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인릉(仁陵)
인릉은 순조(1790〜1834)와 순원왕후(純元王后)(1789〜1857) 김씨의 합장묘로 태종의 묘와 조성시기가 400여년이나 차이가 난다. 순조는 정조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박준원의 딸 수빈이다. 인조는 1800년 정월 왕세자에 책동되었는데 6월에 정조가 승하하자 졸지에 11살의 어린 나이에 창덕궁 인정전에서 즉위했다. 순조는 조선왕으로서는 유달리 행복한 상황에서 태어났다. 『정조실록』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신시(申時)에 창경궁 집복헌(集福軒)에서 원자(元子)가 태어났으니, 수빈박씨(綏嬪朴氏)가 낳았다. 이날 새벽에 금림(禁林)에는 붉은 광채가 있어 땅에 내리비쳤고 해가 한낮이 되자 무지개가 태묘(太廟)의 우물 속에서 일어나 오색광채를 이루었다. 백성들은 앞을 다투어 구경하면서 이는 특이한 상서라 하였고 모두들 뛰면서 기뻐하였다.’
한마디로 순조는 더없는 복을 받고 태어난 것이다. 그에 알맞게 정조는 아들 순조를 아끼고 귀하게 여겼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을 기억하는 정조이므로 그의 아들 사랑은 더욱 각별했다. 특히 순조는 정조를 똑 닮았다. 문제는 정조가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갑자기 사망했다는 점이다. 어린 순조가 후사를 잇기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여유부릴 시간도 없이 왕좌에 올라야 했다. 그때 나이 11살이다.
순조가 왕위에 올랐을 때 왕실은 그야말로 '여인천하'였다.
증조할머니 격인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와 할머니인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 친어머니 수빈 박씨와 어머니 격인 정조의 왕비 효의왕후, 또 장차 맞이할 왕비까지 4대 다섯 여인들이 순조를 에워싼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정순왕후가 나이 어린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하면서 무너져가는 조선왕조의 사회질서를 지탱한다는 명목으로 사교금압(邪敎禁壓)을 내세워 신유사옥을 일으켜 천주교도뿐만 아니라 남인과 시파의 주요 인물인 이가환·이승훈·정약종 등 약 200여 명을 처형했다.
정조의 총애를 받은 정약전, 영의정 채제공 등의 관직도 빼앗고 귀양을 보내 남인과 시파는 대거 몰락했다. 특히 수원화성을 실무적으로 설계하여 완성시킨 다산 정약용도 당진으로 귀향갔다. 그러나 정순왕후가 대왕대비로 궁방(宮房)과 관아에 예속되어 있던 공노비를 혁파하고 서얼유통(庶孼流通)을 시행한 것은 그녀의 큰 공으로 볼 수 있다.
순조의 아버지 정조가 왕으로나 학자로서 전혀 모자람이 없는 군주였으므로 아들이 이에 따르지 못했다는 평가가 있지만 순조는 친정부터 실무 관원들과 직접 만났고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백성들이 원하는 바에 귀를 기우렸다. 또한 왕권 강화를 위한 노력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정치 현실은 순조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특히 순조의 개혁정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안동김씨가 조정의 요직을 차지하고 전횡과 뇌물을 받는 행위를 일삼아 인사제도의 기본인 과거제도가 문란해지는 등 정치기강이 무너졌다.
더불어 왕으로서 남다른 박복(薄福)이 그를 둘러쌌다. 순조 재위 당시 가뭄과 홍수가 끊이지 않고 지속됐으며, 궁궐에 화재가 난 것도 여러 번, 서부지방에 전염병이 크게 번져 무려 10여 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특히 순조 9년(1809) 흉년은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기근이었다. 순조 즉위 이후 순조 8년까지는 해마다 풍년이 들었으나 이 시기 심각한 가뭄으로 인하여 모내기를 망치면서 전국을 휩쓰는 대기근이 발생하게 된다.
조정에서는 구황책을 통해 기근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순조는 진휼에 필요한 물자를 따지지 말고 바로 지급하여 구황의 시기를 놓치지 말라고 하는 등 각 지역별로 신속하게 구황에 나설 것을 촉구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구황책에도 불구하고 지역민들의 처지는 쉽게 개선되지 못하였다. 광주목사 송지겸 등은 당대의 기근이 100년 이래 최악의 수준임을 강조하며, 도내의 토지 중 10중 7, 8은 버려진 상태로서 백성들도 모두 굶어죽을 걱정을 하고 있으므로 전폭적인 세금의 경감 없이는 농민들이 버텨내기 힘들다고 호소했다.
다음해인 순조 10년(1810)의 자료에 의하면 굶주린 백성들의 수만 800만을 넘는다고 했을 정도로 당시 식량 위기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다. 조선이 한마디로 혼란의 소용돌이로 들어가는데 홍경래 난 6개월 전에 황해도의 곡산 민란이 일어났다.
곡산 부사 박종신이 창고의 곡식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감색(監色)들을 모두 옥에 가두자 주민 수백 명이 몽둥이를 들고 동헌에 돌입하여 관노를 때려눕히고 부사의 병부와 인신을 빼앗는 사건이다. 이 사건은 토착민도 수령을 징치할 수 있고 잘잘못을 가리기 위해 파견된 안핵사(按覈使)라 할지라도 불합리한 조치를 취하면 주민들이 저항할 수 있으며, 향품관들과 협력하여 도내에 통문을 발송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가 되었는데 이때 평안도 용강의 홍경래(洪景來)가 서북인의 차별대우를 빌미로 거병했다.
홍경래의 출신 성분에 대해 아직 정설은 없다. 일부에서는 몰락한 양반 출신이라고 하기도 하고 일부는 평민 출신이라고도 하지만 그가 글에 대해서 조예가 있었고, 아이들도 가르친 것은 물론 과거에도 응시했다는 것을 볼 때 최소한 평민 이상의 신분 소유자로 인식한다.
홍경래의 난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조선 후기 수많은 민중저항 중 최초로 ‘정감록’을 근거로 일어난 조직적 저항이라는 점이다. 그동안 조선 남부에서 일어난 농민봉기들이 가혹한 수탈에 대한 농민들의 우발적 반발의 성격인 것과 달리, 홍경래는 10년 동안 지지 세력을 규합해 치밀하고도 조직적으로 정부를 전복하려했던 최초의 봉기였다는 점이다.
홍경래는 평안도를 근거지로 삼아 봉기를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던 중 1811년 전국적으로 대흉년이 들고 특히 평안도는 가장 피해가 극심하자 1811년 12월 봉기와 함께 격문을 돌리면서, 자신들의 봉기에 대한 명분을 대외적으로 천명하였다. 그가 작성한 격문의 일부는 아래와 같다.
‘조정에서는 서토(西土, 평안도)를 버림이 더러운 땅과 다름이 없다. 심지어 권세 가문의 노비들도 서토의 인사를 보면 반드시 평민놈이라 일컫는다. 서토에 있는 자 어찌 억울하고 원통하지 않은 자 있겠는가. 막상 급한 일에 당하여서는 반드시 서토의 힘에 의지하고 또한 과거를 볼 때는 반드시 서토의 문장을 빌었으니 400년 이래 서쪽 사람들이 조정을 저버린 일이 있는가.’
초반 홍경래군의 기세는 대단하여, 이후 정주·선천·태천·철산·용천·박천 등지를 접수하였지만 결국 관군에 의해 정주성에서 항거하다가 정주성이 함락되면서 반란은 종지부를 찍는다. 순조 때 일어난 홍경래의 반란은 엄밀하게 6개월도 지속하지 못했으나 조선 왕조에서 매우 중요한 전기가 되므로 좀 더 설명한다.
<조직적인 홍경래 농민 반란>
조선 후기 사회·경제적인 역량이 성장함에 따라 여러 사회모순에 대한 저항의 분위기가 확산되어 가면서 경제력을 바탕으로 입신하려는 사람들도 많아지자 정부에서는 문무 과거 급제자를 크게 늘렸다. 그럼에도 불만 세력은 점점 늘어났는데 특히 평안도는 활발한 상업 활동 등으로 과거와는 다른 역동적인 사회상을 보이고 있었으나, 중앙 정치권력으로부터 소외되고 있었다. 그런 배경에서 홍경래 반란이 일어났는데 그는 자신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를 서북인을 문무 고관에 등용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임진왜란 때 재조(再造)의 공이 있었고, 재사가 나도 조정에서 이를 돌보지 않고, 심지어는 권문세가의 노비까지 서북인을 평한(平漢)이라고 멸시하니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 완급(緩急)의 경우에는 서북인의 힘을 빌리면서도 400년 동안 조정에서 입은 것이 무엇이냐?’
홍경래가 서북인을 중요한 자리에 임용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이 문제는 사실 조정에서 거론된 적이 있으므로 어느 정도 변화의 조짐은 일어나고 있었다. 이이도 선조 때 서북인 중 지방관이 되는 사람이 적으므로 지방 인재의 등용을 건의했다. 그러나 서북인들이 중앙 본무대에 진출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것은 사실이므로 이를 거사의 명분으로 걸었다.
여하튼 홍경래가 사마시에 실패한 뒤 급제한 사람들을 보니 모두 귀족의 자제들이었다. 한마디로 과거 자체가 부패하여 권문세가의 자제는 무학둔재(無學鈍才)라도 급제하지만 그렇지 못한 자는 발탁되지 못했다. 특히 평안도의 사람들을 제외하였는데 이것이 홍경래로 하여금 개조범상(改造犯上)의 뜻을 굳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를 보면 당대에 중앙으로의 진출이 조선인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 알 수 있다.
홍경래는 사마시에 낙방한 후 생업을 위해 풍수지리를 익혀, 10년 동안 서북지역을 떠돌아다니며 하층민심을 살피고 동료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그는 지휘부를 세 부류로 나누어 반란 핵심으로 홍경래, 김사용, 김창시 등 저항적 지식인이 포진했고, 현실에 불만을 갖고 있는 부호로 무과에 급제한 이희저 등이 거사 자금 조달하고, 군사지휘는 홍총각 이제초 등이 담당토록 했다.
특히 반란군의 면면은 홍경래의 조직 활동에 의해 봉기의 인근 지역뿐 아니라 멀리 평안도 남부 및 황해도로부터 모여들었으며 특히 상인들이 봉기 준비 단계에서 자금을 조달하고 군졸을 모으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면서 가산의 대령강 인근 다복동(多福洞)에 비밀 군사 기지를 세워 내응세력을 포섭하고, 금광 채굴을 구실로 유민들을 모아들이면서 기회를 엿보았다. 그런데 순조 11년(1811)에도 큰 흉년이 들어 민심이 흉흉하자 스스로 평서대원수라 칭하고 12월에 거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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