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세계문화유산(UNESCO)/조선왕릉

조선 왕릉(78) : 제4구역 영녕릉(4)

Que sais 2021. 4. 14.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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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다른 효종과 송시열>

문제는 효종의 바람과 달리 송시열은 북벌론을 실현에 옮길 인물은 아니었다. 효종의 결연한 북벌 정책에 동조하지 않고 격물치지(格物治知)를 이야기하며 치국 이전에 수신(修身)이 먼저라고 다그쳤다. 마음 수양과 민생 안정이 우선이라는 것으로 군신관계였던 명을 파멸시킨 청에 대해 관념적인 복수심은 있어도 현실적으로 복수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인식으로 효종의 북벌에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효종이 이를 모를리 없으므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씻기 어려운 수치심이 있는데도 모든 신하들이 이를 생각하지 않고 매양 나에게 수신(修身)만을 권하고 있으니 이 치욕을 씻지 못하면 수신만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효종이 즉위 5년경에 발표한 교서의 내용이다. 이 말은 효종의 북벌에 대한 생각은 단호했지만 그가 원하는 북벌을 뒷받침해주는 정치 세력이 부재했음을 알려준다.

이런 차이는 두 사람의 북벌론은 목표는 같았지만 목적이 달랐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효종이 송시열과의 정치적 제휴를 통해 사림세력의 반발을 억제하고 이들 세력들을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는데 북벌을 이용했다고 믿는다. 반면에 송시열은 북벌은 가당치 않은 일이라 염두에도 없지만 효종의 지지를 앞세워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데 열성을 다했다는 것이다. 즉 효종은 송시열을 전면에 내세워 불안한 정국과 민심을 추스르려 했고, 재야의 영수인 송시열은 자신의 기반인 서인들을 등용하는데 앞장섰다는 것이다.

사실 현실적인 면으로 볼 때 효종의 북벌은 상당한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 전쟁에 지친 백성들이 북벌에 회의적이었던 점이다. 임진왜란과 두 차례의 호란을 경험하면서 전쟁의 참상과 기근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북벌 준비를 위한 정부의 군비 증강과 재정 부담에 고통을 받았다. 한마디로 북벌에 필요한 모든 것을 부담하는 것은 백성들이었다.

 

효종 어필

더구나 이미 멸망한 명나라를 위한 복수는 명분에서도 큰 호소력을 갖지 못했다. 중국에서 이미 명나라 잔존 세력이 거의 사라지고 청나라가 확고하게 중원의 지배자로 자리 잡고 있었다. 더구나 청나라의 감시도 북벌 준비의 장애 요소로 다가왔다. 청나라는 수시로 조선을 시찰하면서 군사력 증대를 억제했고, 산성 수축 등 군비 증강 사업을 어김없이 감시했다.

이런 어려움이 있지만 북벌에 대한 효종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효종은 북벌을 위해 송시열과 단독 면담했고 그 내용이 송시열의 문집 악대설화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효종이 10년을 기한으로 군사 훈련과 군장비, 군량을 비축해 조선과 국민들이 일치단결하고 군사 10만 명을 양성한 뒤, 틈을 타 명과 내통해 기습하고자 한다

 

그러나 송시열은 북벌을 위해서는 내수가 필요하고 내수를 위해서는 학문에 전념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말을 견지했다.

결론을 말한다면 효종의 생각과는 달리 청나라는 갈수록 강성해지는데다 대신들의 비협조와 재정 빈약 등으로 청나라에 당한 한을 설욕할 북벌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즉위한 지 10년만인 16595, 41세의 나이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사망했다. 한마디로 북벌이라는 효종의 생각은 더 이상 구체화되지 못한 채 꿈에 그치고 말았다는 뜻이다.

다소 놀랍지만 효종의 사인은 종기였다.

효종의 얼굴에 난 종기의 치료를 놓고 침으로 피를 빼내어 독기를 제거하자는 신가귀와 머리에 경솔히 침을 놓을 수 없다는 유후성의 의견이 나뉜다. 그러나 효종이 신가귀의 의견을 취하여 침을 놓았는데침구멍에서 피가 쏟아져 왕이 이제 정신이 좀 든다가귀가 아니면 큰일날 뻔했다라 말했다.

그런데 침구멍으로 계속 피가 나왔는데 이는 침이 혈락(血絡) 즉 피부에 있는 동맥과 정맥, 모세혈관을 범했기 때문이었다. 빨리 피를 멈추게 하는 약을 발랐는데도 피가 그치지 않았다. 제조와 의관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데 효종이 삼공과 송시열과 송준길, 약방제조를 부르라고 명했다. 승지·사관과 여러 신하들도 뒤따라 들어갔지만, 효종은 이미 사망한 후였다.

효종이 사망하자 책임자 신가귀는 참형이 아니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조선의 형법에서 교수형은 시신을 보존할 수 있으므로 같은 사형이라도 참형에 비해 온건한 형벌이었다. 참고로 신가귀의 처형은 조선사에서 국왕이 사망한 후 어의가 직접적으로 처벌받은 사실상 유일한 사례다

그런데 효종실록을 보면 신가귀가 어의인 것은 분명하지만 침조차 제대로 놓을 줄 모르는 의사였다고 한다. 더불어 수전증도 있었다고 한다.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침도 제대로 놓지 못하는 수전증 의사가 어의였고 그래서 사망했다는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이 가지않는 사인인데 이에 대해서는 다른 이야기가 있다.

현종실록에 의하면 효종이 과거 신가귀가 수전증이 있음에도 침을 잘 놓았다는 평가를 한 것을 보면 침놓는 솜씨가 나빴다고 볼 수 없으므로 신가귀를 불러 침을 놓게 했던 것이다. 예전부터 수전증이 있던 신가귀는 당시 효종을 치료할 때 본인 역시 오랜 병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이러한 상황이 겹쳐 혈락을 범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있다

효종이 죽었지만 그의 사망 후에도 북벌의 사상적 이념은 조선 사회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조선은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멸망한 명나라의 마지막 연호인 숭정(崇禎)을 사용했다. 또한 북벌의 논리는 중화 문화의 중심이 조선에 있다는 소중화사상’, 나아가 조선중화사상으로 발전했다.

학자들은 북벌이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민족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논리로 발전했지만, 이념과 명분에 너무 몰두하여 결국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한마디로 조선에서 북벌의 이념에서 해방돼 북학(北學) 사상이 자리잡기까지는 꼬박 100여년의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효종대에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16537월 하멜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무역선 스페르웨르호를 타고 64명의 일행과 함께 자바섬과 대만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로 향했다. 불행하게도 하멜 일행은 815일 풍랑을 만나 제주도 산방산 근처 해안에 상륙했다.

 

하멜일행의 행로

이들을 발견한 백성은 즉시 제주 목사에게 사실을 고했고, 생존자 38명은 제주 관원에 의해 체포됐다. 제주 목사 이원진(李元鎭)은 그들을 심문한 후 효종에게 보고했다. 효종실록에는 당시 상황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배 한 척이 고을 남쪽에서 깨져 해안에 닿았기에 대정 현감 권극중과 판관 노정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보게 했더니,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배가 바다 가운데에서 뒤집혀 살아남은 자는 38인이며 말이 통하지 않고 문자도 다릅니다. 배 안에는 약재·녹비(鹿皮) 따위 물건이 많이 실려 있었습니다. 이들의 생김새는 파란 눈에 코가 높고 노란 머리에 수염이 짧았는데, 혹 구레나룻은 깎고 콧수염을 남긴 자도 있었습니다. 그 옷은 길어서 넓적다리까지 내려오고 옷자락이 넷으로 갈라졌으며 옷깃 옆과 소매 밑에 이어 묶는 끈이 있었으며 바지는 주름이 잡혀 치마 같았습니다. 왜어(倭語)를 아는 자를 시켜 묻기를 너희는 서양의 크리스천(吉利是段)인가?’ 하니, 다들 야야(耶耶)’라고 답했습니다. 우리나라를 가리켜 물으니 고려(高麗)라 하고, 본도(本島)를 가리켜 물으니 오질도(吾叱島)라 하고, 중원(中原)을 가리켜 대명(大明)이라고 했습니다. 이어서 가려는 곳을 물으니 낭가삭기(郞可朔其·나가사키)라 했습니다.‘

 

위 기록을 통해 하멜 일행은 조선을 고려, 청나라를 명나라로 잘못 알고 있었다는 점과 최종 목적지는 일본의 나가사키였음을 알 수 있다. 하멜이 귀국하여 발간한 하멜표류기에는 ‘70세가량 된 목사가 선량하고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며 서울 출신으로 조정에서도 상당한 신망을 받고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원진 목사가 이들에게 우호적으로 대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멜이본조선(하멜표류기)

이들보다 약간 먼저인 1627년에 역시 제주도에 표류한 뒤 조선으로 귀화한 네덜란드의 벨테브레(Weltevree) 즉 박연이 한양에서 내려와 하멜 일행의 통역을 맡았다. 벨테브레는 다음과 같은 효종의 지시를 전했다.

 

우리는 외국인을 나라 밖으로 보내지 않는다. 그대들을 보호해주겠으며 적당한 식량과 의복을 제공해 줄 테니 이 나라에서 여생을 마치라.’

 

효종이 하멜을 돌려보내지 않은 이유는 다름 아니다. 한창 북벌 준비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 내부 사정을 외부에 알리는 것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반면에 하멜 일행은 지속적으로 탈출 계획을 세웠고 효종 6(1655) 일행 중 2명이 조선을 방문한 청나라 칙사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청나라 칙사가 귀국하는 길목에 숨어 있던 2명은 조선 옷 대신 네덜란드 복장을 하고 갑자기 나타나 자신들의 억울함을 토로했다. 이 탈출 사건은 효종이 칙사에게 뇌물을 주면서 없던 일이 됐지만, 탈출을 시도한 2명은 수감됐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이 사건 이후 이들을 전라도 병영(兵營)에 분산 수용했다.

1659년 효종이 사망한 후에도 하멜 일행의 처리 문제는 조정의 골칫거리였다. 현종 3(1662) 현종은 생존해 있던 22명을 여수에 12, 순천에 5, 남원에 5명씩 나눠 보냈다. 하멜은 여수로 보내져서 힘든 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틈틈이 탈출을 시도하여 1666년 일행 중 13명이 여수를 탈출해 나가사키를 거쳐 1668년 고국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