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세계문화유산(UNESCO)/경주역사유적지구

경주역사유적지구(34) : 황룡사지구(4)

Que sais 2021. 1. 7. 11:37
728x90

www.podbbang.com/ch/1778869?e=23939202

 

경주 역사유적지구 답사 34 : 황룡사지구(4)

논문 형태의 에피소드 과학으로 본 불가사의 http://www.podbbang.com/ch/1778472 넛지, 4차 산업혁명 http://www.podbbang.com/ch/1778471 노벨상을 놓친 비운의 천재들 http://www.podbbang.com/ch/1778470 노벨상이 만든 세

www.podbbang.com

<황룡사 9층 목탑>

황룡사는 호국사찰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국가적인 법회가 자주 열렸고 자장이나 원광과 같은 스님들이 이곳에서 강의를 했다. 실제로 신라에서 거국적으로 황룡사탑을 지은 공은 인정받아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통일했다는 설명도 있다. 황룡사에는 솔거가 그린 벽화가 있었다. 벽화 속의 노송이 실물과 꼭같이 그려져서 자주 새들이 앉으려다 미끄러졌으나 황룡사의 스님이 새로 색칠을 한 이후로 새들이 다시는 오지 않았다고 한다.

황룡사에는 금동장륙상이라 불리는 불상을 모신 대좌가 있는데 높이가 4.5미터에서 5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불상이 있었다고 알려진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인도의 아쇼카 왕이 쇠와 금으로 불상을 만들려다 실패한 뒤 최후로 배에 구리 57,000, 황금 40,000푼과 삼존상의 모양을 그린 그림을 실어 바다에 띄어 보내면서 인연 있는 곳에서 조성되기를 빌었더니 이 배가 신라에 닿았다. 이들 재료로 진흥왕 35(574) 불상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은 이 불상의 기원을 불교의 고향인 인도와 연결시키려는 의도로 추측한다. 여하튼 신라에서 거국적으로 황룡사탑을 지은 공은 인정받았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황룡사탑을 건설된 지 20여년이 지나 곧바로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통일했기 때문이다.

현재 금당 주위에 남아 있는 3개의 석조대석이 바로 이 금동장륙상을 안치하였던 대좌다. 이 대좌만 보아도 불상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대좌는 자연 그대로 생긴 바위의 윗면을 일단 평평하게 고른 뒤 장륙상의 발이 들어가게 홈을 파 넘어지지 않도록 고정시켰다. 앞부분이 넓고 뒤로 갈수록 좁은 형태인데 이런 모양은 좌우협시불의 대좌도 마찬가지이다. 황룡사의 자랑거리는 이뿐이 아니다. 황룡사에는 754년에 주조된 황룡사 대종이 있었는데 종은 에밀레종의 네 배나 된다고 알려진다.

발굴 결과 발견된 유물이 4만여 점에 이르렀는데 목탑지 심초석 밑에 있는 넓은 판석 중앙에는 사리를 봉안하였던 네모난 사리공(舍利孔)이 패어 있었고, 그 위에 석재의 덮개가 있었다고 한다. 이 심초석 아래의 거대한 판석 밑에서는 금동태환이식(金銅太環耳飾)동경(銅鏡)백자호(白磁壺)수정옥(水晶玉) 200여점의 유물이 나왔는데 이것은 사리를 봉안하고 심주를 세우기 전 의식을 행할 때 사용된 장엄구였음이 밝혀졌다.

학자들을 놀라게 한 것은 황룡사 강당 자리 북동쪽에서 출토된 높이 18.2센티미터, 최대 폭 105센티미터의 대형치미다. 이와 같은 크기의 치미는 한국은 물론 일본이나 중국에서도 유례가 없이 큰 것이다. 치미는 길상과 벽사의 의미로 궁궐이나 사찰의 용마루 끝에 사용되던 장식기와인데 이렇듯 거대한 치미가 사용된 건물이 얼마나 웅장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치미는 워낙 크기 때문에 한번에 굽지 못하고 아래위 둘로 나누어 만들었다. 양쪽 옆면과 뒷면에 교대로 연꽃무늬와 웃는 모습의 남녀를 엇갈리게 배치하였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황룡사 탑은 워낙 높은 관계로 몇 번이나 벼락을 맞고 보수를 거듭했는데 1238년 몽골의 침입 때 완전히 소실되어 현재는 기둥을 세웠던 초석만 남아 있다. 9층목탑 자리는 한 변의 길이가 사방 22.2미터, 높이 183, 상륜부 42, 합해서 225(80미터)로 바닥 면적만 해도 150평이며 요즈음 건물로 치면 약 20층이 된다.

한국 고고학자들의 염원은 1300년 전에 건설된 황룡사 9층탑을 복원하여 그 위용을 보여주자는 것이다. 목탑을 복원한다면 세계의 건축가들은 물론 관광객만도 수없이 순례하는 명품으로 세계에 군림할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황룡사 9층 목탑이 어떻게 생겼는가를 설명해줄 수 있는 자료가 없다는 점이다.

고유섭 선생은 조선탑파의 연구에서 목탑은 중국식 누각의 받아들여 조영되기 시작하였다고 보았다. 그러나 중국의 것을 참조한다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다. 중국에서 엄격한 의미의 목탑이 존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중원 지방, 황하 유역은 세기 초엽에 갑작스런 사막화 현상으로 원시림이 사라지면서 목재가 귀한 지역으로 돌변했다. 북경만 해도 거대한 목탑을 건설할 만한 목재를 구하기 어려워 후대인 명나라나 청나라가 자금성을 축조하면서 수양제가 판 운하를 이용, 남방의 목재를 운송하여 조달했다. 그러나 통나무로 운반하기 어려우므로 나무를 각재로 켜서 차곡차곡 포장하여 운반한 후 그것을 다시 복원하여 둥근 기둥으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중국이 자랑하는 세계유산인 천단(天壇)의 경우도 이런 방식으로 기둥을 만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조로 만든 형태의 목탑 모양이 희귀하나마 남아있는 것은 사실이다. 선비족이 세운 영령사탑(英寧寺塔)은 중국 건축사상 가장 대표적인 초기 건축물인데 흙으로 쌓은 토심(土心)에 의지하고 목조로 외곽 구조를 만들었다. 소주(蘇州) 시내의 북사탑(北寺塔)은 중국에서 유명한 현존하는 탑파이지만 표면의 목조를 제거하고 보면 전축(塼築)구조로 항주(杭州)의 육화탑, 상해의 용화사탑도 동일한 구조다. 응현(應縣)의 불궁사 석가탑은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순수한 목조탑인데 이들은 고구려와 발해의 문화 기반을 전승한 요나라 시대의 북방 민족(중국 한족이 아님)이 조영한 것이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백제 건축양식이 전해진 일본의 법륭사(法隆寺약사사(藥師寺), 중국의 9층 목탑인 육화탑(六和塔), 뇌봉탑(雷峰塔) 등 해외 건축물을 참고하면서 현재 중국에 남아 있는 목탑 중 가장 크고 오래된 67미터의 불궁사 석가탑과 거의 유사한 모습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불궁사의 석가탑이 목조이기는 하지만 건립연대가 1056년이므로 이것을 놓고 약 400년 전에 건립된 황룡사 9층목탑의 원형이라고 볼 수는 없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런 학자들의 고민은 바로 황룡사 옛 터가 보이는 탑골의 부처바위(보물 제201)’에서 9층 탑 암각화 모습이 나타나 그동안의 의문점을 해소시켰다. 정부는 이들을 근거로 황룡사목탑을 복원하는데 학자들과 힘을 모아 20118월 최종 복원안을 확정했고 2016년부터 2025년까지 79.2m 실제 높이로 복원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공방에서 10분의 1 축소 모형 즉 8미터 높이를 완성했는데 1/10 크기이지만 엄청나다. 가로·세로 3.4m 길이의 바닥면 가운데 심주(心柱, 중심기둥)를 포함해 65개의 기둥이 세워졌고, 47칸 구조로 내부를 꾸몄다. 층마다 마루를 깔고, 층과 층 사이엔 암층(暗層, 텅 비어 있는 공간)을 만들어 구조를 튼튼하게 했다. 예산은 무려 1,500억 원으로 황룡사 전체 복원사업의 예산(2900억 원) 중 절반이 넘는다. 2025년이 되면 한국의 자랑거리가 또 하나 생기는 것이다.

 

<모전석탑 분황사>

신라인들은 석가모니 이전 세상에 서라벌에 있던 7군데 사찰터의 하나로 꼽던 중요한 사찰이 황룡사와 담장을 같이하고 있는 분황사이다. 분황사는 향기로운 왕이란 뜻으로 선덕여왕 대인 634년에 세워졌는데 이때는 신라가 백제의 침공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따라서 분황사는 부처의 힘을 빌어 국가의 어려움과 여왕 통치의 허약성을 극복하려는 호국적 염원을 담고 지은 것이다.

분황사에는 신라의 유명한 승려들이 머물렀다. 643년 당나라에서 공부한 자장이 귀국하자 선덕여왕은 그를 대국통(大國統)으로 모시고 분황사에 머물게 했다. 자장은 황룡사 9층탑을 세울 것을 건의했고 신라 불교의 교단조직과 승려들에 대한 일체의 규정을 정비했다. 분황사는 신라의 명필 혜강을 비롯하여 원효가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원효는 분황사에서 화엄경소를 편찬하다가 마치지 못하고 입적했다. 그의 십문화쟁사상은 여러 교파의 차이를 화쟁하여 통합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삼국통일을 이룬 무열왕과 문무왕의 정치 성향과 부합되는 측면도 있으므로 크게 모셔졌다. 아들 설총이 그의 유골을 부수어 소상(塑像, 진흙을 빚어 만든 상)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셨는데 예를 올릴 때면 소상도 고개를 돌려 돌아보았다고 한다. 이 소상은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 스님이 활동하던 13세기 후반까지도 얼굴을 돌린 채로 남아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분황사에는 경덕왕 14(755)에 구리 366000근으로 주조한 약사상과 솔거(率居)가 그린 관음보살상 벽화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황룡사에 모셔진 장육존상이 47000근이었다니 얼마나 큰 불상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사찰의 전각 벽에 있었던 천수대비(千手大悲) 벽화는 매우 영험이 있어 눈 먼 여자아이가 노래를 지어 빌었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러나 당대에 신라의 거찰 중 하나였으나 현재는 국보 제30호인 분황사석탑,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인 화쟁국사비편,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호인 석정(石井) 등이 남아있다.

분황사탑은 전탑양식을 채택했으나 재료는 벽돌이 아니고 석재이다. 이 탑은 장대석으로 구축한 단층의 기단을 갖추고 있으며, 그 중앙에는 탑신부를 받기 위한 널찍한 1단의 화강암 판석 굄대가 마련되어 있다. 탑의 재료는 흑갈색의 안산암이다. , 안산암을 소형의 장방형 벽돌같이 절단하여 쌓아 올린 것이다.

신라에서 석재로 불탑을 축조한 백제와는 달리 모전석탑으로 불탑을 축조한 이유로 강우방 박사는 당대에 신라에서는 벽돌을 구울 만한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벽돌을 구울 수 있는 기술이 없으므로 결이 일정한 안산암을 이용하여 벽돌 모양으로 다듬고 탑을 쌓았다는 것이다.

반면에 전탑의 전문가인 박홍국 박사는 이와 견해를 달리한다. 신라의 모전석탑이 중국의 전탑을 곧바로 모방했다기보다는 한국에 이미 전탑이 건설되어 있었으며 그 모델을 보고 벽돌이 아닌 석재로 탑을 만들었을 개연성이 더 높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황사모전석탑보다 이른 시기에 전탑이 축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신라에서 최초의 모전석탑인 분황사모전석탑이 건설되기 이전에 많은 숫자의 전탑이 적어도 경주지역에 존재했음이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여하튼 모전석탑은 벽돌과 같이 작은 규모의 석재로 만들었으므로 일반형 석탑과는 두드러진 상이점을 갖고 있다. 첫째는 벽돌을 쌓아올리듯 지붕의 아랫부분은 내어쌓기로, 반대로 윗부분은 들여쌓기로 쌓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계단식 지붕은 목조 건축에서는 볼 수 없다. 둘째는 1층탑신의 문이 4면에 보이는 감실이 있다는 점이다. 감실 안에 인왕상을 조각했는데 이러한 사방불(四方佛) 제도는 인도의 산치대탑에서 시원된 것으로 추정한다. 사방불 제도는 후대에도 지속되었는데 현재는 감실 안에 사방불이 없다.

분황사의 또 다른 특징은 기단이 아주 넓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네 귀퉁이의 사자가 탑에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다. 이를 두고 신영훈은 지금의 모습이 원형이 아닐지 모른다고 적었다. 현재 분황사탑은 사방불에 공양하려면 노천에서 의식을 거행해야 하는 것은 물론 우로를 가려줄 시설이 없다. 그러나 과거의 많은 탑은 사방으로 퇴를 덧달아 참예하는 이들이 비 맞지 않고 예불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중국에 현존하는 유일한 목탑인 응현의 불궁사 석가탑 1층에도 퇴를 덧달았고 소주의 북사탑, 인도 히마찰의 부라마우르나 디야르의 목탑 1층도 퇴를 달아 예불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분황사탑에도 그런 퇴를 사방에 설치 했을 수 있는데, 그 유형을 추정할 수 있는 탑이 있다. 국보 제40호인 정혜사지13층석탑으로 1층은 넓고 큰 규모인데 2층부터는 갑자기 줄어들었다. 이 탑을 보면 1층에 퇴를 둔 탑의 전형적인 모습을 추론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현재 감실로 들어가는 문 좌우에는 불국토를 수호하는 수문장인 금강역사상이 새겨져 있다. 이후 감실을 생락하고 1층 사방 벽면에 약간 부조하여 조상(彫像)하는 구조로 바뀐다. 이러한 변화를 알려주는 것이 국보 제122호인 진전사지3층석탑이며 이후 문이 사라진 일반형 석탑에서는 부조상이 사천왕상으로 바뀐다.

1989년 문화재관리국이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분황사 석탑은 비례 면에서 7, 경내에 남아 있는 모전석의 양을 감안하면 9층이 된다고 발표했다. 7층일 경우 높이는 41.6미터, 9층일 경우에는 48.5미터에 이르는 매우 큰 탑으로 과거에 백탑이라고 불렸던 것으로 보아 탑을 하얗게 회칠했다는 추정도 있다. 기단은 한 변 약 13미터, 높이 약 1.06미터 크기가 제각기 다른 막돌로 쌓았다. 밑에는 상당히 큰 돌을 쌓았고 탑신 쪽으로 갈수록 경사가 급하다. 기단 위에는 화강암으로 조각한 동물 한 구씩 네 모퉁이에 배치 했고, 동해를 바라보는 곳에는 물개, 내륙으로 향한 곳에는 사자가 있는데 조각 솜씨가 수준급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구들이 이 탑을 반쯤 부셨는데 그 뒤 승려들이 탑을 다시 쌓기 위하여 헐었더니 바둑알만한 작은 구슬이 출토되었다. 그 구슬은 수정처럼 빛나고 투명하였으며 태양을 쪼여 솜을 가까이 대면 불길이 일어났다고 한다. 당시 이것을 백률사(栢栗寺)에 보관하였다.

1965년 분황사 후면 30미터쯤 떨어진 우물에서 많은 석불이 발견되었다. 이 불상들은 현재 경주박물관 뜰에 진열되어 있는데 모두 머리가 떨어진 것들이다. 조선시대에 척불(斥佛)이 한창일 때 지방의 유생들이 분황사를 비롯한 근처에 있던 석불들을 부수어 우물에 던져 넣은 것으로 추정하는데 현재 경주국립박물관 외부에 전시되어 있다.

화쟁국사비는 원효를 기리는 비로 고려 숙종(1101) 때 세운 것이다. 숙종은 원효와 의상이 동방의 성인인데도 불구하고 비석이나 시호가 없다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 원효에게 대성화쟁국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우게 했다. 그후 방치되어 있었는데 비신(碑身)을 받쳤던 비대(碑臺)가 사찰 근처에서 발견되자 김정희(金正喜)가 이를 확인하고 비대좌 위쪽에 차신라화쟁국사지비석(此新羅和諍國師之碑蹟)’이라고 써놓았다.

탑 옆에 있는 석정은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이라고 불리는 신라시대의 우물로 틀의 외부는 8, 내부는 원형인데, 이것은 불교의 팔정도와 원융(圓融)의 진리를 뜻한다. 이 우물은 매우 흥미로운 전설을 갖고 있다. 이 우물에 세 마리의 호국룡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원성왕 11(795)에 당나라의 사신이 이 용을 세 마리의 물고기로 변신시킨 뒤 잡아서 길을 떠났다. 하루 뒤에 두 여인이 원성왕 앞에 나타나서 사실을 아뢴 뒤 남편을 찾아줄 것을 호소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당나라 사신을 쫓아가서 빼앗아다 우물에 놓아주고 다시 살게 하였는데, 그 뒤부터 삼룡변어정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천 년 전에 만들어졌던 신라 시대의 우물을 지금도 그대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인데 우물()로서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이곳 우물과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외화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효감천(孝感泉, 전북기념물 제43) 뿐이다.

참고문헌 :

 

경주이야기, 국립경주박물관, 1991

신라 과학기술의 비밀, 함인영, 삶과꿈, 1998

돌의 미를 찾아서, 곽동석, 다른세상, 2000

한국의 전탑연구, 박홍국, 한연문화사, 2000

경주역사기행, 하일식, 아이북닷스토어, 2000

한옥의 조형의식, 신영훈, 대원사, 2001

답사여행의길잡이(2) 경주,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돌베개, 2001

, 강우방, , 2003

경주여행 109, 정선중, 혜지원, 2007

세계인과 함께 보는 한국 문화 교과서, 최준식, 소나무, 2011

한국의 전탑연구, 박홍국, 한연문화사,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