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세계문화유산(UNESCO)/경주역사유적지구

경주역사유적지구(59) 석굴암(9)

Que sais 2021. 1. 30. 13:43
728x90

www.podbbang.com/ch/1778869?e=23962338

 

경주 역사유적지구 답사 59 : 석굴암(9)

논문 형태의 에피소드 과학으로 본 불가사의 http://www.podbbang.com/ch/1778472 넛지, 4차 산업혁명 http://www.podbbang.com/ch/1778471 노벨상을 놓친 비운의 천재들 http://www.podbbang.com/ch/1778470 노벨상이 만든 세

www.podbbang.com

<국립문화재연구소장> 김동현 박사는 곧바로 내부 돔의 균열은 이미 1963년 석굴암 중수 당시에도 발견했으나 심각한 상태가 아니므로 지나쳤다고 곧바로 반격했다. 또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에 앞서 실시한 안전진단에서도 석굴암의 안전성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부언했다.

이 설명은 문제의 균열이 외부돔 설치 이전 일제강점기 때 설치한 내부돔이 흙으로 덮여 있을 때 수분 침투와 급격한 온도 변화로 인해 모르타르층이 분리된 결과라는 것이다.

또한 균열 지점의 양쪽 부위가 부등(不等)침하현상을 보이지 않으므로 내부에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므로 <문화재관리국>의 석굴암 보수 공사는 큰 틀에서 콘크리트 내·외부 돔의 누수부분과 목조전실을 설치했다는 설명이다. 원인은 어떠하든 문제는 습기를 전혀 제어하지 못한 불실 공사가 되었다는 점이다.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기계적인 제습장치를 가동하여 탈수 처리하는데 7, 8월에는 하루 1드럼에 이른다. 기계가 고장 난다면 반대로 하루 1드럼의 물이 굴 안에서 결로 현상을 진행시킨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여하튼 학자들의 예상과는 달리 습기 문제가 좀처럼 해결되지 않자 1966년 당국에서는 공기냉각장치를 설치하여 기계적인 방법으로 습기와 온도를 조절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와 같은 결과는 19618, 석굴암 중수를 앞두고 열린 문화재 보존에 대한 토론회에서 사실상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언론가 윤여덕은 적었다. 당시 토론의 주제였던 불상 후면 벽의 심한 습기 제거문제에 대해 초청 연사로 나온 <유네스코문화재 보존연구센터>의 프렌더 라이즈 박사는 벽 하부에서 발견된 두 개의 샘물 수위가 굴의 밑바닥보다 높고 토수관마저 막혀있으므로 막혔던 관을 뚫어 샘물양편 즉 좌우로 물이 흘러내리도록 하면 좋다고 설명했다.

반면에 이태영 교수는 석굴암이 해안에 가깝고 밤낮의 온도차가 심하여 생기는 다습성즉 86퍼센트의 상대습도를 조절하기 위해 밑바닥 아래로 물이 흐르게 하여 불상이나 벽면보다 온도를 낮추어 주요부분을 습기로 보호하는 자연적인 습도조절장치를 만들었으므로 이를 이용하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지하수를 감로수라고 부르는데 바닥의 온도를 벽면의 온도보다 낮게 유지해 불상 표면의 결로 현상을 막아주던 자동 습도조절 장치라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 돔의 바닥 밑으로 샘이 흐르게 하면 자동적으로 바닥 온도가 내려가고 바닥이 차지면 실내의 습기가 바닥에서 이슬로 변하는 간단한 원리를 이용했다는 설명이다.

그밖에도 아치형 천장 위에 위치한 광창 등을 비롯해 석굴암에는 수많은 통풍장치가 있었다고 설명한다. 이에 프렌더 라이즈 박사가 이 교수의 지적에 동조하고 자신에 제출했던 1차 보고서를 수정했다.

그런데 공사는 수정안으로 하지 않고 프랜더 라이즈 박사의 1차보고서대로 진행되었다. 석굴암 내부벽 아래로 흐르는 샘물줄기에서 좌우로 배수로를 파 바깥으로 뽑아내고 이중 돔을 씌웠는데 습도가 줄어들지 않자 문제가 생겼다는 설명이다.

 

<현대 최첨단 공법으로 시공한 돔>

191310월 일본인들이 보수할 때 석굴암을 완전 해체한 후 석벽을 다시 쌓으면서 두께 석 자의 콘크리트를 싸서 발랐음은 앞에서 설명했다. 이 대목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현대의 기적을 들라면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 중에서도 고층 건물을 빼놓을 수가 없다. 미국의 시카고나 뉴욕을 가면 고층 빌딩의 숲으로 싸여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대형 고층 건물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사실 19세기 중순까지 만해도 100미터 이상의 건물은 상상할 수 없었는데 갑자기 전 세계는 고층 빌딩들로 뒤덮이기 시작한 것이다. 고층 빌딩을 세울 수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고층빌딩을 건설할 수 있는 재료인 시멘트와 콘크리트 건축 방법이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시멘트가 굳는 과정은 매우 평범하게 보인다. 그런데 과학적인 측면만 볼 때 너무 복잡해서 학자들이 아직도 그 과정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사실이다. 기본적으로 시멘트는 물을 붓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석회석에서 나온 칼슘과 점토에서 나오는 규소의 혼합물이 물을 흡수하여 젤 형태의 새로운 구조물로 결합한다. 곧바로 긴 결정 섬유가 서로 얽힌 집합은 나머지 물이 증발하면서 응결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서로 결합된 섬유의 망으로 이것이 시멘트 힘의 원천이다. 두 손을 쫙 펴고 손가락들 사이를 벌린 후 손가락들끼리 엮으면 생각보다 단단해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시멘트는 기존 건축 재료인 흙벽돌과는 전혀 다른 개념의 건축 재료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점토가 주성분인 흙벽돌은 물을 섞으면 입자들 속의 빈 공간이 없어지면서 밀도가 높아지고 이후 물이 증발되면서 입자들이 단단해진다. 그러나 시멘트는 수화작용으로 물과 결합하면서 강도를 주는 칼슘실리케이트(CaSiH)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물질을 형성한다. 시멘트가 세월이 지날수록 단단해지는 것은 일단 굳어진 시멘트 속에서도 계속적인 결합작용이 일어나 칼슘실리케이트의 양이 갈수록 늘어나기 때문이다.

시멘트는 원래 건물을 짓기 위해 발명된 것이 아니다. 시멘트는 1756년 영국의 존 스미턴이 발명했는데 그는 흙으로 만든 도자기를 불 속에서 구을 때 단단해지는 것에 착안하여 점토질이 섞인 석회석을 불에 구워 가루를 낸 후 물에 섞었다. 이 재료는 놀랍게도 일단 물기가 사라진 후 시간이 지날수록 더 단단해지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이 재료의 색깔이나 모양이 포틀랜드 섬에 있는 석재와 비슷하여 포틀랜드 시멘트라는 이름으로 명명했다.

1867년 프랑스의 모니에는 흙으로 구워서 만든 질그릇 화분이 자주 깨지자 시멘트와 모래를 섞은 후 물을 넣었다. 예상대로 콘크리트 화분은 매우 단단했지만 콘크리트 화분은 인장력(끌어당기는 힘)에 약했고 역시 잘 부셔지는 단점이 있었다. 이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철사그물을 넣었더니 콘크리트 화분은 매우 견고했다. 모니에가 화분을 견고하게 만드는 것에 만족하는 동안 독일의 바이스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모니에의 특허 중에서 철사 대신에 철근을 넣는다면 보다 강도가 높을 것이며 이 재료로 토목공사에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감추고 모니에에게 접근하여 그의 특허를 산 후 철근콘크리트 공법으로 변형시켰다.

그러나 콘크리트도 다른 건축재료와 마찬가지로 장점과 단점을 다 갖고 있다. 콘크리트는 압축에는 강하지만 전단에는 잘 버티지 못한다. 이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프랑스의 건축기사인 안느비크가 콘크리트에 철근을 넣은 것이다.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면 고층건물도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곧바로 자신의 아이디어를 정리하여 특허로 제출했고 1892년에 특허를 얻었다. 존 스미턴이 시멘트를 발명한지 130년이나 지나서 드디어 시멘트의 대량 사용처를 찾은 것이다.

마침 철근콘크리트는 1871년에 시카고에서 일어난 화재로 시가지의 2/3이 완전히 전소되었는데 19세기 말 미국의 호황에 힘입어 고층 건물을 짓고자하는 건축가들의 모임인 시카고학파의 주목을 끌었다. 설리번을 정점으로 하는 시카고학파는 철근 콘크리트가 고층 건물을 짓는데 적합하다고 생각하자 그들의 새로운 건축에 철근 콘크리트기법을 사용했다. 1913년 울워스 빌딩(55241미터), 1927년 크라이슬러 빌딩(77, 319미터), 1931년에 유명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103, 381미터)가 완공되는 등 20세기를 대표할 수 있는 마천루 시대를 연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 실무자들이 석굴암을 해체 복원하면서 습기로부터 완전하게 차단하고 구조적으로도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가장 안정한 공법을 찾았는데 이때 그들의 주목을 끈 것은 당시 세계적으로 가장 각광받고 있는 최첨단 건축기법 중에 하나인 콘크리트였다. 미국의 시카고에서 시작한 마천루가 철근콘크리트로 만들어지는 당시에 가장 단단한 구조물이자 방수 등에 적격이라는 평가가 있으므로 일본인들이 재빨리 도입한 것이다. 소위 당시로서는 최첨단기술을 석굴암 복원에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당시 과학자들은 시멘트에서 나오는 탄산가스(CO2)와 칼슘(Ca)이 화강석 벽을 손상시킨다는 것을 몰랐다. 최첨단 공법인 콘크리트는 당장에는 가장 단단하고 시공이 편리한 공법으로 각광을 받았으나 화강석과는 상극이라는 것이 추후에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시멘트가 일부 문제점이 있는 재료이기는 하지만 건축재로 절대적딘 장점이 있으므로 시멘트 사용을 중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건축재로서 시멘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은 물론 현대 문명 자체가 시멘트로 큰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재 시멘트의 단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외국의 경우 시멘트로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건설하면 적어도 건물이 준공된 후 23년 동안은 작품을 전시하지 않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