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세계문화유산(UNESCO)/조선왕릉

조선 왕릉(62) : 제3구역 헌인릉(4)

Que sais 2021. 4. 11. 11:23
728x90

<외교의 천재>

태종은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남다른 국제 감각을 갖고 있었다. 박헌모 박사는 조선 왕조에서 외교를 가장 잘한 사람으로 주저 없이 태종을 꼽았다. 태종의 방식은 한마디로 선발제지(先發制之)’인데 이는 먼저 나서 사태를 제압한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 말은 정도전을 제거할 때를 회상하면서 태종이 쓴 표현이다.

실제로 그는 탁월한 정보력으로 사태를 파악한 다음, 상황을 유리한 쪽으로 이끌어 나가는 데 귀재였다. 이 방식은 명나라 황제 주원장(朱元璋)을 만났을 때부터 발휘되었다.

 

주원장

태조실록태조311월에 이방원이 중국에 가서 명 태조 주원장을 만나고 돌아왔음을 전한다. 이방원은 태조 36월 즉 주원장을 만나기 5개월 전 명나라의 수도 난징(南京)행 길에 올랐다. 조선 외교문서의 용어를 문제삼아 조선 왕자를 보내라는 주원장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주원장의 요구를 받은 태조 이성계는 고심 끝에 다섯째 아들 이방원을 불러 도움을 요청했다. 한마디로 방원이 아니면 황제의 질문에 제대로 답변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이방원의 처지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우선 만 리나 되는 중국 사행(使行)길이 위험할뿐더러 조선을 심하게 압박해 오는 주원장에게 무슨 험한 꼴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1392년 조선을 개창한 이성계는 건국의 일등 공로자인 이방원을 제쳐놓고 이복동생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 한마디로 당시 스물여덟 살 젊은 이방원은 깊은 배신감에 고민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방원은 이성계의 부탁 즉 명령 아닌 명령에 나라를 위하는 대계(大計)인데 제가 어찌 피하겠습니까?’라면서 아버지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예정대로 이방원은 명나라 태조 주원장을 만났다. 두 사람이 만나는 1394년은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운 지 무려 27년째 되는 해였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홍건적 두목을 거쳐 대륙을 석권하고 제위(帝位)에 오르기까지 산전수전을 다 겪은 67세의 주원장인데 그가 가장 크게 신경쓰는 것은 명나라의 안정을 위해 요동 지배를 확고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명나라 개창 초기에 취했던 그동안의 우호적인 태도를 바꾸어 조선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조선이 요동의 장수를 매수하고 여진족 수백 명을 조선 땅으로 유인해 갔다고 질책했다. 이는 사실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명나라의 돌변에 대비한 정책 중 하나였다.

그런데 명나라는 조선이 여진과 연계하는 것을 극히 의심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 와중에 조선에서 명나라로 보낸 외교문서의 어투를 문제 삼았다. 아예 국교 단절을 선언했다. 조선에서 외교문서에 조선 국왕이라 하지 않고 조선국 권지국사(權知國事)’라고 적었기 때문이다.

주원장은 이런 행동이 명나라에 대한 공격이나 마찬가지라며 아예 국교 단절을 선언했다. 조선의 사신들을 요동에서 다섯 차례나 되돌려 보낸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조선의 왕자를 보내라는 것은 조선으로서는 매우 심각한 일이었다. 당대에 인질들의 목숨은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이 관례다. 한마디로 전쟁 등을 벌려야할 경우 제일 먼저 자신들의 최종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인질을 처형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다행한 것은 주원장과 인질로 가는 조선의 왕자 이방원이 초면이 아니라는 점이다. 6년 전인 1388년에 고려의 이색을 따라 명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었으며 이번에 어엿한 조선의 왕자가 되어 다시 나타난 것이다.

실록을 보면 주원장은 이방원을 두세 차례 불러 대화를 나누었다. 이방원은 우선 외교문서 속의 표현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외교문서에 조선 국왕이라 하지 않고 조선국 권지국사(權知國事)’라고 적은 이유는 명나라 황제가 국호만 내려주고 왕의 작호(爵號)까지는 내리지 않아 감히 왕이라고 일컫지 못한 것이라며, 이제 작호까지 허락한다면 기꺼이 사용하겠다고 말했다.

이방원의 말을 들은 주원장은 흡족해하며 자신이 의혹을 품고 있던 문자 표현의 오해를 충분히 불식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대하는 예를 갖추어 조선의 왕자인 이방원을 안전하게 돌려보내라고 지시했다. 양국 간에 첨예하게 벌어지고 있던 외교적 갈등이 원만히 해결된 것이다.

 

영락제

이방원에게는 행운도 따랐다. 이방원이 귀국길에 연왕 주체(朱棣)를 만난 것이다.

명 태조 주원장의 넷째 아들 주체는 1394년 당시 군사가 제일 많은 베이징의 번왕(藩王)으로 14년째 군림하고 있었다. 특히 1392년 황태자가 갑자기 병으로 사망하면서 대권까지 꿈꿀 수 있었는데 실제로 주체는 1402년 마침내 황제에 오른다. 그가 영락제이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우연으로 이방원이 조선으로 돌아오던 그때 주체는 주원장의 호출을 받아 난징으로 가던 길이었다. 실록에 의하면 두 사람은 베이징 근처에서 마주쳤다. 급히 달리던 주체가 길가에 서 있는 이방원을 보고 수레를 멈추게 한 것이다.

수레의 휘장을 젖힌 주체는 온화한 말로 이방원과 한참 동안 이야기하고는 지나갔다고 한다. 학자들은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전해지지 않지만 이들의 만남은 이방원에게 큰 그림을 그리게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영락제는 원나라 박멸을 명제로 요동-만주-조선 지방을 안정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며 적극적인 회유와 점령 정책을 사용하여 조선이 오랫동안 공을 들여온 여진을 완전히 복속시켰다. 특히 영락제는 후에 티벳, 베트남, 남만주 등을 평정하여 명나라 최대의 영토를 넓혔으나 조선은 오히려 우대하였던 것이다. 또한 영락제는 환관 '정화'를 시켜 멀리 아프리카까지 탐험하여 중국인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준 황제로 남아있다

여하튼 막강한 제국으로 부상한 영락제를 직접 만나 본 태종은 그동안 여진과의 공동 연대로 명나라에 대비하려는 생각을 접게 만들었다. 한마디로 명나라가 예상보다 빨리 안정되었으므로 명나라를 상대로 등거리 외교로 다툼의 소지를 만들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더구나 명나라의 영락제는 태종이 직접 만난 상대이므로 영락제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조선의 안정만 생각하면 태종의 국제감각은 탁월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이 명나라에 반기를 들지 않으면 조선 정부는 안정되는 것은 물론 북방민족 및 일본과의 대립은 중국이 처리하도록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태종은 양녕을 철저하게 준비시키는데 열중했다. 태종4(1404) 세자에 책봉된 후 태종7(1407) 입조하라는 명나라 영락제의 명을 받고 1407하진표사(賀進表使) 명나라로 양녕을 보낸다. 이때 완산부원군 이천우(李天祐), 단산부원군 이무(李茂), 제학 맹사성(孟思誠), 서장관 집의 허주(許稠) 등 백 여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연경에 다녀왔다. 그런데 영락제가 양녕에게 특별히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서 선물로 주기도 하였다.

 

조선의 왕자 제가 조공 닦으러 만리 길을 찾아오니

나이는 불과 열다섯이나 인재가 될 만하다.

글 읽고 도를 닦아 스스로 버리지 말고

부지런히 힘써서 집안 일을 훼손하지 말라.

예부터 화복(禍福)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요

높은 산도 갈리고 바다도 옮겨지나니 조심하고 조심하라

 

영락제가 양녕에게 조선을 잘 다스리라는 충고 아닌 충고를 했는데 여하튼 태종이 영락제와 양녕이 만날 수 있도록 한 것은 자신의 후계자로 철저하게 신임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조선왕이 되려면 명나라 황제를 직접 만나는 것이 중요한데 양녕은 이런 기회를 잘 활용했다. 한마디로 영락제는 태종도 만났지만 양녕이 직접 시를 선물로 받았다는 것은 양녕의 입지를 굳혀주었다.

그런데 태종은 국내외 상황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더 이상 명나라에 대비하여 무를 비축한다는 것은 실속이 없다고 생각했다. 무를 앞세우는 정복군주보다 조용히 나라 안팎을 추스르며 이미 세운 국가의 기반을 튼튼히 다지는 수성형 군주가 효율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문제는 태종의 개인사다. 조선은 원래 문벌귀족이 전횡하던 고려라는 틀을 부수고 대신 신흥 무인과 신흥 사대부들이 합작하여 만들어 낸 나라다. 특히 태종은 건국 후 수많은 정쟁 과정에서 상당수를 희생시키고 쿠데타로 등극한 사람이다.

 

태종의 어필

명분상 태종이 왕으로 있다는 것은 매우 모순적인 일이므로 이를 희석시키기 위해서라도 획기적인 반전이 필요했다. 이는 무를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문을 앞세우는 것이다.

태종은 수많은 문신들을 제거했지만 앞으로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지 않고 성리학을 국교로 받들며 명나라에 사대하는 것이 국가 존속을 위해서는 결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조선의 버팀목으로 무사들이 아닌 선비들을 앞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눈에 들어온 사람이 바로 충녕이다. 충녕은 태종이 양녕에게 바라는 바로 그 모습 그대로였다. 한쪽 다리가 다소 짧은 장애인 소위 절름발이인 단지대왕(短之大王) 충녕은 어릴 때부터 주위 정세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책만 들여다보았다. 충녕 즉 세종대왕의 한쪽 다리가 짧은 장애인이라는 내용은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사극에도 세종대왕이 절름발이라고 나오지 않지만 이 부분은 세종대왕릉인 영능을 설명할 때 자세하게 다룬다.

한국사에서 세종대왕의 업적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래한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성군으로 불리는데 세종대왕의 업적은 한글을 창제했고 대마도를 정벌하고 육진을 개척했으며 박연 등을 발탁하여 예술 발전에 기여했고 문관인 이순지 등을 발탁하여 세계적으로 자랑인 천문의기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한국민이 세종에게 가장 큰 혜택을 입은 것은 한글인데 사실 충녕이 아니라 양녕대군이 왕이 되었다면 결코 한글은 창제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양녕은 그동안 세자로 철저하게 수업을 받은 세자로 능력에 관한 한 검증된 왕이었다. 그러나 양녕은 아버지가 그리고 있는 커다란 그림을 보지 못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