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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산에서 천룡사지를 향하는 길은 하산길이지만 다소 가팔라 주의가 필요한데 중도 곳곳에서 금오봉, 용장사지3층석탑, 연화대, 비석대, 이영재 등을 멀리 볼 수 있다. 한마디로 장관 중에 장관인데 유명한 전설이 깃든 분암(糞岩, 똥바위)도 보인다. 장마 때에는 바위 틈으로 물이 흘러 내리므로 뇨암(尿岩)이라고도 하는데 안내판에 적힌 내용을 보자.
‘신라시대 각간에게 곱고 아름다운 외동딸이 있었는데 그녀에게 수많은 남자들이 눈독을 들었지만 그녀는 시끄럽고 어지러운 속세를 떠나 불교에 귀의하겠다며 몰래 집을 나서 열반골로 들어갔다. 그녀는 평평한 바위인 경의암에서 금빛으로 수놓은 비단옷을 벗고 잿빛 먹물 옷으로 갈아입고 골짜기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녀의 향기를 맡고 수많은 맹수들 형상을 한 큰 바위들이 길을 막았다. 바로 고양이, 개, 산돼지, 작은곰, 뱀, 귀신바위 등이다. 이후 큰곰바위, 들소바위, 독수리바위, 이무기바위, 용바위 등이 나타나는데 이들이 있는 계곡을 벗어나면 10미터 정도의 큰 바위 하나가 나온다. 이 바위 위에 한 개의 이상한 돌이 얹혀 있어 마치 누가 대변을 본 것 같아 똥바위(분암)이라 한다. 이곳에서 처녀가 똥을 누었는데 한 지팡이를 집은 할머니가 나타났다. 그녀는 깨우친 사람을 극락으로 안내하는 지장보살이다. 지장보살은 진리를 깨우쳐 맑고 깨끗한 마음을 얻었으니 열반으로 안내한다며 구름바위에 태워 산등성이를 넘어 천룡사 부처의 세계에 안내하여 처녀는 영원히 열반에 사는 몸이 되었다.’
천룡사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이야기도 되는데 처녀가 똥을 누었다는 것은 속세의 모든 것을 내보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때 처녀가 누운 똥이 현재 이상한 돌로 변한 것으로 분바위의 전설이 되었다고 한다. 고위산 전설과 기암석들을 보면서 계속 내려오면 경주시 내남면 고위산(高位山) 천룡곡(天龍谷)의 천룡사에 이른다. 천룡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 말사로, 신라 때 창건되었으나 폐사되었다가 복원된 사찰인데 경내가 무려 20여만 평에 달할 정도로 매우 큰 사찰이었다고 한다. 천룡사는 고사(高寺)라고도 불리는데 천녀와 용녀 두 딸을 둔 부모가 딸을 위해 세웠다고 한다.
천룡사에 대한 전설은 매우 잘 알려지고 있다. 『토론삼한집』에 의하면 계림 땅에 두 줄기의 객수(客水)와 한 줄기의 역수(逆水)가 있어 두 물줄기의 근원이 하늘의 재앙을 진압하지 못하면 천룡사가 무너진다고 했다. 마등오촌(馬等烏村) 남촌을 흐르는 역수의 근원이 바로 천룡사라고 한다. 천룡사가 파괴되면 며칠 안으로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당나라 사신 악붕귀가 말했는데 천룡사는 신라가 몹시 혼란하였던 말기에 파괴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천룡사의 3층 석탑도 원래 무너져 있었는데 1989년부터 석탑자리를 비롯하여 주변을 발굴 조사한 결과, 석탑의 위치·방향, 그리고 묻혀 있었던 석탑재들이 확인되어 이들을 수습하고 기단부 일부와 상륜부의 부족한 부재를 보충하여 고증을 거쳐서 1991년 복원한 것이다.
단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쌓아올린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으로 전체 높이는 7m이다. 기단부는 지대석 위에 높직한 2단의 굄을 마련하고 이를 기단 면석과 양쪽 우주(隅柱)와 하나의 탱주(撑柱)가 받치고 있다. 갑석에는 아래쪽에 부연이 있고 위쪽에는 높직한 2단의 굄을 마련하여 탑신부를 받치고 있다. 탑신부는 옥신석과 옥개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옥개석의 아래쪽은 5단의 옥개 받침으로 되어 있고 경사를 이룬 낙수면이 통일신라시대 석탑 특유의 경쾌함을 보여 준다. 이 석탑은 단층기단의 전형을 보이고 있으며 전체의 균형이 잘 이루어져 있어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를 대표하는 석탑이라 평가한다. 현재 보이는 석탑은 전체 부재가 쓰러져 있던 것을 철저한 고증을 거쳐 수습 복원한 것으로, 1층 옥신이 심하게 훼손되었는데 1층탑신석 상면에 깊이 15cm, 직경 15cm의 둥근 사리공이 있음이 확인되었다.
석탑 옆에 천룡사가 있는데 초가가 있는 ‘남산선당(南山善堂)’이라는 법당과 장독대가 이채롭다. 인근에 부도탑과 석조, 대형 맷돌이 보이는데 다소 특이한 형태의 석물이 발견된다. 외부 형태로 보아 비석이 사라진 귀부처럼 보이지만 상부의 형태로 보아 불경을 새긴 당석(幢石)을 꽃은 윤장대(輪藏臺)로 추정한다고 한다.
윤장대는 책장의 일종으로 불교에서는 경전을 넣은 책장을 돌리면 경전을 읽는 것과 같은 공덕을 쌓을 수 있다고 한다. 윤장 또는 전륜장(轉輪藏)·전륜경장(轉輪經藏)이라고도 하는데 중심에 기둥을 세우고 기둥에 의지하여 원형 또는 다각형의 나무장을 올린 뒤 여기에 경전을 넣고 손잡이로 돌릴 수 있도록 만든다.
윤장대는 글자를 모르거나 불경을 읽을 시간이 없는 신도들을 위하여 만들어진 불구로, 중국 양(梁)나라의 선혜대사가 처음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윤장대를 돌리는 것이 부처가 설법하는 것을 진리의 바퀴를 돌린다고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인식한다.
경북 예천군 용문면 용문사에 있는 윤장대는 국보 제328호로 지정되어 있을만큼 유명세를 갖고 있다. 높이 4.2m, 둘레 3.15m로 보광명전 왼쪽의 대장전(大藏殿) 안에 자리하고 있는데, 불단(佛壇)을 중심으로 좌우 양쪽에 대칭하여 각각 1기씩 놓여 있다.
경장은 8각 단면으로 정교하게 짠 공포(栱包)를 놓고서 겹처마의 팔작지붕을 올린 다포(多包)계 건물의 모습이다. 특히 각 면에는 문이 하나씩 달려 있어, 마치 8각의 목조건물을 축소해 놓은 것처럼 보인다. 회전이 잘 될 수 있도록 팽이 모양으로 뾰족하게 만든 아랫부분은 기둥과 상인방(上引枋), 창방(昌枋) 사이에 돌려 붙인 연이은 덩굴무늬의 파련각(波蓮刻) 장식인 낙양처럼 조각하였고, 한쪽 모서리에는 길다란 손잡이를 두어 경장을 돌릴 수 있도록 하였다. 손잡이의 윗부분에는 각 면마다 난간과 함께 문짝을 달았다.
윤장대는 대장전이나 장경각(藏經閣)처럼 불교 경전을 보관하는 곳이지만, 그 자체가 신앙의 대상인 불교 공예품으로 완벽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은 용문사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국보로 지정된 이유인데 용문사 윤장대는 1670년 경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논산시 관촉사, 강화도 보문사, 진천군 보탑사 등에 있는 윤장대도 유명하다.
천룡사에서 하산길에 백운암이라는 조그마한 암자를 만나는데 놀랍게도 부처의 치아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다며 친견이 가능하다고 한다. 한국에 6곳의 사찰(양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 태백산 정암사, 사자산 법흥사, 오대산 월정사, 강원도 건봉사)에 석가의 진신사리가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내용이다.
그런데 경주의 남산의 작은 암자인 백운암에 진신사리가 있다는 말에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 질문의 답을 성오(性悟) 스님은 명쾌하게 설명한다.
2005년 스리랑카에서 쓰나미가 일어났을 때 백운암에서 많은 지원을 했는데 백운암의 주지인 백운 스님이 스리랑카의 ‘불치사’에 3과의 부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으므로 이들 중 한 개를 받을 수 있느냐고 질문하자 기꺼이 그 중 1과를 기증했다는 설명이다. 강원도 건봉사에 석가의 치아사리가 있다고 알려지는데 엄밀한 의미에서 건봉사에 보관되어 있는 치아사리는 석가의 치아 자체이고 백운암의 치아사리는 치아가 아니라 사리라고 한다. 불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온통 불교유적으로 감싸 있는 남산에서 석가의 진신사리를 친견할 수 있다는데 남다른 경외감을 느낄 것이다.
천룡사를 거쳐 백운암까지 하산하는데 만만치 않은 시간이 걸리지만 그래서 오히려 답사의 묘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참고적으로 천룡사는 고위산에서 내려오는 길도 있지만 용장3리에 있는 틈수골에서부터 올라가는 길이 최단길이다. 구불구불한 마을길을 지나 본격적인 등산로가 시작되지만 길이가 1킬로미터 남짓이므로 천룡사만 방문할 때는 이 길을 추천한다.
남남산에 속하지만 백운대 마애석불입상(지방유형문화재 제206호)은 앞에 설명한 세 곳과는 전혀 다른 곳에 위치하므로 별도의 일정을 잡아야 한다. 경주시 내남면 명계리의 백운대(白雲臺) 부락 동쪽 마석산(磨石山, 531미터) 정상 아래에 있는데 시간은 다소 걸리지만 이정표만 따라가면 비교적 완만한 오름길로 쉽게 찾을 수 있다.
높이 7.28m, 너비 6m 가량의 각형암벽(角形岩壁) 위에 원형으로 파고 새긴 높이 4.6m에 달하는데 통일신라시대에 널리 사용되던 당척(唐尺)으로 환산하면 약 16자에 해당하므로 장육불상(丈六佛像)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의 미완성 석가여래입상으로 얼굴은 이목구비와 함께 코 밑의 인중선과 귀의 세부 굴곡까지 완벽하게 조각되어 있다. 머리는 민머리(素髮)이고 육계는 지나치게 커서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방형의 얼굴은 살찐 모습이며 입을 꼭 다물고 눈꼬리가 날카로운 두 눈은 반쯤 뜬 형태여서 굳은 표정을 지었다.
도식적인 모습의 두 귀는 길게 늘어져 있으며 목에는 굵은 삼도(三道)가 있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을 걸친 듯하며, 왼쪽 팔목에 세 가닥의 층단주름을 나타내고 있다. 수인(手印)은 시무외인(施無畏印)·여원인(與願印)이며, 살찐 어깨와 가는 허리 등에서 전체적으로 풍만한 신체를 표현하려고 의도했음을 알 수 있다.
신체는 윤곽만 조각했을 뿐 옷자락의 윤곽과 옷주름은 아직 조각하지 않았음을 볼 때 먼저 대체적인 신체 윤곽을 잡은 뒤 얼굴을 완성하고 그 다음에 손의 세부를 조각한 뒤 마지막으로 옷주름을 조각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미완성 마애불은 화강암 마애불의 제작과정을 보여주는 귀중한 예로 알려진다.
참고문헌 :
「불교의 사리에 대한 고찰」, 김진환, 한국불교학, 1986
「舍利서 방사성원소도 검출-인하대서 첫 성분검사」, 이기준, 중앙일보, 1995.10.21
「사리신앙에 관한 연구」, 김재철, 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02
「벽암 스님 ‘연꽃 사리’ 화제」, 김한수, 조선일보, 2005.8.13.
「스님의 사리, 과학적 증명 가능할까?」, 이종호, 과학향기, 2010.04.22.
「경주 남산 열암곡 마애석불 원형복원 불가능」, 김성웅, 한국일보, 2012.02.09.
「예천 용문사 윤장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주남산(1)』, 윤경렬, 대원사, 1991
『다비와 사리』, 박경준, 대원사, 2001
『사원 건축』, 신영훈, 대원사, 2002
『우리 역사문화의 갈래를 찾아서 경주문화권』, 국민대학교국사학과, 역사공간,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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