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세계문화유산(UNESCO)/경주역사유적지구

경주역사유적지구(33) : 황룡사지구(3)

Que sais 2021. 1. 7.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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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역사유적지구 답사 33 : 황룡사지구(3)

논문 형태의 에피소드 과학으로 본 불가사의 http://www.podbbang.com/ch/1778472 넛지, 4차 산업혁명 http://www.podbbang.com/ch/1778471 노벨상을 놓친 비운의 천재들 http://www.podbbang.com/ch/1778470 노벨상이 만든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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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방 박사는 인도의 아잔타, 중국의 돈황용문운강석굴의 거대한 암석에 수백 수천의 부처들이 조각되어 있지만 석가모니의 실체인 불탑을 바위 즉 돌로 만든 나라는 오직 우리나라뿐이라고 설명한다. 특히 한국의 대표적인 석재라고 볼 수 있는 화강암같은 견고한 돌로 탑을 만들기 위해서는 목탑에서는 시도하지 않던 다른 기술도 요청된다. 목탑은 나무와 기와로 이루어졌으므로 건축적인 기술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단단한 돌로 탑을 쌓기 위해서는 건축적인 기술뿐만 아니라 다듬는 조각 기술도 합해져야 한다. 단단한 석재를 다루어야 하므로 상당한 석조 기술이 없으면 시도할 수 없는 기술이다.

신라 석탑은 8세기 불국사 석가탑과 다보탑에 이르러 독창적인 구조와 형태가 정립된다. 석탑들은 대체로 경주를 중심으로 한 인근 지역에 분포하였는데 9세기에 교종 불교가 쇠퇴하고 지방 곳곳에 석탑이 조성되면서 석탑의 구조와 형식에도 큰 변화가 일어난다.

석탑 구조와 형식이 정형화될 성질이 아니므로 탑신부기단부를 중심으로 변화되기 시작한다. 정해사지 13층석탑은 탑신부의 변화가 두드러진 석탑으로 13층임에도 불구하고 전체 높이가 높지 않은 우리나라 유일의 석탑이다. 석굴암 삼층석탑은 탑신부가 사각형이지만 기단부는 팔각원당형인 탑이며 경주 남산동 동서 삼층석탑(보물 제124)은 서탑이 석가탑과 같은 모습인 반면 동탑은 모전석탑 양식을 따랐다. 구조 변경없이 외부만 여러 조각을 새기는 형태도 나타났는데 원원사지동서삼층석탑(보물 제1429)이 그런 예이다. 이들 탑은 정형적인 양식으로 조성된 탑이지만 기단과 1층 옥신에 십이지신상과 사천왕상을 각각 조각했다. 위의 설명이 약간 어렵게 느껴질지 모르므로 다소 풀어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탑은 크게 볼 때 기단부와 탑신부, 상륜부로 나뉜다. 기단부와 탑신부를 구별하는 방법은 집의 지붕에 해당하는 옥개석(지붕)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면 된다. 일반적으로 3층탑, 5층탑으로 부르는 것은 이 탑신의 숫자를 갖고 부르는 이름이다. 사리는 바로 탑신 안에 모신다. 탑이 집과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이 탑신부로 지붕이 있고 옥개받침이라는 처마도 있다. 처마는 집의 그것처럼 중층으로 되어 있는데 한옥처럼 그 끝이 약간 올려져 있다. 또한 탑신의 네 귀퉁이에 기둥의 모습((隅柱, 모서리 기둥)을 새겨 놓았으므로 기둥과 지붕이 있는 완벽한 모습의 집을 의미한다. 이러한 한국의 완벽한 탑 즉 집의 결정판은 불국사의 석가탑이다.’

 

참고적으로 한국에서 현재 가장 오래된 석탑은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이다. 이들 백제 석탑은 석재를 나무처럼 잘라 쌓은 목탑 형식의 석탑인데 이것이 신라에 전래되었고 삼국통일 무렵 석재의 수, 구조 등이 줄어들면서 점차 조각이 다양하게 새겨지는 변화가 일어났다. 물론 석탑이라 하여 모두 화강암을 사용한 것은 아니며 안산암이나 점판암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신라 중기가 되는 8세기가 되면 석탑 표면에 여러 가지 불교상을 조각하여 장엄하기 시작하면서 9세기 이후에는 크게 유행한다. 장엄을 가하는 위치는 상하기단이 중심이 되고 초층탑신에 조각한 예도 있다. 조각하는 상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 보살 등의 예배대상, 사천왕, 팔부중, 인왕, 십이지

사자와 같은 수호신, 비천,

주악상(奏樂像) 같은 공양상에서부터 연꽃 같은 단순한 장식무늬까지 다양하다.

 

보살 같은 예배대상은 대체로 탑신에 조각되고 수호신은 기단부에 조각되는데 이러한 구별은 탑에는 부처의 사리가 봉안되었다는 탑 건립 본래의 정신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탑에 여러 가지 조각이 가해지면 탑 자체의 존엄성보다는 표면조각에 시선이 더 쏠려서 예배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장식물로서의 성격이 돋보이게 된다. 원원사지3층석탑(보물 제1429), 남산리3층석탑(보물 124)을 비롯한 많은 석탑들이 이러한 예이다.

석탑에는 전형양식에서 벗어난 양식의 탑이 있다. 이러한 탑들을 이형양식이라고 부른다. 그 형식은 매우 다양하여 일정하지 않으나 모두 불교적 또는 신앙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 경주에서 가장 뛰어난 이형석탑은 불국사의 다보탑이다. 옥산서위 뒤에 있는 정혜사지의 13층석탑, 석굴암 뒤에 있는 3층 기단이 원형으로 된 3층탑이 있고 바위를 기단삼아 세운 남산용장사의 삼층석탑도 이형석탑이다.

탑에는 부처의 사리와 함께 각종 유물을 넣어서 부처에게 공양하는 풍습이 있으므로 이러한 유물이 발견되는 예가 많다. 이 유물들은 후세의 수리 때 추가한 것도 있지만 창건당시부터 내려오는 유물이 대부분으로 그 당시의 문화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호국사찰 황룡사>

황룡사는 진흥왕 14(553) 원래 사찰을 지으려고 한 장소가 아니라 궁궐을 지으려고 했던 곳이다. 그런데 우물 속에서 황룡이 나오는 바람에 신라 변방 아홉 개 나라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다는 믿음으로 궁궐 짓기를 포기하고 황룡사를 지었다는 설화가 삼국유사에 전해진다.

황룡사는 자비마립간 12(469)에 신라 왕경의 도시계획인 방리제(坊里制)가 실시된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신라 왕경에서 하나의 방()의 크기는 대략 동서 160미터, 남북 140미터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발굴결과 황룡사의 경계는 동서 288미터, 남북 281미터로 이것은 대체로 4개의 방리를 차지할 정도로 넓은 면적이다.

황룡사터는 1976년부터 1983년까지 8년에 걸쳐 발굴되었는데 이때 원래 늪지였던 땅을 매립해 대지를 만들었다. 황룡사지는 발굴결과 가람 규모와 배치의 변화가 세 번 있었음이 밝혀졌다. 창건 당시의 1차 가람은 중문과 남회랑. 서회랑을 놓아 백제의 11금당 형식이었다.

황룡사라면 645년에 완성된 9층 목탑을 빼놓을 수 없는데 이 탑은 높이가 80미터에 이르는 9층 목탑이다. 삼국유사에 목탑을 세우게 된 이야기가 나온다.

 

자장법사가 중국으로 유학하여 대화지(太和池)라는 연못을 지나는데 갑자기 신인(神人)이 나와서 신라가 처한 어려움을 물었고 자장은 신라는 북으로 말갈(靺鞨)에 연하고 남으로는 왜국에 이어졌으며,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가 번갈아 국경을 침범하여 큰 우환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신인은 신라가 여자를 왕으로 삼아 덕은 있어도 위엄이 없기 때문에 이웃 나라에서 침략을 도모하는 것이니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자장이 귀국한다고 해서 무슨 유익한 일이 있느냐고 묻자 신인은 황룡사의 호법룡(護法龍)이 바로 자신의 큰아들이므로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면 주변 9나라가 복종하며 왕실이 영원히 편안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자장이 귀국하여 선덕여왕에게 9층탑 세울 것을 건의하자 신하들이 백제에서 기술자를 데려와야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백제의 아비지(阿非知)가 초청되었는데 처음 목탑의 기둥을 세우던 날 꿈에 본국인 백제가 멸망하는 모양을 보았다. 아비지가 불안하여 일을 멈추었더니, 갑자기 천지가 진동하며 어두워지는 가운데 노승(老僧) 한 사람과 장사(壯士) 한 사람이 나타나 기둥을 세우고 사라졌다. 아비지는 그제서야 뉘우치고 탑을 완성시켰다.’

 

삼국유사의 글만 보더라도 황룡사탑을 만드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사실 80미터나 되는 목조탑은 나무의 결구에서 매우 복잡하고 어렵기 때문에 고도의 기술이 없으면 건설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신라의 건탑 기술이 부족하여 신라보다 앞선 기술을 갖고 있던 백제의 탑 기술자인 아비지(阿非知)를 초청하여 황룡사탑을 완성했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소위 외국에서 기술자를 초청하여 완성한 것인데 백제는 640년에 이미 익산 미륵사에 구층 목탑을 건설했으므로 충분한 기술을 축적하고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삼국유사9층탑을 세우면 아홉 나라가 복종한다고 했는데 아홉 나라를 보면 일본, 중화, 오월, 탁라, 응유, 말갈, 단국, 여적, 예맥으로 이 중에는 백제와 고구려는 빠져 있다. 이것은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이질적인 국가가 아니라 당연히 합쳐져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추정도 있다.

여하튼 중건된 2차 가람은 9층목탑을 건립하면서 완공했는데 내부를 구획하던 회랑을 제거했다. 중문을 창건 가람의 남쪽에 새로 설치하고 그 북쪽에 목탑중금당강당을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하고 중금당의 동서쪽에 동서금당을 남향으로 배치한 13금당의 배치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후 통일신라시대에 종루와 경루를 정방형으로 개조하고 동서회랑을 개조하여 남북자오선을 중심축으로 중앙에 금당, 그 좌우에 또 다른 전각, 그 남방에 탑, 북방에 강당, 탑 전방좌우에 또 다른 건물, 그리고 중문과 강당 좌우로 장방형으로 회랑을 두른 13금당의 변형된 가람형식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