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의 저울질>
태종이 궁극적으로 양녕을 폐세자하는 빌미로 삼은 것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태종 10년(1410)에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자리에서 만난 봉직련이라는 기생과 염문을 일으키더니 그의 행동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막나가기 시작했다. 몰래 궁궐 담벼락을 넘어 여자를 찾아가기도 했고 여자를 궁궐에 끌어들이기도 했다. 더욱이 태종을 놀라게 한 것은 초궁장이라는 기생과도 관계했는데 그녀는 태종의 형이자 상왕인 정종의 여자였다. 이 사건은 양녕이 초궁장이 상왕의 여자라는 것을 몰랐다고 발뺌하여 초궁장이 쫓겨나는 것으로 무마되었다. 또한 세자의 매형인 이백강과 관계있는 칠점생과도 놀아났다.
태종은 세자의 측근들을 벌주거나 상대 여자들을 처벌하는 식으로 대응했는데 세자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이들을 비호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학자들은 엄밀하게 볼 때 이 정도는 당대에 큰 하자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양녕대군은 적어도 한 나라의 주인 자리를 예약한 사람이다. 그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 정도의 방탕은 방탕이라고 볼 수도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고려 왕조의 왕과 왕자들은 보다 극단적인 행동을 거리낌 없이 했다. 동성애에 빠진 왕도 있고 부왕의 후궁을 범한 왕도 있었다. 공민왕처럼 명군의 자격이 충분했던 왕도 방탕한 행동에는 결코 뒤지지 않는다.
사실 태종 자신도 왕실의 자손을 번성시켜야 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수많은 여자들을 탐했다. 양녕대군이 ‘어리’라는 여인과 나누던 밀회가 발각되어 태종으로부터 크게 꾸지람을 듣고 장인인 김한로가 태종으로부터 문책을 당했다. 그런데 어리를 장인의 집에 숨겨두고 아이까지 갖게 한 일이 드러나 태종이 대노하여 질책하자 양녕대군은 태종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전하의 시녀는 다 중하게 생각하여 받아들이고 신의 여러 첩 즉 어리와 숙빈을 내보내니 곡성이 사방에 이르고 원망이 나라 안에 가득차고 있습니다. 한나라 고조가 산동에 거할 때에 재물을 탐내고 색을 좋아하였으나 마침내 천하를 평정하였고 진왕 광(廣)이 비록 어질다고 칭하였으나 그가 즉위함에 미치자 몸이 위태롭고 나라가 망했습니다. 전하는 어찌 신이 나중에 크게 효도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십니까?’
반성문이라는 형식인데 내용인즉 아버지는 첩을 중하게 생각하면서 왜 자신의 첩은 쫓아내느냐이다. 게다가 한고조 유방을 거론하면서 훗날 자신도 성군이 될 수 있다고 강변했다. 양녕대군이 당시 쓴 글 내용에 따르면 양녕대군은 스스로를 한고제에 비유하면서 ‘어질다고 알려진 수양제가 나라 말아먹은 것은 아시느냐’고 반박한 것이다.
세자의 편지를 읽은 태종은 영의정 유정현, 좌의정 박은에게 이를 보여주며 세자를 어떻게 해야하느냐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자가 도리어 원망하고 분개하는 마음을 품고 드디어 상서(上書) 하였는데 사연이 심히 폐만(悖慢)하고 또 큰 글씨로 특별히 두 장이나 늘어놓아 심히 무례하다.‘
권력자들이 일반인은 상상할 수 없는 유흥에 빠지는 것이 생소로운 것은 아니다. 영웅은 호색이라는 말도 있을 정도인데 호탕한 기질의 세자가 글공부보다 여색과 사냥에 빠지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한 일이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결정권자가 자신의 입맛대로 이를 어떻게 보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어리 문제는 양녕이 폐세자가 되는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므로 보다 설명한다.
어리는 전 중추 곽선의 첩으로 한양 장안에서 소문이 자자한 미인이었다. 양녕대군도 그녀가 천하의 미인이라는 말을 들었으나 그녀가 성 밖에 있으므로 만날수가 없었다. 하루는 양녕대군이 수하들을 거느리고 장안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가마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가는 어리를 보았는데 그녀는 전하는 이야기대로 천하의 미인이었다. 어리의 이야기는 『세종실록』 세종1년(1419)에 다음과 같이 나올 정도다.
‘어리의 아름다움을 들은 적이 오래였으나, 그가 성 밖에 있기 때문에 어찌할 수 없었다. 그 뒤 서울에 들어왔다는 소문을 듣고 친히 그 집에 가서 나오라고 했으나, 그 집에서 숨기고 내보내지 않으므로, 내가 강요했더니, 어리가 마지못해 나왔는데, 머리에 녹두분이 묻고 세수도 하지 아니했으나, 그러나 한 번 봐도 미인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집 사람더러 말을 대령하여 태우라고 했으나, 그 집 사람이 좋아하지 않는 태도였었다. 그래서 나는 말하기를, ‘그렇다면 내가 탄 말에 태우고 나는 걸어가겠다. ’고 했더니, 그 집 사람이 마지못해 말을 대령했다. 그래서 나는 어리의 옷소매를 끌어 말을 타게 하니, 어리는 말하기를, ‘비록 나를 붙들어 올리지 않더라도 나는 탈 작정이다.’ 하고 곧 말을 탔다. 그때 온 마을 사람들이 삼대[麻] 같이 모여 구경하였다. 그날 밤에 광통교(廣通橋) 가에 있는 오막집에 와서 자고, 이튿날에 어리는 머리를 감고 연지·분을 바르고 저물녘에 말을 타고 내 뒤를 따라 함께 궁으로 들어오는데, 어렴풋이 비치는 불빛 아래 그 얼굴을 바라보니, 잊으려도 잊을 수 없이 아름다웠다.‘
양녕대군이 자신의 동생인 충녕대군에게 고백한 부분이다. 어리가 얼마나 미인이었으면 이런 고백까지 했을까하지만 여하튼 양녕은 어리와 광통교 인근에서 함께 자고 대궐로 데리고 들어왔다.
이것이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었고 어리가 임신하여 아이를 낳자 태종도 알게 되었다. 이에 태종이 노발대발하고 신하들이 양녕대군을 처벌할 수 없으니 수하들을 처벌하라고 주장했지만 태종은 강하게 말한다.
‘이것은 경 등의 죄가 아니다. 내가 아비이면서도 능히 의방(義方)으로 가르치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경등이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예날에 은나라충신 이윤은 신하이나 태자를 유배를 보낸 장소에 거처하게 하여 인(認)에 처하고 의(義)에 옮기게 하였으므로 태나는 능히 고친 자라 하겠지만 세자는 고치지 못한 자라 하겠다.’
태종이 양녕대군을 비난하자 양녕대군의 스승인 변계량은 세자가 워낙 뛰어나므로 고치기 어려운 것은 아니라고 변호한다. 결국 세종은 양녕대군에 경고를 주고 어리를 궁에서 추방했다. 그런데 양녕대군이 어리를 잊지 못하자 부인 김씨는 친정어머니와 상의하여 다시 어리를 대궐로 불러들였다.
양녕대군의 폐세자 문제는 태종의 본처인 원경왕후에게서 낳은 양녕ㆍ효령ㆍ충녕대군이 치열하게 암투를 벌였으므로 더욱 가열되었다.
양녕대군의 외숙부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는 세자인 양녕대군을 둘러싸고 암투가 벌어지자 이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사실이 태종에게 들어가자 대로하며 민무구를 질책했다. 태종이 질책한 것은 민무구가 효령과 충녕을 제거하려했다는 것으로 이는 세자의 자리를 탐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태종은 오히려 다음과 같이 반문했다.
‘왕의 자식은 오직 맏아들만 남기고 그 나머지는 모두 죽여야 한다는 뜻이냐?’
결국 민무구, 민무질 두 형제는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한다. 그런데 양녕대군이 다시 어리를 궁으로 불러들인 것이 화를 불러왔다.
‘세자빈을 노비를 주어 그 아비 집으로 내보내라. 그 맏딸과 맏아들은 은혜를 베풀어 전(殿)에 머물게하여 옛날대로 공급하라. 막내딸은 그 어미를 따라가게 하고 또 그 첩의 딸들로 하여금 숙빈을 따라가 같이 거주하게 하라.’
태종이 양녕대군의 부인 즉 세자빈 김씨를 동궁에서 내쫓은 것이다. 태종은 자신의 친구이자 세자빈 김씨의 아버지 김한로까지 귀향보냈다. 양녕대군은 실망하여 충녕대군과 만나자 그가 고변했음이 분명하다고 말하자 충녕은 답하지 않고 대신 태종에게 반발하지 말라고 했다.
어리 사건은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되는 결정적인 요건이 되었는데 결론은 극으로 갈라진다. 어리는 목매어 자살하지만 양녕대군은 풍류남아로 한평생을 보내다가 죽는다.
세종은 자신의 두 형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역대 어느 왕보다 형제들을 잘 돌보았다. 학자들은 세종이 세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어리 때문이 아니라 양녕대군과의 치열한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사실 세종이 이 과정에서 양녕이 지적한 것처럼 형의 행동을 밀고한 것은 사실이다. 세종이 당대의 정황 즉 태종의 진심을 정확하게 읽고 행동했는데 그것이 적중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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