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세계문화유산(UNESCO)/경주역사유적지구

경주역사유적지구(40) 및 계림월성지구 석빙고(1)

Que sais 2021. 1. 10.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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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역사유적지구 답사 40 : 계림월성지구 석빙고(1)

논문 형태의 에피소드 과학으로 본 불가사의 http://www.podbbang.com/ch/1778472 넛지, 4차 산업혁명 http://www.podbbang.com/ch/1778471 노벨상을 놓친 비운의 천재들 http://www.podbbang.com/ch/1778470 노벨상이 만든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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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빙고의 과학성>

인류가 인공적으로 얼음을 만들게 된 것은, 1876년 독일의 칼 린데가 암모니아를 냉각제로 사용하는 흡수식 냉장장치를 발명한 이후부터였다. 1913년 최초의 가정용 전기냉장고가 미국에서 출시된 후부터 냉장고는 생활의 필수품이 되었지만, 그 이전에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얼음은 천연 얼음뿐이었다.

그러므로 얼음을 인공적인 창고에 넣어 보관하는 방법이 유일한데 기원전 1700년경, 시리아 남동부에 위치했던 마리의 군주 짐리림이 유프라테스 강 근처에 얼음집을 짓고 여기에 얼음을 넣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은 높은 산에서 가져온 눈을 뭉쳐 벽 사이에 넣은 다음, 짚이나 흙, 퇴비 등으로 열을 차단한 저장소를 만들어 포도주를 차게 보관하기도 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 로마의 네로 황제 등은 높은 산의 눈을 날라 오게 하여, 전투나 격투에서의 승리자에게 찬 음식을 내려주기도 했다. 아스텍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의 거대한 시장에서는 근처의 봉우리에서 운반해온 얼음을 팔기도 했다고 한다. 눈 덮인 만년설이나 겨울에 자연적으로 만들어지는 얼음을 더운 여름에도 사용하기 위한 노력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중국도 오래전부터 얼음 창고를 사용했다.시경<빈풍(豳風)> ‘칠월(七月)’ 편에는 다음 같은 구절이 있다.

 

십이월이 되면 얼음을 탕탕 깨어 정월에는 빙고(凌陰)에 넣는다네.’

 

시경의 내용은 기원전 10세기경의 풍경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때 이미 얼음 창고가 있어서 얼음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기원전 75세기 무렵의 진()나라의 얼음 창고 유적이 협서성 옹성(擁城)유적에서 확인된 바 있다. 기원전 3세기에 진시황(秦始皇)은 지하 17m에 거대한 토기 단지를 파묻어 빙고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송사<예지(禮志)>에는 신하들에게 여름에 얼음을 내려준 기록이 있고, 명사<예지(禮志)>에는 겨울철에 얼음을 캐어 빙고에 넣었다가, 여름과 가을철 제사에 사용한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얼음은 구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제사 때나 사용할 수 있었다.

실생활에서 얼음을 가장 널리 사용한 것은 우리 조상들이었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매우 뚜렷해, 겨울철에는 얼음이 얼고, 여름에는 몹시 덥다. 따라서 겨울에 얼음을 채취해, 잘 보관해 여름에 사용하려는 노력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 삼국유사<기이(1)> ‘3대 노례왕(弩禮王, 재위 2457)’에 석빙고에 대한 간단하지만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이때 비로소 도솔가(兜率歌)를 지었으니 차사(嗟辭)와 사뇌격(詞腦格)이 있었다. 또 비로소 보습과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와 수레를 만들었다.’

 

중국의 촉한(蜀漢, 221~263)과 서진(西晋, 265316)시대 사람인 진수(陳壽, 233297)가 편찬한 삼국지<위지동이전> ‘부여장사를 치를 때 여름에는 얼음을 쓰고 사람을 죽여 순장하는데, 많게는 몇 백에 이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석빙고가 한반도 남반부뿐만 아니라 북반부인 만주 지역에서도 사용하는 등 한민족이 보편적으로 사용한 저장 시스템 중에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신라본기> ‘지증왕 6(505)’에도 석빙고에 대한 기록이 있다.

 

‘11월에 왕은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처음으로 얼음을 저장하여 쓰게 하고 선박의 편리를 도모하는 제도를 마련했다.’

 

지증왕이 얼음을 보관토록 명령하였다는 뜻이다.

2010년 충남 연기군 남면 나성리 유적에서 서기 34세기에 사용된 얼음창고를 발견했다는 발굴보고가 있었다. 나성리 유적에서 발견된 수혈유구(구덩이) 가운데 kk-014 수혈은 400×356규모의 저장구덩이로 평면 원형의 형태로 바닥면 동쪽으로 배수로가 설치되어 있으며, 배수로 내부에는 직경 10내외의 작은 할석과 자갈돌이 채워져 있다. 발굴을 담당한 <한국고고환경연구소> 측은 이것이 창고형 구덩이 치고는 지하가 너무 넓고, 구덩이 밑으로 자갈이 깔린 배수로가 있는 데다, 인근에 금강이 위치한 점을 근거로 얼음창고라고 추정하였다. 이것이 백제시대 얼음창고로 최종 확인될 경우, 조선시대 빙고보다 천년 이상 앞선,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가장 오랜 얼음창고라고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충남 공주 정지산 유적에서 조사된 6세기 초에 만들어진 배수로가 딸린 수혈유구를 빙고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삼국시대의 얼음창고의 모습은 일본서기인덕천황 62년조(374)에 나오는 빙실(氷室) 기록을 통해 상상해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빙실은 땅을 1(1: 3m) 정도 파고, 구덩이 바닥에 이엉이나 억새를 깔고 그 위에 얼음을 두고 얼음 위에도 풀을 덮어놓는다.’고 되어있다. 고려시대에는 얼음을 나눠주는 반빙(頒氷) 제도가 정해져, 해마다 6월부터 8월초(입추)까지 벼슬에서 물러난 공신들에게는 3일에 한 번씩, 복야, 상서, , , 대장군 이상에는 7일에 한 번씩 얼음을 나누어주도록 제도화했다. 고려는 얼음을 채취할 때 사한제(司寒祭)라는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고려 시대의 경우 평양속지에 의하면 평양의 석빙고는 내빙고, 외빙고로 나뉘어 내빙고는 사간도무사(四間都務司)의 남쪽 언덕에, 외빙고는 십칠간육로문(十七問六路門) 밖에 있었다. 문종 3(1049)에는 매년 6월부터 8월 초까지 벼슬에서 물러난 공신들에게 3일에 두 차례씩, 좌 복시, 육부상서 등의 고급 관리들에게는 일주일에 한 차례씩 얼음을 나누어주도록 제도화하였다.

하지만 신라나 고려 때 만든 빙고는 지금 남아 있지 않다. 현재 남아있는 경주 석빙고와 안동 석빙고, 영산 석빙고, 창녕 석빙고, 청도 석빙고, 현풍 석빙고도 모두 조선 시대 때 만들어진 것들이다.

석빙고는 외견상 고분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 빙실이라는 공간이 주변 지반과 비교하여 절반은 지하에 있고 나머지 절반은 지상에 있는 구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단순한 형태의 석빙고를 보고 이게 무슨 대단한 과학이 들어있느냐고 반문할 지 모른다. 단지 얼음을 저장하기만 하는 단순한 시설로 보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사막 지대인 이집트나 일부 중동 지역에서 한여름에 얼음을 만들어 먹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석빙고에 대해 더욱 평가 절하하게 마련이다.

조선 시대 태조 5(1396)에 둔지산 밑에 서빙고를 세우고 두모포(豆毛浦)에 동빙고를 세웠다. 조선 시대의 빙고는 정식 관청이었으며, 얼음의 공급 규정은 경국대전에 엄격히 규정될 만큼 얼음의 반빙(頒氷, 공급)은 중요한 국가 행사였다.

빙고는 동빙고와 서빙고가 있었는데 예조의 속아문에서 관장하였고 관원은 제조(提調) 1명과 종5품 별좌(別坐), 6품 별제(別提), 6품 별제, 8품 별검(別檢), 8품 별검, 서리를 4명씩 빙고에 나누어 배치하여, 빙고에서 얼음의 보관과 반출을 관장하는 등 .광무 2(1898)에 양빙고가 폐지될 때까지 500년 가까이 운영되었다.

동빙고에는 얼음 10,244(), 서빙고에 134,974정을 보관했으므로 서빙고가 동빙고보다 13배 이상의 얼음을 저장했다. 실제로 동빙고의 창고는 1동이었던 것에 비해 서빙고는 8동이었다. 한편 빙고는 지금의 서빙고동이라는 이름을 갖게 했지만, 동빙고동은 서빙고의 동쪽에 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일 뿐 빙고(氷庫)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실제의 동빙고는 지금의 옥수동에 해당하는 한강과 중랑천이 만나는 곳에 있었다.

궁궐 안에는 별도로 내빙고를 두어 궁궐의 얼음 수요를 맡았다. 얼음의 보관과 반출은 종6품인 빙고에서 관장했으며 제향에 올리는 얼음은 봉상시에서 맡았다. 동빙고는 음력 31일부터 가을 상강(霜降)까지 왕실의 제사에 필요한 얼음을 공급했으며 서빙고의 얼음은 왕실과 고급 관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한편 18세기 영정조 시대 이후에는 물동량의 왕래가 많았던 한강변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생선 보관용 얼음을 공급하던 사빙고가 한강변에만 30여 개소가 있었다. 이 중 한 곳이 지난 1994년 서울 마포구 현석동의 한 지하실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사설 빙고는 영조정조 시대의 석빙고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단종 2(1454)에 사헌부에서는 국가의 빙고에서 저장하는 얼음에 한도가 있어 신하들에게 골고루 나눠줄 수 없으므로 정1품에서 종4품의 대부(大父) 이상과 각사(各司)에서 얼음을 보관할 수 있게 하자는 상소를 올렸다. 얼음을 받은 개인도 단기간 얼음을 보관할 창고를 두고 제사 등에서 사용했다. 얼음의 저장과 반출은 엄격히 규제됐다. 만약 얼음의 보관을 소홀히 하여 저장한 얼음이 녹아 없어지면 파면시키는 등 엄격하게 관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