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세계문화유산(UNESCO)/경주역사유적지구

경주역사유적지구(39) 및 계림월성지구 월성

Que sais 2021. 1. 10. 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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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역사유적지구 답사 39 : 계림월성지구 월성

논문 형태의 에피소드 과학으로 본 불가사의 http://www.podbbang.com/ch/1778472 넛지, 4차 산업혁명 http://www.podbbang.com/ch/1778471 노벨상을 놓친 비운의 천재들 http://www.podbbang.com/ch/1778470 노벨상이 만든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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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월성 발굴>

월성(사적 16)은 근래 경주에서 각광받는 지역이다. 그것은 2014년부터 발굴 중인 월성에서 310세기의 무려 10만 점이 넘는 유물·유구가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큰 명문 있는 목간·기와·토기부터 배·방패·그릇·국자·빗 등 목제품, 토우, 금동 장식물, 철제물, 육지와 바다동물 뼈까지 망라한다. 한국 고고학사상 최대 발굴 조사로 불리는데 그만큼 기대가 크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익산 미륵사지 석탑복원에 20년이 걸렸지만 월성은 신라 왕궁이라는 중요도를 보아 30, 50년이 필요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신라사, 나아가 우리 고대사를 다시 써야 할 어떤 유물·유구가 발굴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월성은 101년에 쌓기시작하여 935년 통일신라가 고려에 멸망할 때까지 800여 년 동안 신라 왕들이 있던 곳이다. 그동안 신라시대 왕릉·무덤·사찰터 등은 수많이 조사되었지만 월성은 정작 발굴하지 않았다.

이는 고고학계에서도 엄두를 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신라 멸망 이후 고려를 이어 조선시대에 월성이 방치되었기 때문인데 학자들인 이것이 오히려 큰 덕목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동안 월성터에 대한 변화나 훼손이 없었으므로 오히려 중요한 것이 고스란히 남아있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그 증거가 바로 그동안 발굴된 10여만 점의 출토물이며 더불어 왕궁·관청으로 보이는 건물터들이 확인되었다는 점이다.

신라 건국 후 첫 궁성(宮城)은 박혁거세가 기원전 37년에 쌓은 금성(金城)’인데 그 위치가 어디인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지만 대체로 창림사 터로 비정한다. 그러나 월성이 축조되자 금성이 자연스럽게 쇠락되었으므로 더 이상 금성은 중요시 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여하튼 월성이 신라의 왕궁이 들어섰으므로 월성 안팎으로 왕궁과 각종 행정기관, , 누각 등 여러 용도의 건물이 있었을 것임은 틀림없다.

형이 반달을 닮았으므로 반월성 등으로도 불리지만 일제강점기인 1915년 처음으로 성벽 일부가 발굴된 이후 성벽과 해자 등에 대한 부분적 조사가 이어졌다.

그런데 2014년부터 본격적으로 발굴 조사에 들어가자 해자와 성벽, 내부 일부에서 10여만 점의 유물이 출토된 것이다. 당대에 종이는 매우 귀했으므로 문자를 쓴 목간이 많이 나왔다. 목간 내용은 세금 징수나 행정 명령, 불경, 물품표, 사람 이름과 관직 등 다양하다. 학자들이 주목하는 것은 그중 한자를 우리말로 표기한 이두 등도 보인다는 점이다.

더불어 명문이 있는 토기, 기와는 가치가 더 크다. 막새, 귀면(도깨비)기와 등 여러 종류의 기와가 발견되었는데 귀면기와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당시 격이 높은 건물이 있었음을 뜻한다. 학자들이 주목하는 것은 당시 사용되었음이 분명한 많은 토기들이 쏟아졌다는 점이다. 310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 토기들은 당대 생활문화 연구에 좋은 자료다. 특히 태자가 거처하는 궁을 말하는 동궁(東宮)’, 사람 이름으로 보이는 도부(嶋夫)’ 등 갖가지 명문 토기편들도 발견되었다. 또한 45세기의 가야·일본계 토기와 유사한 토기도 출토돼 이들의 성격 규명도 중요한 과제이다.

학자들은 배·방패 모양은 물론 그릇과 국자, , 건축부재 등 목제품들에 주목한다. 길이 38.6, 5.0, 높이 4.2크기로 실제 배를 축소한 배 모양 목제품도 발견되었다. 방패 모양 목제품은 2점인데 이중동심원·띠 모양을 그린 후 붉은색과 검은색으로 채색을 했다. 의례용으로 보이는데 당시 귀중하게 관리하던 잣나무로 만들어졌다.

당대에 사용한 벼루가 발견되었는데 월성 내부 한 건물터에서만 토제 벼루 120여점이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이는 월성의 건물의 성격을 짐작하게 한다.

발굴팀들은 토성인 월성 성벽의 실체를 규명하는데 주력한다. 지금까지 조사 결과 성벽을 튼튼하게 만들기 위해 석회와 식물성 재료 등을 사용한 것은 물론 성질이 다른 흙을 번갈아 쌓아올렸음을 확인했다.

특히 2017년 서쪽 성벽 기초부분 속에서 1600여 년 전 살았던 50대 남녀 인골 2구가 발견되어 학계를 놀라게 했다. 학자들은 이들 유골이 문헌으로 전해오던 인주 설화의 증거라고 설명한다. 인주란 인간 기둥을 의미하는데 사람을 주춧돌 아래에 묻거나 기둥으로 세우면 건물 등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으로 고려사에도 등장한다. 인골들 발치 쪽에서 5세기 전후 만들어진 토기 4점이 나와 성벽 축조 시기 등도 확인됐다.

흙으로 만든 인물상인 토우들도 흥미롭다. 춤을 추거나 말을 탄 사람, 성기가 강조된 남성, 말이나 염소·돼지 같은 동물상 등 다양한 형태의 토우들은 신라인들 생활의 단면을 엿보게 한다. 토우 중 화제를 모은 것은 터번을 쓴 토우다. 학자들은 고대 중앙아시아를 근거지로 한 상인들로 동서문명을 오간 소그드인으로 본다. 한마디로 5세기 중후반에서 6세기대 제작된 토우는 당대의 신라와 서역의 교류를 보여주는 증거로 제시된다.

이 밖에도 발견된 유물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다.

불교국 답게 월성 안팎에서 금동불상 등 금동장식물이 발견된 것은 물론 도끼·칼 같은 철제물, 가락바퀴·그물추 등 직물 제작이나 어로 활동 관련 유물, 벼와 밀··조 등의 곡류와 복숭아·자두·머루 같은 과실류 등 갖가지 식물의 씨앗도 나왔다.

또한 곰·멧돼지···사슴 같은 육지동물과 상어·돌고래류·참돔 같은 해양생물 뼈도 확인됐는데 이는 신라인의 먹거리가 매우 다양했음을 알려준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월성이므로 발굴단은 그야말로 세심하게 발굴에 임하고 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발굴단은 월성 내부의 경우 A부터 D까지 4개 구역으로 나눈 후 C구역부터 먼저 발굴을 시작했다.

C구역을 먼저 발굴하기 시작한 것은 지하 레이더 탐사에서 건물지가 집중 분포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월성 내부 지층 변화를 파악하기 위해 시굴갱 즉 테스트피트를 조사했는데 지표에서 약 3m 깊이에서 9개 층이 나타났다. 그런데 무려 7개가 자연적 퇴적층이 아니라 인공이 가미된 문화재 층이다. 한마디로 310세기의 유물·유구가 있는 층이라는 뜻이다. 특히 학자들이 주목하는 것은 단 30지표 아래에서도 조선·고려시대 문화층이 없다는 것이다.

통일신라시대 문화층에서는 여러 건물터와 유물이 나왔는데, 특히 3호 건물터는 회랑까지 있는 대규모임이 확인되었다. 또한 우물터도 확인돼 나무 두레박 2점을 비롯, 토기·기와·구슬 등이 발굴됐다.

문헌상으로 볼 때 월성은 소지왕·진평왕·문무왕 등 여러 대에 걸쳐 증축·보수 등이 이뤄졌고, 영토 확장 등으로 행정업무가 급증하면서 월성 바깥에도 건물들이 들어섰으므로 신라 왕궁의 규모는 상당히 확대되는데 이는 이곳에서 어떤 유물·유구가 발굴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월성 발굴조사에 눈길을 줄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한가지 다행한 것은 월성 발굴 현장은 학생과 일반인에게 공개한다는 점이다.

보통 발굴 현장은 엄격히 통제되지만 이곳은 수시로 발굴 현장을 공개하고 발굴 과정과 출토 유물의 해설은 물론 각종 체험행사 등 다양한 대중친화적 프로그램을 운용한다. 특히 밤에는 달빛 아래에서의 특별한 답사도 진행한다.

학자들은 월성 발굴이 언제 끝날지는 알 수 없다고 말한다. 발굴되는 유물·유구 등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데다 무엇보다 시간에 쫓긴 졸속 발굴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이는 경주 월성처럼 1000여 년 동안 손상없이 땅속에 묻혀있었으므로 이들을 철저하게 발굴하여 신라사를 풍부하게 만드는 것이 급선무이기 때문이다.

 

<석빙고>

보물 66호인 경주 석빙고는 월성 안에 위치한다.

학자들은 한국의 수많은 유산 중에서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과학적인 것을 골라 보라면 석빙고를 꼽는 경우가 많이 있다. 현대인들의 기본 가전제품인 냉장고는 얼음이나 냉기를 인공적으로 만드는 기계장치이지만 석빙고는 자연의 순리에 따라 겨울에 채집해 두었던 얼음을 봄, 여름, 가을까지 녹지 않게 효과적으로 보관하는 냉동 창고이다.

단순하게 보면 무덤과 유사한데 과학성이 듬뿍 들어있다는 말에 다소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집 안에 냉장고의 문을 열어 놓으면 얼음이 순식간에 녹는다. 그런데 별도의 기계 장치도 없는데 겨울에 캐서 쌓아 놓은 석빙고에서 한여름까지 얼음이 보관될 수 있다는 것을 알면 남다른 과학성을 이해할 것이다. 석빙고의 과학성을 설명하기 전에 경주 석빙고에 대해 먼저 설명한다.

경주 석빙고는 영조 17(1471)에 만들어진 것으로, 입구에서부터 점점 깊어져 창고 안은 길이 14m, 너비 6m, 높이 5.4m의 규모이다. 남북으로 길게 조영하고, 출입구는 남쪽에 있는데 너비 2.01m, 높이 1.78m이다. 여기에서 계단을 따라 실내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빙실의 밑면도 외부의 형태와 같은 직사각형으로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갈수록 밑바닥은 경사져 있으며, 내부 바닥 한가운데는 경사지게 배수로를 파서 얼음에서 녹은 물이 밖으로 흘러 나갈 수 있도록 하는 등 매우 과학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다.

석빙고는 온도 변화가 적은 반 지하 구조로 한쪽이 긴 봉토 고분 모양이며, 바깥의 외기를 줄이기 위해 출입구의 동쪽이 담으로 막혀 있고 지붕에 구멍이 뚫려 있다. 지붕은 2중 구조로 되어 있는데, 바깥쪽은 단열 효과가 높은 진흙으로, 안쪽은 열전달이 잘되는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내부는 연석(鍊石)으로 5개의 홍예를 틀어 올리고 홍예와 홍예 사이에 길쭉한 네모 돌을 얹어 천장을 삼았다. 벽은 직사각형의 작은 석재로 정연하게 쌓아올렸고, 밑부분은 장대석을 연결하여 지대석(址臺石)을 삼아 견실하게 축조하였다.

장대석이 걸친 곳에는 밖으로 통하는 환기 구멍이 3개가 나 있다. 이 구멍은 아래쪽이 넓고 위는 좁은 직사각형 기둥 모양인데, 이렇게 함으로써 바깥에서 바람이 불 때 빙실 안의 공기가 잘 빠져 나오는 것이다. , 복사열로 데워진 공기와 출입구에서 들어오는 바깥의 더운 공기가 지붕의 구멍으로 빠져나가기 때문에 빙실 아래의 찬 공기가 오랫동안 머물 수 있어 얼음이 적게 녹는 것이다. 환기 구멍은 중심부에서 북쪽으로 치우쳐 시설하였는데, 이것은 입구가 남쪽에 있으므로 안으로 내려가는 층계가 몇 단 있어서 그만큼 자리[]를 차지하고 얼음창고의 주실(主室)은 좀더 깊이 들어간 내부의 북쪽에 있는 까닭이다.

또한 지붕에는 잔디를 심어 태양의 복사열을 차단하였고, 여기에다가 석빙고의 얼음을 왕겨나 짚으로 쌓아 보관했다. 이것은 왕겨나 짚이 단열 효과를 높이기도 하지만, 얼음이 약간 녹으면서 융해열로 주변 열을 흡수하게 되므로 왕겨나 짚의 안쪽이 온도가 낮아져 그만큼 얼음이 장기간 보관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석빙고는 자연 그대로의 순환 원리에 맞추어 계절의 변화와 돌··바람·지세 등을 활용하여 자연 상태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얼음을 오랫동안 저장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러한 시설은 세계적으로도 드문 것으로 조상들의 과학적인 지혜를 듬뿍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석빙고 옆에는 석비가 있어 축조연대를 알 수 있는데, 영조 14(1738)에 축조하였고 4년 후 현위치에 옮겨 개축했다고 적혀있다. 현재 서쪽으로 약 100m 되는 곳에 옛터로 전하는 자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