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으로 돌아간 하멜은 13년간 조선에서의 억류 생활을 생생하게 정리하여 글을 썼다. 하나는 조선에 억류된 기간 동안 급여를 동인도회사에 청구하기 위해 쓴 ‘일지’이고 다른 하나는 보고 듣고 겪은 조선의 풍물에 대한 것이다. 이 글들을 엮어 출간한 책이 『하멜표류기』다.
이방인이 눈으로 본 단상이지만 『하멜표류기』는 조선을 서양에 최초로 소개한 책자로 의의가 깊다. 17세기 조선 사회의 모습과 함께 효종과 현종이 표착 서양인에 대해 취한 정책을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는데 인조에게 사약을 받아 죽은 소현세자 부인 민회빈 강씨에 대한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다.
‘왕이 버린 선고에 복종하지 않고 트집을 잡으면 사형이다. 우리가 조선에 있을 때 이와 유사한 사건이 있었다. 왕의 형수인 민회빈 장씨가 바느질을 잘해 왕이 예복을 한 벌 만들라고 했다. 그녀는 왕을 경멸하므로 예복 안감에 주술용 약초를 넣어 꿰맺는데 이런 연유로 왕이 그 옷을 입을 때는 언제나 불길했다. 왕이 옷을 조사해보라고 명령했는데 옷을 뜯어보니 사악한 물질이 발견되었다. 왕은 그녀를 구리 마루로 된 방에 감금한 뒤 불을 지펴 죽였다. 당시 양반 출신의 관위 관료이며 궁에서 매우 존경받고 있었던 그녀의 친척 한 명이 지체 높은 여자를 다른 방법으로 처벌할 수 있는데도 형벌이 너무 가옥하다는 상소를 올렸다. 상소를 읽고 왕은 그를 소환해 하루에 정강이를 120대 때리게 한 후 참수했으며 그의 전 재산과 노비를 몰수했다.’
이 글은 하멜이 조선에 오기 7년 전에 일어난 일로 하멜의 이 글은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리다. 민회빈 강씨가 왕에게 죽임을 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를 죽인 왕은 시동생인 효종이 아니라 시아버지인 인조였다. 인조는 민회빈을 자신의 음식에 독약을 넣었다는 혐의를 씌워 사약을 내렸다. 여하튼 하멜의 글은 조선 사회에서 민회빈의 죽음이 어떻게 알려주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하멜표류기』에는 조선인들의 수학실력을 알려주는 매우 흥미로운 내용이 나온다.
‘그들은 우리 네덜란드의 계수기처럼 긴 막대기로 계산을 한다. 그들은 상업 부기를 모른다. 무언가를 사면 그 매입 가격을 적고 그 다음에 판매 가격을 적는다. 이를 통해 그들은 얼마나 이익이 났는지 손해가 났는지를 알게 된다.’
여기서 하멜이 말한 것은 조선인들의 계산 도구인 긴 막대기는 산가지 즉 산목이나 산대를 뜻한다. 숙종대에 영의정을 지낸 최석정은 1700년에 발간한 『구수략』에서 산가지 계산법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다. 최석정은 병자호란 때 청과의 강화를 주장한 최명길의 손자로 과거에 급제하여 승문원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영의정까지 지냈다. 그는 소론의 우두머리로 치열한 당파싸움의 중앙에 있었음에도 약 10여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다. 그런 그가 정치에서 물러나 우리나라 수학 역사상 몇 안 되는 수학책을 저술한 것이다.
『구수략』은 전문 산학가가 아닌 정치 행정가가 쓴 책이지만, 서양 수학을 최초로 조선에 소개한 수학책이기도 하다. 수의 기원과 근본, 분수를 나타내는 방법과 그 예산, 규칙을 가지고 더해지는 급수의 합, 연립방정식 등을 담고 있다. 또 덧셈, 뺄셈, 곱셈을 하기 위한 산가지의 모양과 산가지를 늘어놓는 방법을 설명한다.
이 책은 갑, 을, 병, 정의 4편으로 나뉘는데 부록인 정편은 문산(文算), 주산(籌算) 등의 새로운 산법 및 마방진의 연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통론사법’은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에 대한 내용인데 곱셈구구와 이를 산가지로 나타내는 방법도 적혀있다. 오늘날 우리가 암기하는 곱셈구구가 이미 조선시대에도 있었던 것이다.
『구수략』의 흥미로운 점은 산가지 계산법을 그림으로 나타내면서 예제를 들어 일일이 그 알고리즘을 설명하고 있다.
‘직사각형 모양의 밭의 길이는 36보이고 너비는 24보이다. 넓이는 얼마인가?’
학자들이 『구수략』을 크게 평가하는 것은 오늘날 마방진이라 부르는 내용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마방진은 동양 수학에서 자연수들을 다각형이나 원과 같은 형태로 배열해 도식화하는 것이다. 즉 ‘마방진(魔方陣, magic square)’이라는 용어의 뜻을 풀면 마술적인 특성을 지닌 정사각형 모양의 숫자 배열이 된다. 보다 정확하게 정의하면, n차 마방진이란 1부터 n2까지의 연속된 자연수를 가로, 세로, 대각선의 합이 같아지도록 정사각형 모양으로 배열한 것이다.
2011년에 방영된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도 마방진이 나온다. 한글창제를 앞두고 벌어진 집현전 학사(學士)의 가상의 살인사건을 중심으로 하는 드라마로, 초반에 마방진이 등장한다. 태종 이방원과 세종이 서로 다른 성향을 지닌 인물로, 마방진을 대하는 태도 역시 상반된다.
세종은 33방진까지 확장하면서 마방진을 풀려고 몰두하고 있는데, 이방원은 그런 세종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래서 방진은 그냥 방진이라 하지 않고, 마귀 마(魔) 자를 붙여서 마방진이라 하는 게지요. 마귀에게 홀린 듯 한번 빠지면 나올 수 없기 때문이지요.’
마방진의 중독성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이는 마방진이 상당한 파급력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면서 이방원은 33방진도 그리 어려워 못 푸는데 몇십 만 방진인 세상일은 어찌 풀겠느냐고 말하면서 명료하게 말한다.
‘비웃는 것들, 방해되는 것들을 없애고 단 하나로 힘을 모으는 것, 그게 나 이방원이다.’
이방원의 철학이 들어있는데 마방진이 이방원의 권력욕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될 정도로 조선인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동양 수학에는 자연수들을 다각형이나 원과 같은 형태로 배열해서 도식화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 기원을 이루는 하도낙서(河圖洛書)는 음향오행 사상의 기본 원리를 함축한다. 특히 낙서는 오락 수학의 큰 줄기를 이루고 있는 마방진의 효시가 되었다.
최석종은 하도에서 홀수를 천수로, 짝수를 지수로 분류하였다. 낙서는 1에서 9개까지의 점의 무리로 이루어진 것으로 오제 가운데 한 사람인 우임금이 황하의 상류인 낙수에서 치수 사업을 할 때 나타난 거북이의 등에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그 거북이 나온 이후 홍수가 그친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우왕이 무늬에 대해 알아보게 한 결과, 거북의 등에 새겨진 그림은 1부터 9까지의 숫자를 점의 개수로 나타낸 것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 숫자의 배열이 가로나 세로, 대각선으로 더할 경우 항상 합이 15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를 수로 나타내면 9개의 수를 정사각형으로 배열한 마방진을 얻는다. 이것이 바로 마방진의 시초로서,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낙수로부터 얻은 하늘의 글이라는 뜻으로 ‘낙서(洛書)’라는 이름을 붙이고 아주 귀하게 여겼다.
마방진은 동양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동양의 기본 사상은 음양오행이고 거북이 등에 있는 숫자들이 오행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동양에서 특히 마방진을 매우 중요시했는데 특히 중국에서는 마방진을 활용하여 달력을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마방진은 농사를 지을 때 씨앗을 뿌리는 방법이나 귀신을 물리치는 부적으로도 사용했다고 한다.
최석정의 『구수략』의 놀라움은 독창성에 있다. 그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지수용육도와 지수귀문도다. 지수용육도는 1부터 20까지의 수를 한 번만 사용하여 육각형 5개의 각 꼭짓점에 놓아 수의 합이 모두 63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지수귀문도는 보다 복잡한데 1부터 30까지의 수를 한 번만 사용하여 육각형 9개의 각 꼭짓점에 놓이는 수의 합이 모두 93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가지는 중국의 수학 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다. 이러한 마방진은 단순한 수학적 놀이에 불과해 보이지만 이를 풀려면 수학적으로 많은 생각을 해야 한다. 이는 수학적 사고력을 확장하는 중요한 관건으로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수학을 즐겨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로도 제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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