을 꼽았는데 이 중에 한국인으로는 조선조 태종 이방원의 왕비인 원경왕후민씨, 중종의 왕비인 문정왕후 윤비, 그리고 고종의 왕비인 명성황후 민비를 꼽았다.

여기에 문종의 세자빈 봉씨, 황진이와 박마리아가 포함되는데 김향은 악녀라는 정의를 다소 다르게 설명했다. 악녀를 사전적인 의미인 성품이 나쁜 여자또는용모가 흉한 여자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맹렬하고 치열한 삶을 산 여자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추구하는 그 목적이 선한 악녀가 있는 반면 그 목적이 악한 말 그대로의 악녀가 있다는 것이다.

시간을 다소 되돌린다. 25년간 세자 교육을 철저히 받은 인종이 30세 되던 해, 중종의 사망으로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뒤로는 업무를 처리하는데 이치에 맞지 않은 것이 없었고, 때때로 신하들이 올린 상소문에 대해 직접 성실하게 글로써 답변을 해, 보는 사람 누구나 탄복했다고 한다.

왕에 오르자마자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폐지되었던 현량과(賢良科)를 부활하고 기묘사화 때의 희생자인 조광조(趙光祖) 등을 신원(伸寃)해 주는 등 어진 정치를 행하려 하였으나, 병약하여 포부를 펴지 못한 채 왕위에 오른지 1년도 안 되는 30세에 사망했다. 그런데 인종의 사망 원인이 매우 흥미롭다.

실록에는 인종이 부왕의 죽음을 너무 슬퍼한 나머지 병을 얻어 사망했다고 적고 있다. 아버지인 중종이 병이 나자, 옆에서 밤낮으로 갓과 띠를 끄르지 않고, 음식 먹는 것도 금하니, 몸이 몹시 수척해졌다고 한다. 몹시 추운 날도 거르지 않고 목욕재계하여, 손수 대궐 뜰에 나가 빌기를 저녁때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계속하곤 했다고 하니, 병이 나지 않으면 이상할 노릇이다.

중종이 사망하자, 머리를 풀고 맨발로 뜰 밑에 엎드려 엿새 동안이나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았고, 다섯 달 동안 계속 곡()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선왕의 장례를 치르느라 몸이 허약해진 인종은 음력 5월의 폭염에 시달려 병석에 눕고 말았으며, 급기야 일어나지 못하고 사망했다. 장동민 박사는 실록의 기록을 볼 때 두 가지가 사망의 원인이라고 설명한다. 하나는 슬픔을 이기지 못해 마음에 병이 들었다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비위가 약하다는 것이다.

인종이 세자 무렵 아버지 중종의 약시중을 들 때부터 시작된 슬픔이 너무 지나쳐 심()과 비()를 상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심은 마음에 병든 것을 얘기하는 것이고, 비는 위장에 병이 든 것을 얘기하는데, 신하들은 덧붙여 인종이 극도로 수척하고 혈색까지 없어서 자칫 목숨을 잃게 되어 상을 마치지 못할 수 있다고까지 경고할 정도였다.

그런데 의학적으로 볼 때 비위가 약하다는 것은 음식을 먹지 않고 굶어서 병이 든 것을 뜻하는데 왕이 굶어서 병이 든다는 것은 사실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신하들이 왕의 건강에 대해 계속 이야기해도 왕이 말을 듣지 않았으니 신하들로서는 그야말로 꼼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상중에 병이 나서 스스로 견디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면 스스로 육물(肉物)을 가져다가 먹어서 목숨을 보전하는데, 이것은 스스로 제 몸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부모가 남겨준 몸은 손상시킬 수 없고 부모의 상을 마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음식 들기를 권할 정도였다. 문제는 병세가 극도로 나빠져 그 이후에는 먹고 싶어도 먹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지나치면 건강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주자가례사례편람(국립고궁박물관)

그런데 문정왕후가 악녀로 지명되는 내용은 여러 가지이지만 인종의 죽음에 문정왕후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주장 때문이다.

조선의 행정 규범은 기본적으로 주자가례에 따라야하는데 이에 따르면 부모가 죽으면 그 인근에서 여막(廬幕)을 짓고 3년을 지내야 했다. 왕도 같은 예를 지내야하지만 일반인과는 달리 궁중 안에 빈전(殯殿)을 차리고 5달 후에 능에 봉안한다. 중국의 천자는 7달이다.

왕은 그 빈소에서 아침 저녁으로 곡을 하고 상식(上食)을 올린다. 왕에게는 국정이 있으므로 여막 생활처럼 빈전 안에서 침식을 하며 나오지 않을 수 없는데 인종은 효성이 지극하여 빈전에서 침식하며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를 계모 문정왕후는 기회로 보고 적극적으로 인종의 죽음을 재촉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종의 건강을 악화시켰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집권세력은 인종의 외삼촌 측인 대윤이 장악하고 있으므로 제대로 진행시킬 수 없었는데 인종이 워낙 빈전에서 아버지를 위한 상례에 집착하느라 그만 이질에 합하여 소위 합병증이 일어났다. 문성왕후는 인종을 위한 일이라며 닭죽을 연일 먹게 했는데 이는 인종의 병에는 상극이라고 지적한다.

결국 인종이 몸 져 누었는데 인종의 왕비인 인성왕후가 왕의 병이 악화되자 다급하게 몸에 있는 칼을 빼어 자신의 왼쪽 무명지를 잘랐다. 그녀의 피를 마신 후 인종이 목숨을 부지했는데 문정왕후는 이를 듣고 인종의 곁에 달라붙어 인종을 살리려는 어떤 노력도 시도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특히 인성왕후가 인종에게 자신의 피를 먹이려하자 문성왕후가 환자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이를 막으려는 와중에 인종이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