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세계문화유산(UNESCO)/조선왕릉

조선 왕릉(32) : 제2구역 서오릉(11)

Que sais 2021. 4. 2.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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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보는 윤비와 광해군 변화>

과학은 폐비 윤씨가 일반인들이 생각하기 어려운 행동에 도전했다. 윤씨의 행동이 엄격하기 짝이 없는 조선 왕실에서 일어난 일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점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폐비 윤씨가 출산 후 급격하게 성격이 변한 원인을 산후 우울증으로 추정했다. 경계선 성격장애로 설명하기도 한다. 감정 기복이 심하면서도 충동적인 성격에 식사 도중 화를 참지 못해 상을 엎었다는 등 분노 조절에 문제를 보이는 것은 물론 후궁들에게 협박하고 성종의 처소에 무단침입을 하거나궁녀들에게 전하를 모시면 죽을 줄 알아라라는 협박을 하는 등 성종에게 심한 집착을 보이는데, 이런 것은 경계선 성격장애 환자들이 보이는 대표적인 모습들이라는 설명이다.

경계선 성격장애는 청소년기와 성년기 초기 때 잘 나타나며, 폐비 윤씨가 이러한 성향이 된 나이도 20살 때부터다.

그러므로 일부 의학자들은 경계성 성격장애였다면 폐비 윤씨가 비상을 들고 다닌 이유는 성종이나 성종의 총애를 받는 후궁을 독살하려 한 게 아니라 자신이 먹고 자살하거나 자살 시늉을 하려 한 것일 가능성도 높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성종에게 내뱉은 폭언의 수위가 높은 것 등은 물론 여하튼 왕궁에 독약을 가지고 온다는 것 자체가 중죄라는 시각은 상존한다.

성종이 인수대비의 가짜 보고에 발끈하여 사사시켰다고 하지만 학자들은 정황은 어떻든 윤씨의 사사는 예견된 일이라고 설명한다. 당시 조선의 예를 볼 때 왕실을 내치려면 절차가 있었다. 단종의 예를 보면 작위추탈 - 폐서인 - 사사다. 각 단계별로 대체로 짧게는 1, 길게는 3년 가량 유예기간을 두었다

한마디로 폐비 윤씨는 폐서인되어 사가로 내쫓긴 그 순간부터, 본인이 아무리 뉘우치더라도 살아날 가능성은 0% 즉 제로에 가깝다는 것이다. 숙종 때 인현왕후의 예가 있지만 이는 그야말로 특이한 경우다.

실제로 인조가 며느리 민회빈 강씨를 후원에 감금한 뒤 죽이려고 할 때 신하들이 극구 말리자 인조가 윤씨에 대한 사건을 지적한다.

 

성종 때에 연산의 어미가 폐출된 후 딱히 도리에 어긋나는 행실을 한 것도 없었지만 그 당시의 신하들은 후환을 걱정해서 죽이라고 청했다. 나라 걱정하는 신하란 이래야지. 왜 그렇게 시아비 죽이려는 패악한 여자를 감싸고 도는가? 추후에 강씨의 자식들이 연산군처럼 해코지할까봐 겁나는가?’

 

여하튼 성종의 윤씨 폐위와 사사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성종은 윤씨를 사사한 후 참회하는 모습을 보이는 쇼도 연출한다.

우선 장례 때 군관을 보내 장례를 도왔다. 7년 후 폐비 윤씨의 무덤을 윤씨지묘라 부르며 해당 고을 수령에게 '절기마다 제사를 올리고, 제사에 쓰이는 용품은 왕비의 예에 준하게 마련하도록 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아마도 아들인 연산군의 정통성 문제 때문에 배려한 것으로 추정하는데 실제로 연산군이 내시를 보내 묘의 상태를 알아보았더니 엉망진창이었다고 한다.

 

인수대비가 사망하자 연산군은 왕실의 장례에 대해 자문했다.

할머니의 제사를 왕이나 왕비의 격식이 아닌 그보다 한 단계 아래인 왕세자 왕세자빈의 격식에 합당하지 않느냐이다. 연산군은 그 이유로 덕종 즉 인수대비 남편의 장례가 왕세자의 장례로 치러졌다는 것이다. 결론은 이 법도에 관한 문제로 계속 논란만 벌일수는 없으므로 인수대왕대비의 장례는 안순왕후와 같은 상제에 의한 왕후(王后)의 격식으로 치러졌다.

 

<연산군묘>

어머니 윤씨의 사사사건을 목격한 후 연산군이 조선왕조에서 유별난 폭군으로 변해갔고, 방탕한 생활로 국정을 파멸로 몰아가 결국 1506중종반정으로 왕위를 빼앗긴다.

연산군은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되었다가 2개월 후 31세의 나이로 사사되었고 그곳에 매장되었다. 그러나 중종 7(1512) 12월 부인 신씨가 상소하여 묘를 강화에서 능성구씨(綾城具氏)의 선영(先塋)이며 연산군의 사위와 딸의 무덤이 있는 양주군 해등면 원당리 현재의 도봉구 방학동(사적 362)으로 이장하기를 청하여, 이듬해 왕자군(王子君)의 예()로 이장하여 현재에 이른다. 서울 경전철 우이신설선 북한산우이역에서 1.3km정도 떨어져 있다.

폐비 신씨는 1488 왕세자인 연산군과 혼인하여 왕세자빈이 되었고, 1494년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왕비가 되었다. 연산군이 폐출당하면서 그녀도 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으로 강등되었고, 1537년에 사망하자 연산군묘 옆에 안장되었다.

역대 왕과는 달리, 재위 도중 반정으로 폐위된 후 '()'으로 강등됨에 따라 묘소 명칭을 '()'이 아닌 '()'로 지정되었다. 따라서 대군의 예우로 묘를 조성하였기 때문에 통상적인 능침의 형태보다 소략한 것이 특징이다. 봉분과 담장, 묘비 각 1, 혼유석과 망주석 각 1, 장명등 1, 향로석 1, 재실은 갖추어져 있으나, 능에 세우는 석호, 석양, 석마, 사초지, 문인석 등은 없다. 연산군의 묘비 앞면에 '연산군지묘(燕山君之墓)'라 새겨져 있으며 묘역 앞에 크고 아름다운 은행나무 있는데 이 나무는 수령이 600년이 넘었다고 알려진다.

연산군묘 묘역에는 연산군묘와 폐비 신씨의 묘 외에도 총 세 기의 묘가 더 자리잡고 있는데, 가운데 줄에 있는 묘는 태종의 후궁인 의정궁주 조씨의 묘이며, 맨 앞 줄에서 왼쪽의 묘는 연산군의 사위인 능양위 구문경, 그리고 맨 앞 줄의 오른쪽의 묘는 구문경의 부인이자 연산군의 딸 휘신공주의 묘다.

광해군과 마찬가지로 연산군 묘 즉 왕릉이 아니므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지도 못하는 불운을 맛본다. 또한 폐비 윤씨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 경내에 있는 회묘(懷墓). 회묘는 원래 서울 동대문 회기동에 있었으나 1969년 경희대학교 공사 때 서삼릉으로 옮겼다.

 

<간소한 동원이강 경릉>

경릉에 덕종과 함께 매장된 인수대비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만 막상 덕종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첫째 아들로 세종 20(1438)에 경복궁 금중에서 태어나 세종 27(1445)에 도원군(桃源君)으로 봉해졌다. 세조 1(1455)에 세조가 즉위하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어려서부터 예절이 바르고 글 읽기를 즐겼으며 서예에도 능했으나 병세가 악화되자 승려들이 경회루에서 재를 올리고 병의 치유를 빌었으며 이 때 신숙주, 한명회 등도 함께 참여했다고 한다. 그러나 병세가 회복되지 않아 세조 3(1457) 경복궁 정실에서 20세로 세상을 떠났다.

덕종의 죽음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세조가 영월에 유배된 단종에게 사약을 내리기로 마음먹고 잠이 든 날 밤, 그의 꿈에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나타났다. 그녀는 분노한 얼굴로 나타나 세조를 꾸짖었다.

 

너는 흉악하고 표독스럽게도 내 아들의 왕위를 빼앗고,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벽지로 내쫓더니 이제는 목숨까지 끊으려고 하는구나! 무슨 원한으로 이러는 것이냐? 네가 나의 아들을 죽이니, 나 역시 네 자식을 살려두지 않겠다.’

 

이후 꿈에서 깬 세조는 다시 잠들지 못하는데 동궁전의 내시가 급히 달려와 세자가 위독하다는 말을 전했다. 세조가 급히 동궁으로 달려갔지만, 덕종은 이미 세상을 뜬 후였다고 한다.

현덕왕후의 저주 때문에 세자가 죽었다고 생각한 세조는 단종 복위 사건을 빌미로 현덕왕후를 폐위한 뒤 능을 파헤쳐 바닷가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세조는 일찍 죽은 아들에게 의경세자라는 시호와 의묘(懿墓)라는 묘호를 내리고, 현재의 자리에 장례를 치루었다. 이후 1469년에 둘째 아들인 자산군(성종)이 예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성종 1(1470)에 의경왕으로 추존되고 능호를 경릉(敬陵)이라 하였다.

경릉은 동원이강(東原異岡)의 형식으로 조영되었으며 조선왕릉 중 봉분의 지름이 가장 크다. 권점수 문화재청 조선왕릉서부지구관리소장은 경릉이 동원이강의 능제를 따르고 있지만 일반적인 배치 예와 다르다고 설명했다. 능침의 배치는 왕이 우측에, 왕비가 좌측에 모셔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경릉은 왼편에 왕릉이, 오른편에 왕비릉이 있다.

왕비가 왕보다 더 높은 자리인 좌상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조선 왕릉으로는 유일하게 여성상위의 능으로 인수대비의 위상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보여준다.

봉분에 병풍석은 물론 난간석, 망주석, 석수, 무인석도 없어 매우 간소하다. 단지 귀면이 조각되어 있지 않은 고석이 받치고 있는 석상과 그 앞의 팔각 장명등, 시립하고 있는 문인석만 양쪽에 있다. 이는 당초에 경릉이 대군묘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석물이 간소하게 설치된 것으로 이후 추존 왕릉으로 조성되는 능의 표본이 된다.

 

문인석의 머리 부분은 전체의 3분의 1을 차지할 만큼 크고, 신장이 매우 커서 당당해 보이는 점이 특징이다. 전면의 관대에는 문양이 없고 뒷면 관대도 4각 외형만 5개 있다. 요대 역시 문양 없이 좌에서 우로 사선형을 이룬다. 덕종 능침의 팔각 장명등은 조선 초기의 형태로 규모가 크고, 장명등 옥개석 아래의 처마 밑 처리가 한옥의 다포 양식으로 돼 있어 당시의 처마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반면 소혜왕후의 능은 추존왕 덕종과는 달리 생전에 왕비로 책봉되었기 때문에 왕릉 형식을 갖추고 있다. 12칸의 난간석을 비롯하여 다른 왕릉과 같이 모든 석물들이 갖춰져 있다. 석양과 석호 등의 동물상도 각각 2쌍이 있으며, 문석인과 무석인까지 모두 갖추고 있다. , 문석인과 무석인은 마모가 심하다. 무인석은 체구에 비해 손이 크고 우람하며 흉갑의 문양도 잘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거칠게 조각되어 이를 제작한 장인들이 신경을 쓰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데 연산군이 서둘러 조영토록 재촉했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이와 같은 차이는 법도가 엄격한 조선 시대에 덕종은 세자로 사망했고 소혜왕후는 덕종의 추존에 따라 왕비에 책봉된 후 사망했기 때문이다. 왕릉의 규범에 따라 추존왕 덕종의 능침에도 의물을 가설하고자 하였으나, 당시 대왕대비였던 소혜왕후 즉 인수대비가 석물을 가설치 말라 하여 그 모습 그대로 남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참고문헌 :

폐비-윤씨가-쫓겨난-진짜-이유는-부제-폐비는-인수대비-때문에-쫓겨난-것이-아니다, 파란토마토블러그, 2008.03.24.

[죄와 벌의 사회사] 임금이 내려주는 약, 사약, 심재우, 한국역사연구회, 2009.09.12

[을 만나다·16]서오릉-경릉(추존 덕종·소혜왕후), 염상균, 경인일보, 2010.01.14.

왕실 피바람 지켜본 인수대비 우비좌왕의 특이한 형태, 이창환, 주간동아, 2010.05.24

인수대비, 정성화, 네이버캐스트, 2011.112.19

인수대비, 위키백과

사약, 나무위키

폐비윤씨, 나무위키

사약,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www.lgsl.kr/list/cur/HODA2008010090

http://royaltombs.cha.go.kr/tombs/selectTombInfoList.do?tombseq=142&mn=RT_01_10_01

李圭泰 코너, 이규태, 조선일보사, 1985

왕릉, 이상용, 한국문원, 1997

조선왕릉 답사수첩, 문화재청, 미술문화, 2006

역사로 여는 과학문화유산 답사기, 이종호, 북카라반,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