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세계문화유산(UNESCO)/경주역사유적지구

경주역사유적지구(31) : 황룡사지구(1)

Que sais 2021. 1. 7.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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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역사유적지구 답사 31 : 황룡사지구(1)

논문 형태의 에피소드 과학으로 본 불가사의 http://www.podbbang.com/ch/1778472 넛지, 4차 산업혁명 http://www.podbbang.com/ch/1778471 노벨상을 놓친 비운의 천재들 http://www.podbbang.com/ch/1778470 노벨상이 만든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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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복사터를 나서면 곧바로 경주 시내인 황룡사지구로 연결되지만 인근에 진평왕릉(재위 579632, 사적 제180), 설총묘(경북기념물 제130), 보문사리사지(사적 제390), 효공왕릉((재위 897912, 사적 183)이 있으므로 이들을 답사한 후 황룡사지구로 향한다. 이들을 먼저 답사한 후 낭산을 답사하는 것도 한 방법이므로 각자의 선택에 따르기 바란다.

진흥왕에게는 동륜과 사륜이라는 2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태자 동륜이 일찍 죽는 바람에 동생인 사륜이 왕위를 이었는데 진지왕이다. 그런데 진지왕(재위 576579)은 즉위 4년 만에 정치가 어지럽과 황음(荒淫)하다는 이유로 화백회의에 의해 폐위 당했다. 뒤를 이은 사람이 동륜의 아들인 진평왕이다. 삼국유사에는 진평왕이 즉위하자 하늘로부터 천사옥대(天賜玉帶)’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옥대는 황룡사의 장육존상, 9층탑과 더불어 신라의 3대 보물로 꼽히는 것이다. 왕은 국가적인 제사를 지낼 때 항상 옥대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는 신라 초대왕인 박혁거세 다음으로 가장 긴 53년간 왕위에 있었는데 이때 많은 중앙 관청이 새로 설치되어 지배체제가 크게 정비되었다. 또한 원광(圓光)과 담육(曇育) 등의 승려를 중국으로 유학 보내는 등 불교를 진흥시키고 왕실을 튼튼히 하는 데도 힘썼다.

진평왕 6(584)에는 건복(建福)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백제와 고구려가 잇달아 국경을 침범해오자 남산성, 명활성, 서형산성(西兄山城) 등을 쌓으며 국방을 강화하였다. 김유신이 활약하기 시작한 것도 이 때다. 또한 중국에 사신을 보내 외교 관계를 강화하려는 노력도 기울였으며, 608년에는 원광을 시켜 수나라에 청병을 요청하는 글을 보내 양제(煬帝)의 허락을 받기도 하는 등 후일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봉분 높이 7.6미터 지름 38미터의 원형봉토분으로 봉분 하부를 자연석을 이용해 둘레석을 둘렀으나 현재는 몇 개만 드러나 있다. 이 능은 아무런 시설 없이 평야가운데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와같이 자연석을 사용하여 보호석을 마련한 예는 아달라왕릉 등 신라왕릉에서 자주 나타나고 있는데 진평왕릉은 석양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진평왕의 뒤를 이은 사람이 선덕여왕이다. 진평왕이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631년 이찬 칠숙과 아찬 석품이 반역을 일으키자 진평왕은 반역자들을 참형에 처한 후 그의 가족 9족을 멸했다. 이 사건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문헌상에 남아있는 최초의 9족멸(九族滅) 사건이다. 진평왕이 철저하게 피의 숙청을 단행한 것은 자신이 죽은 뒤 여왕이 될 선덕여왕이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도록 조처한 것으로 추정한다.

진평왕릉 동쪽에 원효와 요석궁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신라 경덕왕 대의 대학자이며 신라10현 중 한 명인 설총의 묘로 전해지는 묘(경북기념물 제130)가 있다. 지름 15미터 높이 7미터로 비문과 비석은 없으나 의자가 있는 상석이 하나 있는데 상석을 받치고 있는 고석의 모양이 특이하다. 아무런 장식이 없고 단순하나 보존은 잘되어 있는 편이다. 경주 설씨의 시조로 추앙되고 있는 설총은 한자에 토를 달아 만든 이두 문자를 집대성한 인물로 왕의 자문 역할을 담당했고 저술로 화왕계가 있다. 현종 13(1022) 홍유후(弘儒侯)에 추봉되고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경주의 서악서원에 제향되었다.

이어서 낭산과 명활성 사이에 광활한 농지가 나타나는데 황룡사 사리탑과 함께 경문왕 대인 중화 3(883)’이 적힌 금동사리함에 보문사의 현여대덕이 무구정광경에 의해 작은 탑 77개를 만들었다는 구절이 나오는 것을 볼 때 보문사가 이곳에 있던 사찰로 짐작한다. 다만 금동사리함에 김유신을 위해 석탑을 만들었고 883년에 다시 수리했다라는 기록을 보아 금동사리함 자체는 보문사와 관계없다고 추정한다. 학자들은 김유신의 명복을 빌던 사찰은 취선사이므로 이곳에 있던 석탑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

이들 구역에서 금당지, 동서 목탑지 등의 건물터와 석조당간지주초석석등 부재 등이 보인다. 이들의 분포지가 매우 넓고 보문사라고 새겨진 기와의 발견을 통해 보문사가 매우 큰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금당지의 높이는 경작지의 표토에서 약 1미터 정도이며 흙으로 쌓은 축대 위에 건물의 기단석과 초석이 배치되어 있다. 목탑지는 금당지 앞의 높은 단 위에 남아 있는데 서탑지의 중앙에 남아 있는 대형 초석에는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보문사의 금당터, 서탑터로부터 남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당간지주(보물 제123)가 있다. 당간지주 안쪽면은 평면이며 나머지 세 면의 아래쪽은 잘록하고 그 위는 점차 가늘어진다. 하 세 곳에 당간을 고정시키는 구멍이 남아 있다. 남쪽 기둥은 구멍이 완전히 뚫렸고 북쪽 기둥은 반쯤 뚫려 있는데 이런 형태는 매우 드문 예이다. 높이 3.8미터이며 두 기둥 사이에 놓였던 당간 받침은 사라졌다.

보문사 터에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석조(보물 제64)가 보이는데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으나 사찰에서 물을 담아 연꽃을 기르던 것으로 추정하여 석연지라고도 부른다. 보문사터에 온전히 남아 있는 몇 안되는 유물 중 하나로 물통 뒤편 북쪽 가운데 아랫단에 물을 빼기 위한 구멍이 남아 있어 실제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본다. 가로 놓인 직육면체의 돌 안쪽을 파냈는데 파낸 깊이 0.61미터, 길이 2.43미터, 너비 1.85미터이며 내외부에 아무런 장식도 없는 소박한 모습이다. 불국사 안에 있는 4개의 물통 모두 장식되어 있는 것과 비교하면 대조적이며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진평왕릉에서 동남쪽으로 약 500미터 떨어진 논 가운데 연화문 당간지주(보물 제910)가 있다. 하부는 땅 속에 묻혀 있는데 드러난 높이는 약 1.46미터이다. 동서로 약 62센티미터 정도의 간격을 두고 두 개의 기둥이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바깥쪽으로 지름 47센티미터의 연꽃을 새겼는데 이런 형태는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형태다. 제작연대는 8세기 중엽으로 생각되며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 중에서 가장 특수한 형태를 갖고 있어 보물로 지정되었다. 현재까지 원래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지만 이 당간 지주가 동남쪽에 남아 있는 보문사의 것인지 또는 별개의 사찰이 또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보문사터에서 남쪽으로 농토를 따라 신문왕릉을 향하다 보면 소나무 숲 사이로 제법 큰 무덤이 나오는데 효공왕릉(재위 897912)이다. 진성여왕이 죽자 즉위하여 16년간 왕위에 있었는데, 남서쪽의 땅을 견훤에게 빼앗겼으며 궁예의 부하 왕건은 903년 병선을 이끌고 금성(錦城) 10여 군현을 공취하였다. 이 후, 서해의 해상권은 대체로 왕건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909년에 왕건은 진도군과 고이도성(皐夷島城)을 공취했으며, 견훤이 중국 오월(吳越)에 보낸 사자를 나포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910년에 왕건은 나주를 다시 뺏기 위해 포위 공격해 온 견훤군을 대파하여 그가 다가올 사회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발판이 되었다. 이와 같이 신라의 영토는 날로 축소되어 감에도 환락의 세월을 보냄으로써 후삼국을 탄생케 한 장본인으로 후세인들의 평가가 좋지 못하다. 그래서 그런지 봉분높이 5.3미터, 지름 22미터 크기로 타원형봉토분이지만 별다른 석물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봉분의 바닥에 자연석이 노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둘레석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삼국사기에는 사자사(師子寺) 북쪽에 장례지냈다하였고, 삼국유사에는 사자사 북쪽에서 화장하고 유골을 구지제(仇知堤)의 동산(東山) 옆에 묻었다고 하여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현재의 위치가 사자사터로 전하는 지점의 북쪽에 해당하므로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한국의 탑>

진평왕릉, 효공왕릉, 보문사리사지(사적 제390) 등을 만나본 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황룡사지구로 향한다. 황룡사지구는 경주박물관, 안압지와 지척의 거리 소위 말해 코 닫는 거리에 있는데 공터만 남아 있는 사적 6호의 황룡사지와 국보 30호로 지정된 분황사탑만 포함된다.

이 두 사찰은 흥륜사와 함께 신라 초기 사찰 가운데 대표적인 곳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탑이 있는 곳이다. 황룡사는 신라의 사찰 가운데 가장 큰 절로 대지가 약 2만여 평, 동서가 288미터, 남북이 281미터에 달하는데 이곳에 현재 남아있지 않지만 황룡사 9층 목탑이 있던 곳이다. 반면에 분황사는 모전석탑이 현재도 남아있는 곳이다.

두 곳 모두 한국인들이 자주 보는 석탑이 아니라는데 특징이 있다. 그러므로 이들 탑이 무엇인지를 먼저 설명하고 넘어간다.

한국의 도처에 불탑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사실 수많은 유적지나 유원지에서 지금도 돌을 주워서 조그마한 탑을 쌓는 모습을 자주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탑이 정작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들에게 가장 친숙한 존재이므로 더 이상 설명을 들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탑은 탑이라는 뜻이다.

탑은 한마디로 붓다의 무덤이라 볼 수 있다. 석가모니가 쿠시나가라에서 입적하자 석가모니의 시신을 말라족이 다른 인도인들처럼 다비에 붙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시신에서 영롱한 사리가 나오자 인도의 여덟 나라는 석가모니의 사리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분쟁을 일으켰다. 한 제자의 의견에 따라 석가모니의 사리를 팔등분하여 각 나라에 분배하고, 이를 봉안하기 위하여 각기 탑을 세웠다. 이를 사리팔분(舍利八分)이라 한다.

그런데 유골의 분배가 끝난 후 석가모니의 열반 소식을 뒤늦게 전해 듣고 달려온 모라족은 어쩔 수 없이 석가모니의 화장터에 남아 있던 재를 가져가 유골 대신 넣은 재탑을 세웠다. 결국 처음에 건립된 여덟 기의 탑과 추가된 두 기의 탑을 합하여 총 열 기의 탑이 최초의 불탑이 된다.

당연하게 석가모니의 불사리를 봉납한 탑은 예배의 대상이 되어 신성하게 모셔졌다. 불교를 열렬히 신봉했던 아소카왕(기원전 272223)은 이 여덟 개의 탑을 헐고 불사리를 다시 나누어 나라 전체에 팔만 사천 개나 되는 탑을 세웠다. 84천개의 탑에 보관할 정도로 불사리가 많을 수 있느냐는 지적도 있지만 이 숫자는 불교에서 많은 것을 의미할 때 사용한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부처의 무덤을 유독 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궁금하다. 정답은 부처의 무덤이라고 해서 탑이라고 붙여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탑이란 명칭은 원래 고대 인도어인 스투파(stupa)에서 시작되었다. 인도에서 스투파는 본래 쌓아올린다는 의미를 가진 말로 죽은 사람을 화장한 뒤 유골을 묻고 그 위에 흙이나 벽돌을 쌓은 돔(Dome) 형태의 무덤을 지칭한다. 그러므로 탑의 원래 의미는 간단히 말하면 유골을 매장한 인도의 무덤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고대 인도인들에게는 부처의 무덤이나 일반 인도의 무덤이나 모두 똑같은 스투파이다.

그런데 아소카 왕이 인도 전역에 부처의 사리를 봉안한 스투파를 건설하자 이후 스투파는 단순한 인도의 전통적인 무덤이 아니라 성스러운 구조물로 변모했고 사람들은 경외와 참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스투파가 석가모니의 유골, 즉 사리를 봉안하는 구조물에서 나아가 석가모니의 실재로 인식되기 시작하는데 이는 아소카왕의 84천 탑 건립에서 진정한 분사리의 원리가 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불교가 중국으로 전파되자 부처의 스투파가 중국에서 솔도파(率都婆), 스도파(粹都婆), 탑파(塔婆) 등으로 발음되어 한자로 표기되다가 마침내 줄여서 탑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탑을 파고다라고도 부르는데, 이 용어는 포르투갈어 빠고데(pagode)’에서 유래되었다고 알려진다. 15세기 이후 포르투갈이 동남아시아 지역에 진출하여 독특한 건축물인 탑을 보고 이러한 명칭을 붙였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지금도 서양인들은 동양의 탑을 지칭할 때 파고다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