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세계문화유산(UNESCO)/조선왕릉

조선 왕릉(31) : 제2구역 서오릉(10)

Que sais 2021. 4. 2.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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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약으로 효과>

학자들은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약을 제조했다고 추정한다.

사실 한약재만으로 사람을 죽이는 독극물을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비상이나 수은처럼 확실한 즉효성 독약이 있는 반면 부자, 초오, 천오두, 천남성 등도 즉효에 가까운 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행인, 마황, 반하, 파두 등도 후보자다. 일부 학자들은 구하기 힘든 것을 사용하기보다는 비상이나 초오를 사약의 재료로 응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런데 가장 큰 의문은 정말로 급사하느냐인데 자료에 의하면 천차만별이다.

상당한 량을 복용하고도 사망에 이르지 않는 사례들이 한둘이 아니다. 이를 보면 바로 즉사하게 만드는 극약계열보다는 서서히 죽게 만드는 형태의 약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신체를 참하는 극형은 아니더라도 사약을 마신 사람은 고열과 작열감, 구토와 어지러움 등 상당히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다가 죽었다고 생각한다.

 

송시열(국보 239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대표적으로 조광조는 사약을 몇 사발이나 마셨는데도 죽지 않았고송시열의 경우 사약을 먹고도 죽지 않아 입에 상처를 내고 거기에 사약을 넣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송시열은 사약을 두 사발을 먹고도 끄떡않자 서인의 거두이자 당대 정국의 중심인 송시열을 금부도사가 차마 목을 매서 죽일 수는 없었으므로 제발 죽어달라고 애원하여 송시열이 입에 상처를 내고 사약 3사발을 연속으로 마시고 나서야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사약에 대해 잘 알려진 이야기는 중종~명종 때의 문신 임형수. 그는 강단있는 선비인데 윤원형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을사사화 때 사사되었다. 그런데 유분록에 의하면 큰 사발에 을 가득 탄 사약을 16사발을 먹고도 죽지 않았고 2사발을 더 마셨음에도 죽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목을 졸라 죽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사극에서 사약을 먹자마자 피를 토하며 죽는 것은 화면 효과를 내기 위한 연출로 설명한다. 대체로 공식적인 행사장에서 사약을 먹은 다음 사약의 효과를 빠르게 하기 위해 군불을 지핀 방에 들어가 약 기운이 서서히 돌다가 고통스럽게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다. 때때로 그 시간이 한두 시간이 아니라 한나절도 갔다는데 그런데도 죽지 않으면 교수형으로 대체했다고 알려진다.

야사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폐비 윤씨가 사약을 받을 때의 정황이다.

연산군이 폐비 윤씨가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두면서 토했다는 피 묻은 적삼을 움켜쥐고 갑자사화를 일으켰다고 알려진다. 그러나 사약을 먹고 피를 토하며 숨을 거둔다는 것은 증명되지 않았다.

이에는 의학자들이 간단하게 설명한다. 체내에서 출혈이 발생하려면 혈관벽을 파괴하는 강력한 출혈성 독이 필요하다. 이런 독은 자연계에서는 들이 합성할 수 있지만 한약재를 넣어 생약들을 달이는 것만으로는 쉽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각혈은 사사형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인 신체 보전과 완전히 동떨어진 내용이므로 실제와는 거리가 멀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사극에서 화면효과를 위해 피를 토하는 것조차 반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감독의 권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약 집행은 그야말로 잘 짜여진 각본에 의해 진행된다.

사약 집행 방법은 광해군 즉위년(1608) 의금부의 보고에 나와 있다. 즉 왕명을 집행하기 위해 사약을 가지고 파견되는 관리는 의금부의 낭청(郎廳), 대개 도사(都事)가 맡았다. 인조반정 이후 강화에 유배된 강화군의 폐세자(廢世子)에게 사약을 내릴 때 의금부 도사 이유형(李惟馨)이 파견된 것이 그 한 예다.

 

사약받기(김윤보그림)

왕명을 받은 도사는 죄인이 있는 곳에 직접 찾아갔는데 사약을 내리기에 앞서 먼저 죄인에게 왕명(王命)을 알렸다. 이 때 도사는 의녀(醫女)를 대동하였으며, 약물은 왕실의 의료기관인 전의감(典醫監)에서 준비했다. 사약을 받을 죄수가 한양에 있는 경우 의금부 도사 대신에 승정원 승지가 직접 파견되기도 하였는데, 성종 때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전한 인물은 형방승지 이세좌(李世佐)였다.

죄인은 사약이 든 그릇을 상 위에 정중하게 놓고 우선 사약을 먹기 전에 왕을 향해 무조건 4 절을 해야 한다. 이는 왕이 죄인에게 예의를 갖추어 죽음을 하사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 중 이세좌는 운이 아주 나쁜 경우다. 연산군이 윤씨의 폐비와 사사에 관련된 인물들을 제거할 때 갑자사화를 일으켰는데, 윤씨에 사약을 전한 죄로 이세좌는 사약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사약을 받지 않고 자진하여 목매어 죽었다.

그런데 사약을 먹고 쉽사리 죽지 않을 경우가 많으므로 당시 집행관은 사약을 넉넉히 챙겨갔다. 물론 준비해둔 모든 사약을 먹은 후에도 안 죽는다고 살려주는 것은 아니다. 그럴 경우에 대비하여 차선책으로 스스로 목을 매고 죽으라고 끈을 주거나 금부도사의 명령에 나졸이 갖고 있는 의 시위를 풀어서 목을 매서 죽이는 경우도 있었다. 단종의 죽음이 그러하다.

다소 이해되지 않지만 지체 높은 사람의 경우 사약으로 죽지 않으면 다음 사약이 당도할 때까지 목숨이 연장되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대부분 본인이 알아서 스스로 목 매달아 죽었다. 사람에 따라 순순히 사약을 먹으려고 하지 않을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 죄인을 움직이지 못하게 한 후 억지로 입을 벌려서 강제로 먹인다. 금부도사 휘하에 힘쓰는 군졸들이 동행하는 이유다.

조선 후기에 붕당(朋黨) 간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약이 내려졌지만 정조 이후로는 차츰 줄어들었다. 조선시대 사약은 왕의 배려가 담긴 명예롭게 죽을 수 있는 방편 중 하나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결국 목숨을 빼앗는 일인 한 권력에 의해 집행되는 사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특히 적지 않은 인물들이 때론 억울하게, 때론 불행하게 사약과 함께 사라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제도 중 하나였음은 분명하다.

 

<연산군의 발명품 흥청망청>

연산군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나오는 말이 흥청망청이다.

사치향락에 휩쓸리는 일을 두고 '흥청거린다'든지, '흥청망청한다'든지 하는 표현을 쓰는데 이 말은 연산군의 발명품이라고도 볼 수 있다.

연산군은 전국의 기생 가운데서 미모가 출중한 일등급 기생만을 엄선하여 대궐 내에 출입시켰는데, 이들을 일컬어 흥청(興淸)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흥청(興淸)이란 용어는 연산군이 궐내에 출입시킨 일등급 기녀로 볼 수 있지만 언어 자체로 보면 '맑음을 일으킨다'는 뜻으로 매우 좋은 뜻을 갖고 있다. 연산군일기에 보면 흥청의 뜻은 '나쁜 기운을 씻어 없애다는 의미(所謂興淸 乃蕩滌邪穢之意也)'라고 적혀있다. 기생들과 어울려 노는 것 자체가 마음 속에 쌓인 나쁜 기운을 씻어낼 수 있는 좋은 제도라는 뜻이다.

연산군은 조선 팔도에 채홍사(採紅使)를 파견하여 각 지방의 아름다운 처녀를 뽑고 각 고을에서 기생들을 관리하게 하였다. 기생의 명칭을 운평(運平)’이라고 하였는데 운평이 대궐로 들어오면 흥청(興靑)’이 된다. 임금을 가까이서 모실 수 있는 기생에겐 특별히 지과흥청(地科興淸)이란 명칭을 붙여 주었고, 임금의 각별한 사랑을 받아 잠자리까지도 같이 한 기생에게는 천과흥청(天科興淸)이란 최고의 명칭이 주어졌다.

 

연산군의 발명품인 흥청의 부작용이 뒤따르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천과흥청으로 지정된 딸을 둔 집안은 대단한 특권이 주어졌는데 잡역이 면제되는 것은 물론 벼슬길에도 오를 수 있었다. 천과흥청이라고 쓴 명패를 평소에 눈독을 들여놓은 집에 붙여 놓으면 그 집은 흥청집이 될 정도였다니 얼마나 폐해가 심했는지 알 수 있다.

연산군이 벌린 소위 퇴폐 파티는 잘 알려져 있다.

자신이 말이 되어 흥청들을 태우고 기어 다니기까지 했고, 반대로 자기가 흥청이 등에 올라 타 말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민간의 유부녀도 예쁘다는 말만 들으면 불러 들였고 심지어 큰아버지인 월산대군의 부인까지 손을 댔다고 알려진다. 그 결과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왕좌에서 쫓겨나자 흥청들과 놀아나다 망했다하여 흥청망청이란 말이 생겨난 것이다. 연산군의 발명품인 흥청망청이란 말은 재산이나 권세가 있어서 금품 따위를 함부로 쓰는 것을 이르는 말이 되었는데 아무리 큰 권세나 재산도 흥청망청 쓰다가는 반드시 망한다는 뜻도 숨겨져 있다.

연산군에 의해 발명된 흥청 제도에 따라 수많은 흥청이 등장하는데 속설에는 흥청의 숫자가 만 명이 넘는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한 한 연산군은 다소 억울한 점이 있다.

주례에 보면 한없이 늘어나는 후궁의 숫자를 제한하기 위해 그 인원을 법으로 정했다. 1, 3, 9, 부인(夫人) 21, 세부(世婦) 27, 여어(女御) 81명 도합 142명이었다. 이 법도 태평성대에만 지켜졌을 뿐 전한의 원제(元帝)는 후궁이 2천 명이었고 당의 현종은 겉으로는 122명으로 자제했다지만 실은 양귀비를 비롯하여 4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연산군에게 방탕을 자제할 것을 잇따라 상주하자 연산군은 주례를 인용하여 142명에도 이르지 못하는데 왜 야단들이냐고 호통을 쳤다.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흥청의 숫자가 만 명이 넘는다는 말은 과장이고 적어도 142명은 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이 문제에 관한 한 연산군은 중국 황제에 비하면 도덕군자라고 이규태는 적었다. 물론 연산군이 중국의 황제급이라는 것은 아니다.

참고적으로 중국 진나라부터 청나라 말기까지 중국 역대 황제들의 평균 수명은 40살도 채 못되는 39.2세다. 그 이유로 10대 전반부터 성생활을 시작 육림(肉林) 속에 탐닉했고 또 음약(淫藥)을 상복하여 비독(砒毒)이 축적되었다는 것을 거론했다. 조선왕조에 국한해서 본다면 조선왕의 평균수명은 43.4세로 중국 황제보다 4.2세를 장수하고 있다. 중국과 한국 임금님의 평균수명을 호색에만 끌어들일 수는 없지만 여하튼 조선 왕은 중국 황제보다 훨씬 금욕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