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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구역 : 동남산>
서남산과 남남산을 주파하면 소위 매를 먼저 맞은 셈이므로 다음 길이 경쾌하지 않을 수 없다. 남산의 동쪽을 의미하는 동남산은 통일전을 기준으로 좌측과 우측으로 나뉘어지는데 먼저 좌측을 향한다. 동남산 좌측으로는 서출지(사적 제138호), 남산리삼층석탑(보물 제124호), 염불사터(사적 제311호), 국보 제312호인 칠불암마애불상군, 보물 제199호인 신선암마애보살상 등이 기다린다.
통일전 바로 옆에 있는 연못이 유명한 서출지(書出池)다. 서출지는 이름 그대로 글이 나온 연못이다. 소지왕 10년(488) 궁 밖으로 거동하니 쥐가 나타나 ‘까마귀가 가는 곳을 따라가라’고 했다. 왕이 그 말대로 따라가 이 연못에 이르자 연못 속에서 한 노인이 봉투를 주었는데 그곳에는 ‘거문고 갑을 쏘시오’라고 써 있었다. 왕이 궁으로 돌아와 봉투의 말대로 활로 거문고 갑(匣)을 쏘니 그 속에 숨어 있던 궁녀와 승려가 화살을 맞고 죽었다.
그 뒤로 이 못을 ‘서출지’라 하고 정월 보름에 까마귀에게 찰밥을 주는 ‘오기일(烏忌日)이라는 풍속이 생겼다고 한다. 지금도 경주 지방에는 정월 보름날 아이들이 감나무 밑에다 찰밥을 묻는 ‘까마귀밥주기’ 풍속이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경주 전체가 까마귀 천지다. 현재 이 연못 안에는 조선 현종 때 임적(任勣)이 건설한 정면 3칸 측면 2칸의 ‘ㄱ’자 형인 이요당(二樂堂)이라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건물이 있다. 서출지는 그리 큰 연못은 아니지만 연꽃과 둘레에 있는 수백 년 된 배롱나무들이 제 철에는 절경을 연출한다.
서출지의 전설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전설의 연대이다. 소지왕은 479년부터 500년까지 21년 동안 왕위에 있었는데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것은 이차돈 순교가 일어난 다음해(528)이다. 그런데 서출지의 전설을 보면 이보다 상당히 앞선 소지왕의 궁궐에 이미 승려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법흥왕이 불교를 인정하기 이전부터 신라의 왕궁에 승려가 들어올 정도로 불교인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출지에서 봉화골 방향으로 조금 들어가면 남산리3층석탑(보물 124호)이 보인다. 9세기 작품인 남산동 쌍탑은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처럼 동탑과 서탑이 서로 다른 양식을 가지고 있다. 7.04m 높이의 동탑은 3층으로 모전석탑의 면모를 보여주는데 바닥돌 위에 돌덩이 여덟 개로 어긋물리게 기단을 쌓고 층마다 몸돌 하나에 지붕돌 하나씩을 얹었는데 몸돌에 우주를 새기지 않았다. 지붕돌은 벽돌을 쌓아 만든 것처럼 처마 밑과 지붕 위의 받침이 각각 5단이다.
돋을새김한 팔부신중 좌상이 있는 5.85m의 서탑은 석가탑에 견줄 수 있을 만큼 뛰어난 균형미를 뽐내는 전형적인 삼층석탑 양식이다. 상층 기단은 한 변을 둘로 나누어 팔부신중이 각 면마다 둘씩 새겨져 있다. 팔부신중은 불법을 수호하는 신장(神將)들을 가리키는데, 머리가 셋에 팔이 여덟인 아수라상, 뱀관을 쓰고 있는 마후라가상 등 모두 여덟 명이다. 우리나라에서는 9세기 무렵부터 석탑의 기단부에 팔부신중이 조각되기 시작되었는데 대개가 무장한 차림을 하고 있다. 안내판에 ‘팔부신중은 신라 중대 이후에 등장하는 것으로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탑을 부처님의 세계인 수미산으로 나타내려는 신앙의 한 표현’이라고 해설하고 있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모두 돌 하나로 되어 있고 각층에는 우주를 조각했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지붕돌은 층급받침이 각기 5단이며 낙수면은 경사져있다. 서탑은 불국사의 석가탑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균형이 잘 잡혀 있다.
남산리3층석탑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마을이 끝나면서 사적 311호인 ‘전 염불사지 삼층석탑’이 나타난다. 『삼국유사』에 염불사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남산 동쪽 산기슭에 피리촌(避里村)이 있고, 그 마을에 절이 있는데 피리사(避里寺)라 했다. 그 절에 이상한 중이 있었는데 성명은 말하지 않았다. 항상 아미타불을 외어 그 소리가 성 안에까지 들려서 360방(坊) 17만호(萬戶)에서 그 소리를 듣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소리는 높고 낮음이 없이 낭랑하기가 한결같았다. 이로써 그를 이상히 여겨 공경치 않는 이가 없었고, 모두 그를 염불사(念佛師)라 불렀다. 그가 죽은 뒤에 소상을 만들어 민장사(敏藏寺) 안에 모시고 그가 본래 살던 피리사를 염불사로 이름을 고쳤다.’
무너져 있던 석탑 2기의 탑재와 도지동 이거사지 삼층석탑의 1층 옥개석을 이용하여 2009년 복원한 것이다. 서탑의 사리장엄구를 봉안하였던 사리공은 다른 석탑에서는 볼 수 없는 2개이며 3층 탑신의 방형사리공이 투공된 점 등을 감안할 때 석탑의 건립시기를 7세기말 또는 8세기 초로 추정한다.
이곳에서 봉화골을 30분 가량 오르면 칠불암마애불상군(국보 312호)이 기다리고 있는데 남산의 어려운 곳을 이미 주파한 터라 그다지 어렵지 않은 길이다. 칠불암마애불상군은 바위에 일곱 불상이 새겨져 있다는 뜻인데 모두 화려한 연꽃무늬 위에 앉아 있다. 높은 절벽을 등진 뒤쪽 자연암석에 삼존불이 있고 그 앞쪽에 네 면에 불상이 조각된 돌기둥이 솟아 있다. 칠불 왼쪽에는 석등과 탑의 부재로 보이는 돌들을 모아 세운 탑이 있다.
가파른 산비탈을 평지로 만들기 위해 동쪽과 북쪽으로 높이 4미터 가량의 돌축대를 쌓아 서쪽 바위 면에 기대어 자연석을 쌓고 높이 4.68, 길이 8.4미터의 불단을 만들었다. 불단 위에 네모난 바위를 얹어 면마다 여래상을 새겨 사방불을 모셨는데 모두 연꽃이 핀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각기 방향에 따라 손 모양을 다르게 하고 있다. 암석의 크기가 동면과 남면은 크고 서면과 북면은 작으므로 불상도 대소 차이가 있어 큰 것은 약 1.2미터, 작은 것은 70〜80센티미터 정도인데 조각이 정밀하지 못하며 얼굴과 몸체는 단정하나 몸체 아래로 갈수록 정교함이 더욱 떨어진다. 사방불 모두 연화좌에 보주형 두광을 갖추고 결가부좌했다. 네 불상의 명칭을 확실히 정하는 것은 어렵지만 방위와 수인, 인계(印契)로 볼 때 동면상은 약사여래, 서면상은 아미타여래로 추정한다. 남면과 북쪽 불상의 존명을 확실하게 알지 못하지만 경전대로라면 남쪽은 보생여래, 북쪽은 불공성취여래이다.
사방불 뒤로 1.7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서쪽에 높이 5미터, 너비 8미터 되는 절벽 바위 면에 거의 입체불에 가깝게 돋을새김한 삼존불이 있다. 삼존불의 본존 좌상은 높이 약 2.7미터로 조각이 깊어서 모습이 똑똑하고 위엄과 자비가 넘친다. 대좌의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있는 옷은 몸에 그대로 밀착되어 굴곡이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땅을 향하고 왼손은 배 부분에 대고 있는 모습이다. 광배는 보주형의 소박한 무늬를 두드러지게 표현하였고 머리는 소발에 큼직한 육계가 솟아 있다. 네모진 얼굴은 풍만하여 박진감이 넘치고 곡선의 처리로 자비로운 표정을 자아내게 했다. 불상 대좌는 8세기 중엽에 이르며 앙련대와 복련대 사이 8각 중대석이 있는데 이 대좌는 복련 위에 직접 앙련이 핀 사실적인 연꽃으로 나타나 있어 이 불상의 연대를 짐작하게 한다. 밑으로 쳐진 복련꽃은 꽃잎이 좁고 길며 끝이 뾰족한데 앙련 꽃잎은 짧고 넓으며 끝이 두 개의 곡선으로 되어 변화가 다양하다.
우측 협시보살은 본존불의 대좌와 닮은 연화대에 서 있다. 입은 굳게 다물었고 머리는 삼면두식(三面頭飾)으로 장식했으며 왼쪽 어깨에서부터 승기지(僧祇支)가 비스듬히 감싸고 남은 자락이 수직으로 물결치며 흘러내린다. 오른손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드리우고 감로병을 쥐었으며 왼손은 팔꿈치를 굽혀 어깨 높이로 들고 있다. 몸체는 본존불 쪽으로 약간 돌렸으며 구슬목걸이로 장식하고 있다. 왼쪽 협시보살도 연화대좌 위에 서있다. 오른손엔 연화를 들고 왼손은 옷자락을 살며시 잡아들고 있다. 두 협시보살의 높이는 약 2.1미터이다. 오른쪽 협시보살이 감로병을 쥐고 있는 것으로 보아 관세음보살, 본존은 아미타불, 왼쪽 협시보살은 대세지보살로 인식한다.
8세기 중엽으로 내려오면서 보살들은 가슴이 짧아지고 다리가 길어지면서 몸매가 날씬해지는데 칠불암 보살들은 백제 말기의 보살처럼 가슴이 길고 다리가 짧다. 그 때문에 이들 마애불상군이 만들어진 연대를 7세기 말엽에서 통일 초기 작품으로 추정한다. 무늬없는 보주형 두광이나 연꽃 대좌를 덮고 있는 상현좌(裳懸座)의 흔적이 남아 있는 점도 7세기 말엽 불상들의 특징이다. 하지만 보살상이 본존을 향하고 있는 점을 볼 때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흔히 ‘남산에 문화재가 많은 것이 아니라 남산 자체가 문화재’라고 하지만 남산에서 칠불암마애불상군은 유일한 국보로 혹자는 ‘남산의 꽃’이라고 말한다. 경주에서 체류할 시간이 많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칠불암마애불상군은 반드시 방문할 것을 강추한다. 삼존불이 새겨진 바위의 측면에 돌 홈이 나 있는데 이것으로 보아 원래 지붕을 갖춘 전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칠불암마애불상군에서 직접 보이지 않지만 뒤편 절벽 꼭대기에 신선암마애보살반가상(보물 제199호)이 있다. 칠불암마애불상군의 우측으로 가파른 바윗길을 줄을 잡고 나무를 붙들면서 올라가는 것은 물론 절벽을 옆으로 타고 아슬아슬하게 들어가야 하는데 오른쪽이 암벽, 왼쪽이 아찔한 낭떠러지이지만 겁을 먹고 뒤로 돌아설 필요는 없다. 절벽 위 좁은 길을 20여 미터 들어가면 사람 서너 명이 설 수 있을 만한 공간이 나오는데 절벽 바위 면에 얕게 조각된 보살상이 보인다. 바위 면은 남쪽을 향하고 있는데 비가 와도 젖지 않도록 바위 윗면을 조금 앞으로 경사지게 깎아 내고 높이 1.5미터, 너비 1.27미터 되는 배광 모양의 얕은 감실을 파 돋을새김으로 보살상을 만들었다. 머리에는 3면보관(三面寶冠)이 높이 있으며, 이마에는 띠를 두르고 있다. 얼굴은 길며 웃음을 담고 있어 남성적인 인상이 뚜렷하지만 몸이 풍만하고 굴곡도 있다. 신라의 보살들은 대체로 윗입술이 아랫입술을 감싸듯하고 입 언저리에 깊은 홈을 파 이지적인 미소가 나타나는데 이 보살은 윗입술보다 아랫입술이 더 크게 표현되어 누구에게나 정다움을 느끼게 한다. 오른손은 꽃을 잡고 있고, 왼손은 가슴에 대고 있으며 오른발은 의자 아래로 내려 연화대를 밟고 반가좌를 하고 있는데 손에 든 꽃 등을 보아 관세음보살의 자세다.
천의는 얇아 육체의 굴곡이 살아 있으며, 옷자락은 유려하게 흘러 대좌를 덮고 옷주름은 자연스럽게 늘어졌다. 발 아래는 화려한 구름이 동적이어서 구름에 떠가는 자유자재한 보살을 묘사하고 있다. 광배는 나룻배와 같은 형태로 온몸을 둘러싸고 있으며 3가닥 선으로 두광·신광을 표현하였는데 8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윤경렬은 이 보살상은 왼쪽 발이 무릎 위에 있지 않고 결가부좌를 모두 풀어 놓고 앉아 있는 자세를 감안하여 유희좌(遊戱座)의 자세로 ‘유희좌상’으로 불러야 한다고 말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로 남산이 깔려 있고, 그 너머로 토함산이 한눈에 들어오며 그 너머로는 동해 푸른 물결이 출렁이는 듯한 절경이 이어진다. 남산에서 바라보는 천하의 절경으로 마애불을 ‘구름 속의 마애보살’이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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