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세계문화유산(UNESCO)/경주역사유적지구

경주역사유적지구(58) 석굴암(8)

Que sais 2021. 1. 30.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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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역사유적지구 답사 58 : 석굴암(8)

논문 형태의 에피소드 과학으로 본 불가사의 http://www.podbbang.com/ch/1778472 넛지, 4차 산업혁명 http://www.podbbang.com/ch/1778471 노벨상을 놓친 비운의 천재들 http://www.podbbang.com/ch/1778470 노벨상이 만든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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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재료 사용>

석굴암의 본존불을 어느 돌로 사용했느냐에 대한 결론은 간단하게 도출되었다.

연세대학교 지질학과 교수였던 이대성 교수는 석굴암의 석재는 바로 현장에서 채굴한 돌을 사용하였다고 발표하였다. 당시의 작업 여건과 석재의 운반 등을 고려할 때 현장 이외의 장소에서 석재를 공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석굴암의 석재는 홍색장석화강암으로 석굴암 터에서 암석을 채취한 흔적도 발견되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석굴암의 화강석 재료는 화강석 자체만 볼 때 매우 거칠어 상질의 재료는 아니라고 설명한다. 재료가 다소 거칠다는 것은 석굴암이 현재의 토함산 자리에 세워지지 않으면 안 되었음을 보여준다.

경상대학교의 좌용주 교수는 전암 대자율(whole-rock magnetic susceptibility rate) 측정법을 사용하여 이 교수의 설명이 이라고 발표했다. 전암 대자율은 바위 등에 자기장을 쐬면 암석에 포함된 자성을 띤 물질에 따라 값이 달라지므로 이 값을 이용해 석재의 유사성과 차이를 알아내는 것이다.

좌교수는 경주 부근의 석재들에 대해 조사한 결과 크게 세 종류의 화강암이 존재한다는 것을 밝혔다. 토함산 화강섬록암, 흑운모 화강암, 남산 화강암이다. 토함산 화강암은 대자율 값이 7.025.0, 흑운모 화강암은 0.25 이하 또는 1.04.0, 남산 화강암은 0.256.0의 범위를 갖는다. 측정 결과 석굴암 석재의 대부분은 토함산 화강섬록암과 대자율 값이 거의 일치했다. 이대성 교수가 지적한 홍색장석화강암이 바로 화강섬록암이다.

좌교수는 불국사 다리와 탑들의 석단 등 일부는 토함산 화강섬록암이 사용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불국사의 청운교, 백운교, 연화교, 칠보교, 석가탑, 다보탑, 대웅전 석조 기단과 석등도 대부분 남산 화강암으로 건조했다는 설명이다.

신라에서 경주 남산은 성지 중 성지인데 돌을 어떻게 외부로 반출하느냐는 지적도 있었다. 그런데 불국사와 건축 연대가 비슷한 경주 북쪽의 나원리 5층 석탑도 남산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당대 석굴암, 불국사 건설은 신라가 국격을 기우려 건설한 것이므로 경주 전역의 재료를 사용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재료를 현장과 가까운 곳에서 해결해야한다는 대 전제가 있음에도 석굴암이 현재의 위치에 선정된 이유에 대해서는 많은 설들이 있다. 김대성이 수십 년에 걸쳐서 건설하다가 국가가 이어받을 정도로 중요한 공사였으므로 위치 선정에 있어 여러 점을 고려하였다는 것이다. 석굴암의 본존불은 똑바로 동해를 향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동해 중의 한 지점인 동해구를 응시하고 있다. 인근에는 문무왕이 욕진왜병(慾鎭倭兵)의 뜻으로 감은사를 세우다가 준공을 보지 못하고 681년에 사망하자 아들인 신문왕이 부친을 이어 감은사를 완공한다. 또한 동해구에는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신라 역사상 처음으로 조성된 동해릉(東海陵)이 있다. 신문왕은 망배망제(望拜望祭)를 위한 이견대(利見臺)도 세운다. 석굴암의 위치는 신라 왕조의 중요한 유적이 집중되어 있는 동해구를 의식적으로 향하도록 선정하였다는 것이다.

반면에 장충식 박사는 석탈해왕의 전설에 등장하는 우물 요내정(遙乃井)이 바로 지금의 석굴암 자리에 있었다며 동악대신즉 토암산의 신이 됐다는 석탈해왕과 관련된 종교적 이유가 석굴암 조성의 한 배경이라고 주장했다. 삼국유사에 적힌 요내정에 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루는 토해(吐解)가 동악(東岳)에 올랐다가 돌아오는 길에 백의(白衣)로 하여금 마실 물을 떠오게 했는데, 백의가 물을 길어오며 중도에서 먼저 맛을 보고 바치려고 하니 그 각배(角盃)가 입에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꾸짖으니 백의가 맹세하기를, “이후로 가깝고 먼 곳을 막론하고 먼저 맛보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자 비로소 떨어졌다. 이로부터 백의가 두려워하여 감히 속이지 못했다. 지금 동악 가운데 한 우물이 있는데 세속에서 요내정(遙乃井)이라고 말하니, 그것이 그 샘이다.’

 

여하튼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하여 신중하게 선정된 석굴암 장소에서 공사하는 도중에 커다란 덮개석이 깨지는 문제가 생긴다. 석굴암을 짓고 있던 김대성으로서는 대단히 당혹스러운 일이었음이 틀림없다. 석굴암의 구조로 보아 천장을 덮는다는 것은 시공상 마무리 단계를 의미하므로 준공 날짜도 얼마 남지 않았었을 것이다. 불자인 김대성으로서는 당연히 새로운 돌로 석굴암을 완성하여야 하지만 그러려면 적어도 상당 기간 동안 준공 시기를 늦추어야 한다. 아무리 석굴암 현장에서 원석을 채취한다고 해도 덮개석 만한 돌을 새로이 준비하는 것은 단순한 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돌로 시공할 수 없는 이유를 어떻게 해서든지 만들어서 변명해야 했을 것이다. 김대성이 만든 변명은 간단하다. 자신의 꿈에 천신이 나타나 깨진 덮개석으로 천장을 마무리해 주는 것을 볼 때 새로운 돌로 덮개석을 만들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석공들에게 설명하는 것이다. 김대성이 깨어진 돌이지만 석굴암 천장 덮개석을 그대로 쓰자고 오히려 석공들을 다독거렸을 것이라는 뜻이다.

 

<석굴암의 수난 일지>

신라 불교의 정수라 볼 수 있는 석굴암은 고려 건국 이후 그 존재감이 약해져 일부 기행문에서 간간히 언급된다. 17세기18세기 정시한의 산중일기, 정선의 교남명승첩등의 기록을 보면 이 때까지 어느 정도 석굴암이 관리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석굴암은 여러 차례에 걸쳐 수리와 보수가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불국사고금창기에 의하면 숙종 29(1703)에 종열(從悅), 영조 34(1758)에는 대겸(大謙)이 석굴암을 중수했다. 그리고 조선 말기에 울산병사 조예상(趙禮相)에 의해 크게 중수되었으나 세인에 잊혀졌다가 한일합방 직전인 1909년에 우연히 발견된다.

 

전문가들의 현장 답사로 석굴의 존재가 밝혀지자 일본으로 반출하려던 생각이 무산되고 결국 석굴암을 제자리에 두되 현지에서 보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이때부터 석굴암의 수난은 시작된다. 우선 석굴암 보수에 동원된 인력들이 모두 기차철로를 부설하는 토목기술 인력이었다. 당연하게 그들은 기차 철로의 터널처럼 석굴을 수리하겠다는 원칙을 세우고 191310월부터 석굴 천장 부분에 목제 가구(假構)를 설치하여 해체공사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1914년에는 본 공사에 들어가 석굴을 완전히 해체하고 19159월에 공사를 끝냈다.

총독부는 석굴암을 조립하는 과정에서 당시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 최첨단 건축기법 중의 하나인 콘크리트를 사용했다. 석굴암 외벽을 약 1미터 정도 콘크리트를 도포했고 정상부는 그대로 흙을 얹고 다시 잔디를 심었다. 이때 석굴암 바닥으로 흐르던 샘물은 차단되어 석굴 내부를 지나지 못하도록 흐림이 돌려졌고 석굴암 둘레도 철저히 시멘트로 막았다.

그런데 준공 후 2년 뒤 석굴 내에 결로와 누수 현상이 발생하자 1917년에 2차 중수에 들어갔다. 이때 콘크리트로 된 돔의 표면에 석회모르타르와 점토층을 마련하고 원형 돔 외부에 방사선 모양의 암하수구(暗下水溝)를 설치하고 그 위에 흙을 덮고 잔디를 깔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굴암의 손상은 계속되자 1920년부터 1923년까지 천장의 방수를 위해 대대적으로 재보수공사를 실시하였지만 결로와 함께 물기가 마른 후 생기는 하얀 부스러기 등이 계속되었다. 습기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1927년에는 푸른 이끼를 없애기 위해 증기 세척을 했다. 또한 시멘트에서 나오는 탄산가스와 칼슘(Ca)이 화강석 벽을 손상시키기 시작했다.

해방 후에도 1947, 1953, 1957년에 고온 증기를 사용하여 불상을 세척했다. 당시는 불상을 몇 년마다 닦아주는 것을 최상의 보존방법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돌의 가는 입자가 떨어지는 등 훼손이 계속되자 중단되었다. 그 후 1961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대대적인 보수공사에 착수하였는데 보수 방법은 다음 네 가지로 좁혀진다.

 

빗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일본인이 시공한 콘크리트 벽 배후로 약 1미터 가량의 공간을 두고 다시 콘크리트로 된 돔을 세우고 그 위에 두터운 봉토를 덮는다.

지하수가 스며들지 못하도록 석굴 밑 암반에서 나오는 샘물의 배수구를 강화한다. 이는 일본인들이 설치한 콘크리트 돔이 물기를 빨아들여 다시 석재 틈새로 뿜어내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용도였다.

습한 공기의 유입을 막기 위해 전실에 목조건축물을 세운다.

석굴 내부의 환기를 위해 지하에 공기통로를 만들어 이중 돔 사잇공간으로 빠지도록 한다.

 

정부에서 이와 같은 복원 계획을 수립한 것은 <문화재관리국>이 발간한 석굴암수리공사보고(1967)를 토대로 했기 때문이다. 이 보고서에는 복원 작업의 필요성으로 두 가지를 지적했다.

첫째, 일본이 무차별로 벌인 보수공사로 석굴암의 구조에 변화가 생겼다. 그러므로 새로운 석재를 추가하여 기본 틀에 변형을 가져왔고 콘크리트 사용으로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던 통풍이 막혀 물이 새고 습기가 끼었다. 둘째, 석굴암 앞의 전실을 복원하지 않았다. 석굴암의 전면을 그대로 방치하여 토함산에서 올라오는 해풍과 굴 주변의 먼지 등에 무방비 상태로 놓였다. 따라서 습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석굴을 감싼 콘크리트에 120센티미터 간격을 두고 새로운 돔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여하튼 위의 보고서대로 석굴암을 수리하고 보수했지만 콘크리트 돔은 1996년 또 다시 언론의 조명을 받는다. <동국대기술연구소장> 유승룡 박사가 불국사의 의뢰를 받아 실시한 석굴암에 대한 구조물 진동 문제와 안전도 2차 조사 결과에서 일제가 만든 콘크리트 돔에 너비 2밀리미터 길이 5미터의 균열이 발생했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 균열이 구조물 자체의 결함 때문이 아니라 기존에 있던 미세한 균열이 소음, 진동, 지진 등 외부 충격에 의해 확대되었다고 추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