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세계문화유산(UNESCO)/경주역사유적지구

경주역사유적지구(35) : 계림월성지구 첨성대(1)

Que sais 2021. 1. 8.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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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역사유적지구 답사 35 : 계림월성지구 첨성대(1)

논문 형태의 에피소드 과학으로 본 불가사의 http://www.podbbang.com/ch/1778472 넛지, 4차 산업혁명 http://www.podbbang.com/ch/1778471 노벨상을 놓친 비운의 천재들 http://www.podbbang.com/ch/1778470 노벨상이 만든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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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지구 인근에 있는 월성지구에는 월성을 중심으로 경주 첨성대(국보 제31), 경주 계림(사적 제19), 경주월성(사적 제16), 경주임해전지(사적 제18) 등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경주 시내에 밀집해 있으므로 어느 곳부터 방문해도 무방하지만 이곳에서는 앞에 설명된 순으로 답사에 임한다.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질문할 때 세종대왕과 신사임당이라고 말하면 모두들 머리를 끄덕일 것이다. 신사임당은 5만원 지폐에 등장하고 세종대왕은 1만원 지폐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의 지폐에는 한국의 간판스타 문화재들이 등장한다. 등장한 문화재는 여러 가지다. 국보 제1호인 남대문, 독립문, 파고다공원의 팔각정과 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 십층석탑 등이 있으며 과학유산으로 자격루, 혼천의, 천상열차분야지도 등도 있고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석굴암의 본존불, 경복궁의 경회루 등도 있다.

그런데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유통된 10원짜리 지폐는 그야말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지폐의 액면 가격이 낮을수록 많이 사용되는데 이 지폐에 등장한 문화재가 바로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경주역사지구의 첨성대이다.

특히 1960년대에 경주로 수학여행가서 첨성대에 올라가는 것과 석굴암에서 일출을 보는 것은 최고의 일정 중 하나이다. 심지어 첨성대에 올라가거나 내부에 들어가서 단체로 기념 사진을 찍기도 했다. 사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문화재 관리라는 생각이 거의 없었으므로 거의 모든 우리나라 유적지들이 가장 선호하는 놀이터였으므로 탓할 일은 아니다. 여하튼 한국인이라면 첨성대에 대한 애착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첨성대>

과거 한국에서 가장 많이 애호하던 지폐에 등장한 첨성대에 대해 문화재청의 홈페이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첨성대는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시대의 천문 관측대로,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基壇部)위에 술병 모양의 원통부(圓筒部)를 올리고 맨 위에 정()자형의 정상부(頂上部)를 얹은 모습으로 높이는 약9m이다.

원통부는 부채꼴 모양의 돌로 27단을 쌓아 올렸으며,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외부에 비해 내부는 돌의 뒷뿌리가 삐죽삐죽 나와 벽면이 고르지 않다. 남동쪽으로 난 창을 중심으로 아래쪽은 막돌로 채워져 있고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다. 동쪽 절반이 판돌로 막혀있는 정상부는 정()자 모양으로 맞물린 길다란 석재의 끝이 바깥까지 뚫고 나와있다.

이런 모습은 1920, 2526단에서도 발견되는데 내부에서 사다리를 걸치기에 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옛 기록에 의하면, “사람이 가운데로 해서 올라가게 되어있다라고 하였는데, 바깥쪽에 사다리를 놓고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 사다리를 이용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늘을 관찰했던 것으로 보인다.

천문학은 하늘의 움직임에 따라 농사 시기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농업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관측 결과에 따라 국가의 길흉을 점치던 점성술(占星術)이 고대 국가에서 중요시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면 정치와도 관련이 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국가의 큰 관심사가 되었으며, 이는 첨성대 건립의 좋은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그 가치가 높으며, 당시의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과거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라며 선생님이 강조하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국내 학계를 뒤흔드는 논쟁이 벌어졌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첨성대가 정말로 하늘을 관찰한 천문대이냐이다. 문화재청의 홈페이지에도 점성술과 연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적힌 것처럼 당시의 논쟁은 첨성대가 천문대인가 또는 제단인가로 구분되었다.

이런 지적은 사실 일반인들에게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이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 이후 첨성대는 줄곧 천문대로 알려졌기 때문에 이에 이론을 제기한다는 자체가 다소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첨성대에 관한 기록은 그야말로 미비하다.

삼국유사에 간단하기는 하지만 선덕여왕 때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조선시대의 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 동사강목에 기록이 있지만 그 또한 짧은 것은 마찬가지이며, 첨성대가 지어진 지 800여 년에서 1,100여 년이나 지난 기록이다.

여하튼 상당수 학자들이 지적하는 것은 첨성대가 별을 바라보는 시설물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더불어 첨성대가 별을 보았다는 증거로 첫째 대지보다 높고 둘째는 꼭대기에 사람이 서서 별을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특히 두 번째 특징은 신라시대에 세워진 다른 시설과는 성격을 크게 달리하므로 별을 보는 용도 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천문대라 하면 높은 산에서 별을 보기 편하고 각종 기구가 있어 보기 힘든 별도 관찰하는 곳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첨성대의 높이가 10여 미터에 지나지 않는데다가 상부로 올라가는 계단을 설치하지 않았다는 점을 볼 때 첨성대가 천문대의 역할을 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첨성대의 내부가 자연석인 상태로 있으며, 한밤중에 하늘을 보고 재빨리 상부에 보고하기에는 탑 내부가 너무 어둡고 좁으며 발 디디는 곳도 불안하며 위험스러워 과연 이곳에서 굳이 하늘을 봐야 하는지라는 의문이 꾸준히 제기되었다.

김용운 박사는 백제, 고구려나 중국, 일본에 같은 모양의 천문대가 없고 삼국사기에 선덕 여왕대의 천문관측 기록이 없는 것을 감안할 때 첨성대를 천문대로 볼 수 없다고 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으로 비록 선덕여왕때의 천문기록은 없지만 신라시대에 천문기록이 크게 늘었음을 볼 때 첨성대에서 천문을 관측한 것이 틀림없다는 주장으로 구한말부터 첨성대를 연구한 와다(和田)는 첨성대 위에 목조물을 구축하고 혼천의를 설치하여 천문을 관측했으리라고 추정했다. 이러한 견해에도 불구하고 첨성대가 정말 하늘만 살피는 천문대였는가에 대한 의문이 계속 제기된 것은 사실이다.

첨성대가 천문을 관측하는 소위 관상대가 아니라면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을까? 이 문제에 대한 설명은 여러 가지다.

우선 김박사는 첨성대가 신라 과학의 기념비적 상징물로서 돌의 수 366개는 1년의 일수, 28단은 28(宿)를 나타내는 등 기하학적 지식을 반영한다는 가설을 내놓았다. 중국의 대표적 수학서 주비산경을 토대로 신라 학자들이 이 책에 나타나는 수학적인 비례 등을 적용하여 만들어낸 상징적인 건축물이라는 주장이다. 반면에 김장훈 박사는 365개로 설명했다.

동양사학자 이용범은 첨성대를 과학보다 신앙 면에서 다루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첨성대의 형태가 불교의 우주관인 수미산설을 내놓아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수미산(須彌山)은 불교에서 말하는 상상의 영산으로 석가여래의 이상향인 사바세계의 표상이다. 학자들은 수미산을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 산으로 설정하였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부처가 보궁(寶宮)을 짓고 상주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 수미산은 첨성대와 비슷한 모양을 지니고 있다.

여하튼 수미산은 둘레에 4대주()가 있고, 구산팔해(九山八海)가 펼쳐 있다. 수미산 하계는 지옥이며, 수미산 아래 부분에 인간계가 있다. 산의 중턱에는 사방으로 4왕천(四王天)이 있고 사천왕이 그곳을 지킨다. 수미산설의 요지는 첨성대가 건설된 7세기 초는 신라에서 불교가 크게 융성하던 시기이므로 첨성대는 불교 영산의 모양을 본 따서 불교의 우주관을 상징하는 일종의 종교적인 제단이라는 것이다.

건국대학교 김기흥 교수는 첨성대가 선덕여왕의 불교적인 도리천 신앙을 담은 것이라고 제기했다. 그의 도리천설은 첨성대가 수미산의 형상을 그대로 모형화한 것이 아니라, 수미산 정상에 위치한 도리천의 세계를 형상화했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삼계 중에 가장 낮은 단계인 욕계의 하늘은 육욕천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온 우주의 중심에 우뚝 솟아 있는 수미산에 위치해 있다고 설명한다. 즉 사천왕과 그 중생들이 살고 있는 사왕천이 수미산 중턱에 걸쳐 있고 그 위의 수미산 정상에는 중심에 있는 제석천을 비롯해 네 귀퉁이에 각각 8(하늘)이 있어 도합 33천이 있는데 이를 도리천이라 부른다. 그런데 첨성대의 구조는 모두 31단이며 여기에 첨성대를 받치고 있는 땅과 그 위의 하늘을 포함하면 모두 33단이 된다. 첨성대는 33천 즉 도리천을 상징화한 것으로 선덕여왕이 다스리는 인간 세상과 제석천왕이 다스리는 하늘나라를 연결해주는 우주목이자 현세와 우주를 연결하는 우물의 구실을 한다는 것이다.

신라 최초의 여왕이었던 선덕여왕은 바로 33천 즉 도리천을 지배하는 제석천왕에 대한 신앙심이 독실했다고 알려졌다. 선덕여왕은 신라 왕조에서 특이한 사람이다. 성골이 왕위를 계승하던 신라에서 진평왕을 마지막으로 남자 왕위 계승자가 없어 진평왕의 큰딸인 선덕여왕이 대를 이은 것이다. 그러나 선덕여왕의 왕위 승계는 평탄치 못했다. 국내에서는 왕위 계승에 따른 반란이 일어났고 외교적으로도 당나라에서 사신을 통해 왕을 남자로 교체하라고 압력을 가할 정도였다.

왕이 되었어도 여러 가지 역학상 힘의 한계를 절실하게 느끼고 있던 선덕여왕은 도리천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는데 그녀의 유언은 여자이기 때문에 살아서 제대로 왕 노릇을 하지 못했으므로 환생해서는 도리천의 왕이 되어 남자로서의 삶을 다시 살아 진정한 제왕이 되고자하는 갈망이라고 설명했다. 첨성대가 천문대라기보다는 특정 목적이 있는 건물이라는 뜻이다. 특정 목적에는 당대의 정치적인 목적도 포함된다. 선덕여왕 재위 중에 무려 신라는 11차례나 크고 작은 전쟁을 치렀다. 그중 두 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외부의 침략인데 선덕여왕은 특히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 여왕은 신라의 왕권을 강화하고 민심을 수습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했는데 그런 맥락에서 천명과 관련된 첨성대를 세웠다는 것이다. 즉 분황사를 세웠던 것과 같은 차원에서 첨성대를 일반적인 천문대라기보다는 상징성이 강한 구조물을 택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