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세계문화유산(UNESCO)/조선왕릉

조선 왕릉(33) : 제2구역 서오릉(12)

Que sais 2021. 4. 3.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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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릉

창릉은 제8대 예종(14501469) 및 계비 안순왕후 한씨(1445?1498)의 능이다. 예종은 세조와 정희왕후의 둘째 아들인데 의경세자가 요절하는 바람에 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지만 재위기간은 14개월에 불과하다.

세조는 자신의 병이 위중해지자 예조판서 임원준을 불러 내가 세자에게 전위하려 하니 모든 일을 준비하라고 명했다. 정인지 등이 성상의 병환이 점점 나아가시는데 어찌하여 자리를 내놓으려고 하십니까?” 하자 세조는 운이 다하면 영웅도 마음대로 못하는데 너희가 나의 하고자 하는 뜻을 어기니, 이는 나의 죽음을 재촉하는 것이다라고 한 뒤 내시로 하여금 면복을 가져오게 하여 친히 세자에게 내려주었다. 예종의 나이 18세였다.

 

예종은 즉위 초에 세조의 유명을 받들어 한명회신숙주 등 대신을 원상(院相)으로 삼아, 이들이 서무를 의결하게 하였다. 원상제도는 신하들에 의한 일종의 섭정 제도였다. 세조가 원상으로 지목한 세 명의 신하는 한명회, 신숙주, 구치관 등 측근 세력들이었다. 이들은 승정원에 상시 출근해 모든 국정을 상의·의결했고, 예종은 형식적으로 결재만 했다.

국정 처리는 물론 왕실에 관한 일 중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어머니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예종이 할 수 있었던 일은 부왕의 능(광릉) 조성과 이미 부왕 때부터 추진 중이던 세종의 능을 옮기는 것(영릉천장)이 전부였다고 알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전수조법(職田收租法)을 제정하고 반포하지는 못했지만 경국대전이 완성된 것은 그의 치세에 들어간다. 삼포(三浦)에서 왜와의 사무역을 금지하였고 각 도, 각 읍에 있는 둔전을 일반 농민이 경작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재위기간이 14개월에 불과하여 이 시기는 세조시대에서 성종시대로 넘어가는 과도적인 시대의 성격을 띠는데 잘 알려진 남이 장군의 옥사도 이때 일어났다.

남이장군이 처형된 것은 그야말로 코미디와 같은 사건 때문이다. 남이는 태종의 외손자로 이시애란을 평정하고 서북변의 여진족을 토벌하는 등 혁혁한 무과를 세워 27세에 오위도총부도총관과 공조판서, 병조판서(국방부장관)로 발탁된 그야말로 초고속 승진한 무인이다. 그런데 세조가 사망하고 예종이 즉위하자 강희맹 등 훈구대신들이 그가 병조판서의 직임에 적당하지 못하다고 상소하여 해임되었다. 그런데 그가 왕궁을 호위하는 겸사복장으로 궐 안에서 숙직하고 있던 중 혜성이 나타나자 혜성이 나타남은 묵은 것을 몰아내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징조다라고 근에게 말했는데 이를 유자광이 역모를 꾀한다고 고발하여 결국 남이를 비롯하여 많은 무인들이 처형당한 것이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처형당한 대표적인 사람으로 알려지지만 좌우간 쥐가 듣는 곳일지라도 입조심하라는 경구로 자주 이용되는 불행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예종과 함께 창릉에 유택을 마련하고 있는 안순왕후는 한백륜의 딸로 한명회의 딸이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곧바로 병사했으므로 세자빈으로 간택되었고 예종이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예종이 사망하자 인혜대비, 명의대비에 책봉되었고 연산군 4(1498)에 사망하여 창릉에 안장되었다.

 

창릉은 서오릉에 조성된 최초의 왕릉으로 왕과 왕비의 능을 서로 다른 언덕 위에 따로 만든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형식이다. 그런데 일부 풍수가들은 지리적으로 볼 때 창릉이 청룡이 높고 백호가 낮은 곳으로, 달리 말하면 청룡의 어깨 부분이 푹 꺼져 황천살(黃泉煞)’이라고 부를만큼 매우 꺼림칙한 땅이라고 지적한다고 한다. 황천살이란 죽어나가는 땅으로 속된 표현으로 보면 골로 가는 땅(葬身之地)’이라고 해서 풍수에서는 꺼려하는 곳이다.

조선왕릉은 기본적으로 명당 중 명당에 자리 잡고 있는데 예종의 창릉은 왜 이런 곳에 자리 잡았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는데 김두규 박사는 역풍수를 예로 들었다. 여기서 역풍수(逆風水)’라는 말은 풍수를 통해 후손에게 복을 가져다주게도 하지만, 거꾸로 풍수를 통해 특정 후손의 절손이나 멸망을 가져오게 한다는 것이다. 다소 이해되지 않지만 당대의 실력자들이 예종의 무덤을 좋지 않은 곳에 쓰는 것 자체를 반대하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명당은 중성토양>

풍수지리가 미신이나 잡술의 전형이라 하여 무시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의 견지로 볼 때 이해되지 않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 억지라는 뜻이지만 풍수지리의 원래 뜻은 매우 높은 이상을 갖고 있다.

풍수지리 사상은 원래 중국에서 유래했다고 인정하지만 중국과 한국의 지리적 조건이 전혀 다르므로 중국의 풍수지리는 한국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한국의 풍수지리는 우리 땅을 배경으로 인간의 삶과 죽음을 해석하려는 우리 민족의 독창적인 유산으로 이를 자생풍수설이라고 한다.

고려 태조 왕건은 풍수지리를 국시(國是)로 삼았고 조선의 태조 이성계도 새로운 서울을 한양에 건설할 때 풍수지리에 집착했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통치가 궤도에 오르고 점점 안정을 취해가자 국가적인 일로 풍수지리에 대한 논의는 사라지고 개인의 풍수설인 음택풍수로 중심이 옮겨간다. 음택이란 무덤 자리를 가리킨다.

음택풍수에서 가장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은 발복(發福)이다. 발복이란 명혈에서 주는 운을 말하며, 음복(陰福)이라고도 하는데 명혈에 조상을 모시면 운이 트여서 음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살아 있는 사람은 땅의 생기 위에서 살아가며 그 기운을 얻지만 죽은 자는 땅 속에서 직접 생기를 받아들인다. 죽은 자가 땅으로부터 얻은 생기가 후손에게 그대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으로 이를 동기감응(同氣感應)’ 또는 친자감응(親子感應)’이라고 부르는데 부모와 자식 간에 감응이 생겨 생기의 효과가 자손에게 전해진다는 믿음이다.

이 때문에 수많은 문제점이 생긴다. 명당으로 알려진 타인의 땅에 몰래 산소를 이장하기도하며 선조의 산소 자리가 나쁘다는 지관의 지적에 따라 여러 번 산소를 옮기는 것이 다반사다. 정치를 하거나 기업체를 경영하는 사람들은 더욱 더 명당에 신경을 곤두세워 타인들로부터 지탄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이장을 강행한다.

원래의 풍수지리는 부모의 은혜로움에 아무쪼록 유골만이라도 평안하도록 정성을 다하는 효도 사상의 위선사(爲先事). 자신이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부모, 증조부모 등 선조가 있었기 때문인데 부모가 살아 계실 때는 물질적이나 정신적으로 효도를 다 할 수 있지만 부모가 돌아가신 다음에는 효도를 할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부모의 뼈라도 오래 보존된다면 자신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밀접한 관계가 성립할 수 있다고 믿어 부모의 시신이 오래 보존될 수 있는 곳을 찾았으며 그런 장소를 명당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와 같이 뼈를 오랜 동안 보존하려는 우리의 풍수지리는 이집트의 미라 사상과 일맥 상통하는 점이 있다. 둘 다 죽은 자를 잘 모시고자 한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는데, 이집트의 미라는 사자가 영원한 삶을 누린다고 믿어 영혼이 돌아올 수 있도록 시신을 약품으로 처리하여 시신을 오랜 동안 보존될 수 있도록 했다. 반면에 한국은 이집트와 같이 인공적으로 시신을 처리하는 적극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환생의 목적이 아니라 선조와의 정신적인 접촉, 즉 위선사로서 육신이 남아 있어야 한다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手肢父母)라는 유교 사상에 젖어 있는 조선시대에 시신을 훼손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도 용납될 수 없었으므로 시신이 적어도 5백년에서 1천 년 정도 갈 수 있는 장소를 찾았다.

지관들은 명당자리를 확인하는 방법으로 주로 달걀을 사용한다. 일반적으로 보통 땅에 달걀을 파묻으면 곧바로 썩지만 명당자리에서는 몇 달이 지나도 생생하게 보존된다는 것이다. 한 실험에서 명당의 혈처 지점과 보통의 땅에 달걀을 묻어놓고 76일 만에 꺼내보니 혈처에 묻은 달걀은 전혀 부패하지 않은 채 처음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던 반면 보통의 땅에 묻은 달걀은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해 있었다. 당시 두 땅의 흙을 농업과학기술원에서 분석했는데 두 흙 모두 화강암 잔적층이라는 점은 동일했지만 일반 흙의 PH4.88이었고, 명당의 흙은 6.90이었다. 이것은 일반 흙은 산성이고 명당의 흙은 중성의 성질을 갖고 있음을 뜻한다. 북한에서 단군의 뼈라고 발표한 유골이 5천 년이나 지났음에도 온전할 수 있는 이유로 뼈가 부식되지 않고 잘 보존될 수 있는 전형적인 중성 토양이었기 때문이라고 발표된 것과 일맥상통한다. 명당을 찾는다는 것은 중성의 토양을 찾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지관들의 혹세무민하는 사주에 현혹되지 않을 것이다. 한마디로 명당의 효용도가 동기감응(同氣感應)’ 또는 친자감응(親子感應)’이라면 중성토양 자리를 찾으면 된다는 뜻이지만 한국의 대부분 토양은 산성이다.

원래 예종에게는 21녀가 있었다. 그 가운데 큰 아들인 인성대군은 일찍 죽었고, 제안대군과 현숙공주가 있었다. 제안대군이 왕위 서열상 아버지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야 했으나 4촌인 성종에게 자리를 빼앗겼고, 이혼과 재혼을 거듭하는 등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 못하고 끝내 자손없이 죽었다. 예종의 딸 현숙공주는 병조판서를 지낸 임사홍의 아들 임광재에게 시집을 갔으나 임광재의 문란한 사생활 때문에 당시 조정이 시끄러울 정도였으며 끝내는 별거를 하고 후손없이 죽었으므로 예종의 직계는 그것으로 끝이 났다. 창릉이 선정될 때도 신하들이 위치가 나쁜 것을 알고도 방조한 방증도 있을 정도로 예종의 능이 결정되는 장면을 보면 이상한 점이 나타난다.

 

홍윤성 등이 가서 살펴보고 돌아와서 아뢰기를 이 땅은 의심할만한 것이 없습니다고 하였는데 정인지만이 홀로 뒤에 이르러 아뢰기를, “이 산은 청룡이 높고 백호가 낮으니 그다지 사용에 적합하지는 않으나, 다만 한양에 가까운 점만 취할 뿐입니다고 했다.’

 

정인지는 세종대왕 때 왕의 명으로 집현전에서 풍수학을 직접 연구했으며 여러 왕릉 선정에 관여하는 등 문자 그대로 풍수의 이론과 실무에 능통한 대신이었다. 풍수지리에 밝은 정인지가 분명 왕릉으로 쓸 자리가 아니라고 말했는데도 그의 의견은 채택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당대의 최고 전문가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은 어느 누구도 예종의 능을 명당 자리에 만드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풍수지리에 문외한이라도 현장을 방문하여 이런 지적이 정말로 귀를 기우릴만 한 지 살펴보면 답사의 묘미가 더욱 배가될 것이다.

 

창릉의 석물의 배치는 국조오례의에 따랐는데 상, , 하계가 명확하여 능제의 특성을 확인할 수 있다. 군주국가의 확실한 위계질서를 엿볼 수 있는 형식으로 봉분을 감싸는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봉분 주위로는 난간석이 둘러져 있다. 석상·고석·석양·석호·장명등·문인석·무인석·석마 등의 석물 배치는 일반 왕릉과 같다. 특이하게도 대석주의 주두가 둥근 원수(圓首)와 그 아래 둥근 받침으로 되어 있다. 또한 석상을 받치고 있는 고석은 귀면문이 아니라 문고리를 새겨 넣어 생김새가 진짜 북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 독특하다.

왕비릉의 문인석은 왕릉과는 달리 왼손에 지물을 쥐고 있으며, 투구가 길고 짧은 상모(象毛)가 달렸다. 요대는 좌에서 우로 대각선을 이룬다. 기본적으로 석물들은 풍화작용으로 상태가 양호하지 못하며 양쪽 능침 장명등 지붕 옥개석의 상륜부도 사라졌다. 양쪽 능 아래 중간지점에 정자각과 홍살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