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영릉(寧陵)
세종대왕릉에서 약 500미터 지점에 제17대 효종(1619〜1659)과 인선왕후(1618〜1674) 정씨의 쌍릉인 영릉(寧陵)이 있다. 그러므로 두 능을 합하여 영녕릉(英寧陵)이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세종대왕릉만 알려져 있는데 덤으로 또 한 릉을 볼 수 있는 셈이다.
효종은 1619년 인조의 둘째아들로 봉림대군에 봉해졌고 12살에 한 살 위인 신풍부원군 장유의 딸인 인선왕후 덕수 장씨와 가례를 올려 1남 6녀를 두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피신했으나 1637년 인조가 청 태종에게 삼전도에서 항복하자 볼모로 소현세자와 함께 심양(瀋陽)으로 잡혀간다.
이후 그는 청나라에 이끌려 서쪽으로는 몽골, 남쪽으로는 산해관과 금주위(錦州衛), 동쪽으로는 철령위(鐵嶺衛), 동북쪽으로는 여해부(如奚部)까지 따라다니며 몰락의 길을 걷는 명나라 군대가 청나라에 의해 격파되는 장면을 목격한다. 청나라가 산해관을 공격할 때 소현세자의 동행을 강요하자 자신이 대신 가겠다고 고집하였고, 서역을 공격할 때에도 소현세자와 끝까지 동행하여 그를 보호했다.
청에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대동케 한 것은 조선의 왕자이므로 이렇게 강한 청나라를 조선은 엄두도 내지 말라는 일종의 교육 및 협박용이다. 청나라에 볼모로 잡힌 지 8년 만인 스물여섯 살에 귀국하지만 또 다시 청나라에 소환돼 이번에는 명나라의 수도 북경이 불에 타면서 명나라가 망하는 장면을 참관했다.
1645년 소현세자가 귀국한 뒤에도 그대로 청나라에 머물러 있다가 세자가 급서하자 곧바로 귀국하여 김자점의 주도로 세자로 책봉된다. 그러나 그의 세자 책봉에는 약점이 있는데 적장손인 소현세자의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효종은 자신을 왕세자로 명한 성명을 거두고 소현세자의 아들인 원손을 왕세손으로 할 것을 울면서 간청하였다. 『인조실록』 인조 23년 윤6월 4일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신은 어리석고 불초하여 뭐 하나 쳐줄 만한 것도 없는 위인이 집에 있으면서 봉록만 먹는지라, 항상 그 과실이 위로 성명(聖明)의 걱정을 끼치게 될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꿈속에서도 생각하지 않게 천만 뜻밖으로 갑자기 신을 세자의 자리에 올리시는 전교를 내리시니, 신은 가슴을 치도록 망극하여 몸둘 곳이 없어서 밤낮을 쉬지 않고 놀라 부르짖어 울다가, 이렇게 궁박한 정황을 하소연할 곳이 없었으므로, 부득이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번거롭게 말씀을 드립니다. 선 세자(소현세자)가 오랫동안 동궁에 있다가 이제 막 서거하였고, 원손의 칭호는 온 나라 사람이 우러러 아는 바입니다. (중략) 신에게 어찌 종묘 사직의 명을 받들 수 있는 조금의 재덕(才德)이나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하건대, 하늘 같이 인자하신 성상께서 신을 곡진히 긍휼하게 여기시어 속히 성명(成命)을 거두셔서, 이 불초한 몸으로 하여금 거듭 큰 죄에 빠져 귀신과 사람을 실망시키게 하지 말아주시기를 지극히 바랍니다.’
인조는 맏형이 죽으면 그 다음 아우가 계통을 잇는다며 사양하지 말고 더욱 효제(孝悌)의 도리를 닦아 형의 자식을 마치 효종의 자식처럼 보살피라고 말하면서 세자 책봉을 그대로 밀어부쳤다. 효종은 27세의 나이로 세자의 자리에 올랐고 1949년 인조가 사망하자 왕으로 즉위했다. 왕위에 오른 효종은 청나라가 기대한 ‘동방의 착한 왕’이 되기를 거부하고 정반대로 청나라를 치는 ‘북벌(北伐)’을 계획한다. 효종의 재위 10년간 기본 정책은 ‘숭명배청(崇明排淸)’과 청나라에 당한 수치를 복수하고 설욕하는 ‘복수설치(復讎雪恥)’를 기조로 북벌을 위한 군사력을 증강시켰다. 왕위에 오른 뒤부터는 좋아하던 술도 일체 끊고 심기일전, 복수설치의 의지를 다져나갔다.
효종은 북벌을 대의로 내세우면서 김상헌의 제자로 유배 중이던 조석윤을 동지중추부사로 등용하고 송시열을 이조참의로 등용하는 등 여러 가지 개혁을 시도했다. 효종은 또 흐트러진 경제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김육 등의 건의로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했고 아울러 서양역법인 시헌력을 반포하여 개력(改曆)을 단행했다.
또한 표류해 온 네덜란드인 하멜(Hamel, H.) 일행을 훈련도감에 수용해 조총·화포 등의 신무기를 개량하고, 이에 필요한 화약용 염초(焰硝) 생산에 주력했다.
문제는 효종의 바람과 달리 송시열은 북벌론을 실현에 옮길 인물은 아니었다. 효종의 결연한 북벌 정책에 동조하지 않고 격물치지(格物治知)를 이야기하며 치국 이전에 수신(修身)이 먼저라고 다그쳤다. 마음 수양과 민생 안정이 우선이라는 것으로 군신관계였던 명을 파멸시킨 청에 대해 관념적인 복수심은 있어도 현실적으로 복수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인식이다.
이런 차이는 두 사람의 북벌론은 목표는 같았지만 목적이 달랐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효종이 송시열과의 정치적 제휴를 통해 사림세력의 반발을 억제하고 이들 세력들을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는데 북벌을 이용했다고 믿는다. 반면에 송시열은 북벌은 가당치 않은 일이라 염두에도 없지만 효종의 지지를 앞세워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데 열성을 다했다는 것이다. 즉 효종은 송시열을 전면에 내세워 불안한 정국과 민심을 추스르려 했고, 재야의 영수인 송시열은 자신의 기반인 서인들을 등용하는데 앞장 섰다는 것이다. 결론을 말한다면 효종의 생각과는 달리 청나라는 갈수록 강성해지는데다 대신들의 비협조와 재정 빈약 등으로 청나라에 당한 한을 설욕할 북벌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즉위한 지 10년만인 1659년 41세의 사망한다.
<효종의 북벌>
1645년 소현세자가 귀국하자마자 의문의 죽음을 당한 후 봉림대군이 뜻하지 않게 세자로 책봉됐다. 소현세자에게 세 아들이 있었지만, 인조는 봉림대군에게 왕위를 계승시켰다.
1649년 인조가 사망하고 왕위에 오른 효종(1619~1659년)은 자신이 왕이 된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삼전도 굴욕을 안겨준 청에 대한 복수를 해야 한다는 것으로 바로 복수설치(復讐雪恥)다. 자신이 소현세자를 제치고 왕이 되었으므로 그는 즉위 직후 북벌(北伐)을 표방하고 재위 기간 내내 북벌만 추진했다. 그 바탕에는 ‘숭명반청(崇明反淸)’이 기본이다.
효종의 재위 10여 년은 조선 역사에서 매우 특이한 기간으로 그는 국가의 기본 정책을 북벌로 삼았다. 현재도 북벌이라면 효종을 떠올린다.
효종의 이와 같은 생각은 심양에서 남다른 애환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중국 사정과 지형도 면밀히 관찰했다. 이런 경험이 북벌에 대한 바탕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문제는 북벌하겠다고 말만으로는 될 일은 아니다.
우선 조선은 청과 공식적인 평화협정을 맺고 있었는데 조선의 군사시설 특히 조선 내 산성을 구축하거나 정비하려면 청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때문에 공식적으로 북벌을 준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효종실록』에 북벌에 대한 논의가 거의 기록되지 않은 이유다. 물론 효종의 끈질긴 북벌 계획은 여러 면으로 포착된다. 효종과 훈련대장 이완(李浣)의 이야기다.
효종이 우리나라 군졸은 갑옷을 입지 않아 갑자기 적을 만나면 화살과 돌을 막기 어렵다. 나무 방패를 활용하면 좋을 것 같다고 하자 이완은 나무 방패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대안을 제시했다.
‘나무 방패는 갖고 다니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신은 군인들이 각기 하나의 큰 무명 자루를 소지했다가 급박할 때에 흙을 담아 쳐들어오는 형세를 방어한다면 나무 방패보다 못하지 않을 것으로 여깁니다’
효종은 명나라 장수 장춘(張椿)의 군대가 무명 자루를 소지했다가 넓은 들판에서 오랑캐의 기마병을 만나면 흙을 자루에다 넣어 보루(堡壘)를 만들자 오랑캐 군사가 감히 핍박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효종은 즉위하자마자 김자점 등 친청파를 제거하고 김상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 반청 척화파를 등용했고 김상헌의 제자로 유배 중이던 조석윤을 동지중추부사로 등용하면서 여러 가지 개혁을 시도했다. 효종은 또 흐트러진 경제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김육 등의 건의로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했고 아울러 서양역법인 시헌력을 반포하여 개력(改曆)을 단행했다.
또한 표류해 온 네덜란드인 하멜(Hamel, H.) 일행을 훈련도감에 수용해 조총·화포 등의 신무기를 개량하고, 이에 필요한 화약용 염초(焰硝) 생산에 주력했다. 이와 동시에 효종은 중앙 상비군인 훈련도감을 강화하고 북벌 추진의 중심 기구로 어영청(御營廳)을 설치한 후 이완을 어영대장으로 삼았다.
이완은 효종과 코드를 맞추며 북벌을 추진한 유일한 인물로 알려진다. 그가 현종 때까지 무려 16년이나 훈련대장을 역임한 것도 이에 무관하지 않다. 효종은 병자호란 때 참전 경험이 있으며 평안도, 함경도의 병마절도사를 지낸 경험을 중시했다. 한마디로 효종의 뜻에 따라 전투를 치룰 담당자라 볼 수 있는데 이완도 이를 알고 자신이 사망하면 효종의 무덤 인근에 묻어달라고 했다. 실제로 현재 이완의 무덤은 효종의 무덤이 있는 경기도 여주 영릉(寧陵) 인근에 조성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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