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녕은 태종이 죽고 세종이 즉위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구설수에 올랐다. 지정된 주거지에서 탈출해 사냥하기, 국상 때 술 마시고 놀기, 남의 첩과 간통하기 등 과거의 행보를 지속했다. 여하튼 충녕이 왕위에 오른 후 양녕에 대한 문제는 계속 불거졌다. 심지어 양녕이 군사를 동원하여 한양을 점령하려한다는 유언비어조차 나돌았는데 그것은 양녕이 충녕에게 불만이 있었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세종 치세에 양녕은 항상 ‘뜨거운 감자’였다. 실제로 세종은 양녕을 극형에 처하기를 원하는 신하들의 상소에 시달리느라 병이 들 지경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끝까지 양녕을 두둔하며 처벌하지 않았다.
태종이 사망했을 때 양녕은 경기도 이천에 귀양살이하고 있었는데 슬퍼하지도 않고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소주를 마셨다. 이천군수가 이날 소주를 마신 동네 사람들을 잡아다 벌을 주었는데 양녕은 화가 나서 세종에게 글을 올렸다. ‘이천군수를 처벌하시오. 그러지 않으면 형제간 정의가 끊길 것이오.’라고 위협했다. 세종은 묵묵부답했다.
오히려 세종은 양녕을 서울 동쪽 대궐 밖까지 나가 맞아 들여 연회를 베풀어 위로하였다. 이때 대간들이 맹렬히 반대하였으나 세종은 이를 무릅쓰고 동생이 형에 대해 해야 할 도리를 다하는데 나쁠 것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세종이 김종서에게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만일 차례로 말하면 바로 내 자리가 양녕이 앉아야 할 자리 아닌가. 그런데 양녕 형님은 지금 시골에서 적적하게 귀양살이를 하고 있네. 더구나 일반 백성의 경우라도 형제 사이에는 잘못한 것을 서로 덮어 주고 잘한 것을 드러내줄 뿐 아니라 뇌물을 써서라도 끌어내주는 법인데 하물며 내가 일국의 왕으로서 형제간에 백성만 못한 짓을 해서야 되겠는가. 경은 이 뜻을 알아서 여러 사람에게 타이르라. 나는 형을 서울로 모셔서 만나 보도록 하겠다.’
세종과 양녕대군에 대한 일화는 이뿐이 아니다. 양녕대군이 평안도를 유람하게 되는데 서울을 떠날 때 세종과 작별인사를 했다. 세종은 형인 양녕대군에게 여색을 조심하라며 몰래 평안도 관찰사에게 만일 양녕대군이 기생을 가까이 하거든 즉시 그 기생을 역마에 태워 서울로 올려 보내라고 하였다.
양녕은 세종과의 약속도 있고 해서 가는 곳마다 기생의 수청을 물리치고 근신하였다. 그런데 평양북도 정주에 이르렀을 때 양녕의 마음을 사로잡는 절세의 미인이 나타났다. 양녕은 이 여인을 보는 순간 첫눈에 반했고 그날로 동침하고 나서 귀신도 모르리라 자신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주었다.
‘아무리 달이 밝다 하나 우리 두 사람의 베개를 들여다보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밤바람은 어이해서 신방을 가린 엷은 휘장을 걷어 올리는가.’
이튿날 정주수령은 이 기생을 역마에 태워 서울로 올려 보냈다. 세종이 그녀에게 양녕대군이 읊은 시를 노래로 불러 익혀두라고 하였다. 양녕은 이런 사실도 전혀 모르고 유유히 서울에 돌아와 세종을 알현했다. 세종이 자신이 신신 당부한 말씀은 잘 지켜주었느냐고 묻자 양녕은 어찌 어명을 어기겠느냐며 한 번도 여색을 가까이 한 일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세종은 정말로 수고했다며 그의 노고를 덜어주고자 가무를 준비하였다고 했다. 양녕은 기생이 나와 노래하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누군지 몰랐는데 가사를 들어 보니 자신이 지은 시구였다. 깜짝 놀란 양녕이 그만 땅에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 세종은 웃으며 뜰에 내려와 형님의 손을 잡고 위로하면서 그날 밤 그 기생을 양녕 댁에 보냈다. 양녕과 세종의 우의가 아니면 당대에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여하튼 세종과 양녕대군 간의 문제는 『세종실록』 세종 28년(1446) 4월에 정확하게 나온다. 효령대군이 회암사에서 불사를 짓는데 양녕대군이 들에 가서 사냥하여 잡은 새와 짐승을 사찰 안에서 구웠다. 효령이 지금 불공(佛供)을 하는데 이렇게 하면 안 되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러나 양녕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처가 만일 영험이 있다면 자네의 오뉴월 이엄(耳掩)은 왜 벗기지 못하는가. 나는 살아서는 국왕의 형이 되어 부귀를 누리고, 죽어서는 또한 불자(佛者)의 형이 되어 보리(菩提)에 오를 터이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이 말이 『세종실록』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이에 대해 세종이 문제를 만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내용이 또한 『성종실록』의 효령대군 졸기에도 등장한다.
‘이보(李𥙷)가 일찍이 사찰에 예불하러 나아갔는데, 양녕대군 이제가 개를 끌고 팔에는 매를 바치고는, 희첩(姬妾)을 싣고 가서 절의 뜰에다 여우와 토끼를 낭자하게 여기저기 흩어 놓으니, 이보(李𥙷)가 마음에 언짢게 여겨, 이에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형님은 지옥이 두렵지도 않습니까?’
이에 이제가 말했다.
‘살아서는 국왕의 형이 되고 죽어서는 보살의 형이 될 것이니, 내 어찌 지옥에 떨어질 이치가 있겠는가?’
『세종실록』과 『성종실록』에 동일한 내용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이런 일화가 널리 퍼져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태종은 서슴없이 형제를 죽였다. 이후의 조선 왕들도 이에 다르지 않다. 그러나 세종은 그러하지 않았다. 이 문제에 관한 한 학자들의 의견이 나뉘지만 세종이 조선 건국 후 수많은 피로 피를 씻는 정치는 자신 대에서 끝내야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 주류다. 한마디로 정치 보복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하튼 양녕의 수명은 유난히 길어서 세종 일가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모두 보았다.
32년을 재위한 세종의 죽음, 2년에 불과한 문종의 재위와 죽음 그리고 단종의 즉위와 폐위는 물론 사사되었을 때도 살아있었다. 잘 알려진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후 죽음으로 몰아가게 한 것은 세종이 사망한 후 얼마되지 않아서다. 이 당시에도 양녕대군은 살아있었고 그는 조선 시대인으로는 장수하여 세조 8년(1462)에 사망했는데 그의 나이 69세다.
그는 수양대군과 여러 면에서 닮았다. 술 잘 마시고 여색을 밝히고 호탕했으므로 두 사람이 죽이 맞아 양녕대군이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에 양녕이 얼마나 관여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당대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 계유정난을 추인하는 역할을 맡았다는 데는 많은 학자들이 동조한다. 그리고 조카인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을 처형하는 과정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이는 『단종실록』 단종 1년(1453)에 정확하게 등장한다.
‘양녕 대군 이제(李禔) 등이 아뢰기를, "안평대군 이용(李瑢)의 죄가 크고 대역이 극도여서 천지 사이에 있을 수 없으니, 청컨대 사사로운 은혜를 끊어서 법을 바로잡으소서." 하였다. 세조가 답하여 "용(瑢)은 골육지친인데, 여러 간사한 무리에게 속아서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그의 도당이 이미 제거되었고, 또 절도(絶島)에 유배되어 있으며 어찌 다시 일을 도모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당 태종의 고사(故事)를 끌어서 밝히고, 눈물이 턱에까지 흐르도록 울면서 죽여서는 안 된다고 굳이 말하고, 작은 방에 들어가서 통곡하였다.’
양녕대군이 왕이 되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시세를 영합하는 재주는 있었음이 분명하나 그에게 끝내 권력이 허락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일부 학자들의 상상력은 양녕대군이 예정대로 왕위에 올랐다면 혹시 명나라에 맞서며 만주를 공략하는데 앞장섰을지 모른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함규진 박사는 양녕대군이 삼국지의 여포와 비슷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너그럽고 삶을 즐거워하며’를 모토로 배신을 일삼으면서도 때로는 사나이답고 여자들에게 다정하면서 부하들에게는 잔혹했던 여포이지만 결론은 잘 알려져 있다. 여포의 패배, 유비의 승리다. 이는 유비가 대의명분과 문치주의를 우선하는 유교적 가치관을 기반으로 여포를 제압했다는 뜻이다.
양녕대군의 사당과 무덤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1호로 서울 동작구 양녕로 16, 상도동에 있다. 숙종 1년(1675) 우의정인 허목의 청으로 왕의 명에 의해 서울역 건너편 도동의 남산 초입에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인 1912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양명문이라는 대문을 통해 경내로 들어서면, 정조가 하사한 지덕사(至德祠)라는 현판이 걸린 사당이 보인다. 지덕(至德)이란 중국 주나라 때 태왕(太王)이 맏아들 태백과 둘째아들 우중을 건너뛰어 셋째아들 계력에게 왕위를 물려할 때 태백과 우중 두 형제가 부왕의 뜻을 헤아려 삭발하고 은거하며 왕위를 사양했다. 훗날 공자가 태백은 지덕, 우중은 청권이라고 칭송하였다. 이러한 고사를 바탕으로 양녕대군을 모시는 사당을 지덕사부묘소, 효령대군을 모시는 사당을 청권사부묘소라 하였는데 세조가 친히 지어준 이름이다. 경내에 양녕대군의 시가 새겨진 여러개의 오석이 새워져 있으며 양녕대군의 16대손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쓴 숭모 친필 시비와 숭례문(崇禮門)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비석이 있다.
사당 안에는 양녕대군과 부인 광산 김씨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양녕대군의 묘소는 사당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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