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세계문화유산(UNESCO)/조선왕릉

조선 왕릉(35) : 제2구역 서삼릉(1)

Que sais 2021. 4. 3.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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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삼릉(사적 200)은 상당한 우여곡절을 겪은 후 현재와 같은 능역이 된 것으로 유명하다. 처음으로 조성된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능인 희릉은 원래 3대 태종의 헌릉 옆으로 택지가 결정되었으나 권력다툼으로 인해 이곳으로 옮겨졌고 이후 중종의 정릉(靖陵)이 자리를 잡았다가 강남구 삼성동의 선릉으로 옮겨갔고 그 아들인 인종과 인성왕후 박씨의 효릉이 조성되었다. 이후 철종과 철인왕후의 능인 예릉이 들어서면서 서삼릉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서삼릉에는 의친왕과 의친왕의 모친 덕수 장씨의 묘도 있었으나 1996년 의친왕묘, 2009년엔 의친왕 모친인 덕수 장씨 묘가 서삼릉에서 홍유릉 경역으로 천장하였다. 그러므로 3기의 왕릉 이외에도 3기의 원과 1, 왕자·공주·후궁 등의 묘 46, 태실54기가 자리 잡고 있다. 인조 23(1665) 소현세자가 죽자 소현세자를 이곳에 안장하고 소현묘(昭顯廟)라고 칭하였으나 고종 7(1870) 소경원(昭慶園)으로 개호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에 의해 조선왕실의 태실, 왕자묘, 후궁묘, ·옹주묘가 현재의 위치로 집결되었으며, 해방 이후에 명종 후궁 경빈 이씨의 묘 외 6기의 묘를 옮겨왔다. 1944년에는 정조의 맏아들 문효세자의 묘인 효창원(孝昌園), 1949년에는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맏아들 의소세손의 묘 의령원(懿寧園)이 이곳으로 옮겨왔으며, 1969년에는 성종 폐비 윤씨의 회묘(懷墓)가 서삼릉으로 옮겨왔다.

서삼릉으로 가는 길에 은사시나무는 남다른 풍취를 보여준다. 서삼릉을 답사할 때 명심할 것은 효릉과 예릉희릉의 구역이 서로 다른데다 영역이 넓으므로 남달리 많은 다리품을 팔아야 한다는 것이다.

 

희릉

희릉은 제11대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14911515)의 릉이다. 장경왕후의 본관은 파평이며 파원부원군(坡原府院君) 윤여필(尹汝弼)의 딸이다. 1506년 중종반정 때 중종의 후궁 숙의에 봉해졌다가 단경왕후 신씨의 아버지가 역적으로 몰려 사사되고 역적의 딸인 단경왕후도 폐비되자 왕비로 책봉된 행운의 주인공이다.

1515년에 세자인 인종(仁宗)을 낳은 후 산후병으로 7일만에 경복궁 별전에서 사망했다. 장경왕후가 죽자 왕은 국상을 당해도 흰 상복을 입지 않는데 중종은 특별히 흰 상복을 입고 애통해하였으며 장경왕후릉 옆에 자신의 수릉지를 정하고 쌍릉으로 조성될것을 원했다.

 

그러나 그녀가 제대로 왕실의 삶을 누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므로 그녀가 궁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녀에 대한 기록이나 일화는 별로 전해지는 것이 없다. 다만, 실록과 지문(誌文)을 통해서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볼 수 있다. 중종실록I중종 10(1515) 226일자에 좌의정 정광필이 백관을 거느리고 근정전 뜰에서 왕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에 그 달이 차서 거룩한 모습이 탄생하시니, 하늘의 복록을 받은 것이며 국가의 큰 경사입니다. 주상전하께서 성신문무(聖神文武)하시니, 천년의 좋은 운수 받아 큰 이름 무궁토록 밝히소서. 한번 구하여 아들을 얻으시니 아름다운 후사 결함 없이 세웠습니다. 진숙(震夙)의 날을 당하여 다시 태운(泰運)이 오는 시기를 맞이하였습니다. 신 등이 외람되게 용렬한 자질로 요행히도 성대(聖代)를 만나, 본지백세(本支百世)의 주아(周雅) 시를 화답하려 하옵고, 수복구주(壽福九疇)했던 화봉(華封)의 축원이 간절합니다.’

 

진숙(震夙)의 진()은 임신을 의미하고, ()은 엄숙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진숙의 날은 아들을 낳는 어머니가 산월을 당하여 측실(側室)에 거처할 때를 말한다. 본지백세(本支百世)란 종실이 영원하라는 뜻이 담겨있고 화봉의 축원은 많은 복을 받으라는 뜻이다. 이어서 다음과 같은 사문(赦文)을 반포했다

 

왕은 말하노라. 조종(祖宗)의 기업(基業)을 계승함에는 반드시 제사 주관함을 중히 여기고, 본지(本支)를 번성하게 하는 경사에는 아들 얻음보다 큼이 없다. 보잘것없는 나 후손 외람되게 대위(大位)를 지킨 지 10년이나 되었는데, 웅몽(熊夢)의 상서를 얻지 못하고 연익(燕翼)의 부탁이 없었다. 사속(嗣續)의 중함을 생각하고 항상 근심하여 마음 편하지 못하였는데, 금년 225일에 정비 윤씨가 원자(元子)를 낳았으니, 아래로 신민의 바람에 관계될 뿐 아니라 실지로는 종사의 아름다움에 관한 것이니, 어찌 나 한 사람의 경사가 될 뿐이랴! 너희들 만백성과 더불어 즐거움을 함께 하여야 하겠다. , 만대의 계획을 굳건히 함이 지금으로부터 시작되니, 사방의 때 묻은 것을 깨끗이 씻고 다 함께 유신에 참여할지어다.‘

 

장경왕후가 원자(인종)를 낳았을 때 정광필이 진하(進賀)한 내용이다. 오랫동안 후사가 없었던 왕실에 큰 웃음꽃이 피었음을 알 수가 있지만 세자인 인종을 낳은 후 산후병으로 일주일만에 사망했다.

그러나 장경왕후가 실제로 잘 알려진 것은 2003년 한국 TV드라마 사상 시청율 57.8%로 역대 10위에 올라있는 MBC-TV의 대하 사극 대장금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장금은 한류의 원조라 할 정도로 세계적으로 화제를 일으킨 작품인데 TV 시청율이 50%를 넘는다니 말이 되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한국 역사상 최고의 시청율은 1996년도 방영된 KBS-TV첫사랑인데 무려 시청율이 65.8%. 2위는 1991년 방영된 MBC-TV사랑이 뭐길래그리고 3위는 SBC-TV모래시계64.5%. 시청율이 60%를 넘는다니 이해가 안 된다고 이야기하겠지만 2000년대 이전은 핸드폰도 제대로 없던 시절임을 이해하기 바란다.

 

<한류의 원조 대장금>

국내 사극에서는 인수대비, 장희빈 등에게 크게 밀리는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이지만 조연급으로는 누구보다 앞서있는 왕비이기도하다.

그녀의 이력은 화려하다. 중종반정을 주도하여 연산군을 끌어낸 박원종에게는 세 명의 누이가 있었는데 각각 성종의 친형인 월산대군,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 그리고 한 명은 윤여필에게 시집갔다. 윤여필의 딸이 바로 장경왕후 윤씨다.

장경왕후는 8세 때 어머니를 잃고 이모 월산대군 부인의 손에 길러졌는데 어려서부터 경전과 역사에 통달하여 스스로 처신을 다스릴 만큼 비범했다고 한다. 1506년 단경왕후가 궁궐에서 쫓겨난 다음날 처녀 간택령이 내려지자 그녀는 16세 나이로 입궁한다. 처음에는 후궁인 종2품 숙의에 봉해졌다가 이듬해 왕비가 되었다. 반정 주역인 외숙부 박원종의 덕도 있었겠지만 중종이 그녀에 호감을 가졌음은 물론이다. 중종실록에 그녀를 왕비에 봉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어진 덕이 윤씨만한 이가 없으니, (왕비에) 책봉하는 예를 거행하라.’

 

실록은 장경왕후의 사람됨을 어질다고 묘사한다. 왕비는 대비 정현왕후에게 효도하고 남편 중종을 현명하게 내조하는 것은 물론 후궁들에 대해 투기하지 않았고 그 자식들까지 사랑으로 양육했다고 한다. 또 아랫사람인 궁녀와 하인들에게도 예의로 대하고 은혜를 베풀어 높은 자리에 있다고 해서 교만하거나 함부로 하는 법이 없었다. 더구나 그녀는 중전의 자리를 잘 알고 외척을 경계했다.

 

소첩은 사사로운 혈육을 위하여 청을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어진 사람이라면 공론에 따라 쓰면 되고, 어리석다면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실제로 장경왕후는 친정 윤씨 일가를 근신하게 하고 그들에게 벼슬을 주거나 죄를 묻는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왕비가 된 지 9년이나 됐음에도 불구하고 중종에게 단 한 번도 누군가의 벼슬을 청탁하거나 죄를 벗겨달라고 청한 일이 없으므로 중종도 감탄하며 왕비가 무던하고 지조가 높고, 태사의 덕이 이보다 더할 수는 없다며 끔찍이 대했다고 한다.

왕비가 이렇게 처신하니 궁궐에 이간질하는 사람이 없었고 조정에서도 왕과 신하의 칭송이 가득했지만 문제는 장경왕후의 건강이다. 그녀는 그토록 고대하던 원자를 낳았지만 치명적인 산후병이 찾아왔고 내의원에서 모든 노력을 경주했지만 일주일 후 사망했다.

 

당대에 산후병으로 산모가 사망하는 것은 다반사였지만 그녀가 사망할 때 한국의 걸출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바로 대장금의 주인공인 장금이다.

의녀로 조선왕조실록에도 등장하는 특이한 인물인데 당시 장금은 원자의 출산을 돕고 왕비를 마지막까지 돌봤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경왕후가 사망했다는 것이다. 당대의 관례로 볼 때 내의원과 의녀들의 처벌이 관례나 마찬가지인데 이때 장금을 편들고 나선 사람이 놀랍게도 중종이다. 중종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대저 사람의 사생이 어찌 의약(醫藥)에 관계되겠는가? 그러나 대왕전에 약을 드려 실수한 자는 논핵하여 서리(書吏)에 속하게 함은 원래 전례가 있었다. 왕후에게도 또한 이런 예가 있었는지 모르겠으니, 전례를 상고하여 아뢰라. 또 의녀(醫女) 장금(長今)은 호산(護産)하여 공이 있었으니 당연히 큰 상을 받아야 할 것인데, 마침내는 왕비의 죽음으로 인해 아직 드러나게 상을 받지 못하였다. 상은 베풀지 못한다 하더라도 또한 형장을 가할 수는 없으므로 명하여 장형(杖刑)을 재물로 대신하게 함이 옳다. 이것은 앞뒤 사정을 모두 참작하여 죄를 정하는 뜻이다.’

 

왕의 특별 배려를 받은 장금은 중종 39(1544) 중종이 죽는 순간까지 함께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