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세계문화유산(UNESCO)/조선왕릉

조선 왕릉(39) : 제2구역 서삼릉(5)

Que sais 2021. 4. 4.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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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릉

예릉은 조선 제25대 철종(18311863) 및 왕비 철인왕후(18371878) 김씨의 능이다.

철종이라는 공식적인 이름보다 강화도령으로 더 잘 알려진 주인공 원범은 그 생애가 짧지만 남다른 삶을 살아 수많은 드라마가 만들어졌다. 할아버지는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이지만 아들 상계군이 반역을 꾀했다는 명목으로 강화도로 유배를 가는데 그때 철종의 나이는 14세였다.

5년간 즉 19살 때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던 원범은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순조의 비 순원왕후인 대왕대비에 의해 왕통을 물려받았다. 그야말로 신데렐라도 이와 같은 경우가 없을 정도인데 그가 왕이 된 것은 당대의 실권자인 안동 김씨들이 촌에서 농사나 짓던 원범을 만만하게 요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강화도령

그러나 그가 당대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족벌 서류가 어느 누구보다 탄탄하기 때문이다. 그는 순원왕후의 명으로 정조의 손자, 순조의 아들로 왕위를 계승한다. 한마디로 족벌만 보면 조선 왕조에서 최고의 서열이다.

재위 14년간 처음 3년은 대왕대비가 수렴청정하고 그 뒤로 내내 김씨들의 세도정치에 눌려 왕으로서의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지만 국내외 정황은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급변하고 있었다. 그의 재위 동안 이단시하던 천주교가 널리 퍼졌고, 동학마저 일어나는 등 극심한 혼란기를 겪었다. 탐관오리와 극심한 민생고로 인해 진주민란을 시작으로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고 이를 수습하고자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을 세웠지만 효과를 보지 못한다. 이는 오래된 세도정치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으로 결국 세상을 어지럽게 하고 백성을 속인다는 죄목으로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도 처형을 당한다.

사실 철종이 아무리 자질이 있었더라도 이들 곪은 환부를 제거할 수 없었다는 지적이 있지만 여하튼 재위 내내 내우외란이 끝이지를 않았다. 그래도 철종 자신이 어려서부터 모진 생활을 했으므로 기근과 한재 및 화재 등 어려움에 처한 백성들을 돕기 위해 구황과 구제에 열성을 보였지만 결국 고종, 순종을 거쳐 조선왕조가 멸망하는 직행로가 되어 아쉬움을 준다.

 

불에 탄 철종 어진

철인왕후(哲仁王后) 김씨는 안동 김씨 정권의 핵심 인물이었던 영은부원군 김문근의 딸로 185115살의 나이에 왕비로 책봉되었고 1858년 원자를 낳았으나 6개월 만에 사망했다. 후에 대한제국 고종의 추존으로 인해 사후 종묘에는 명칭이 황후로 격상되어 철인장황후김씨(哲仁章皇后 金氏)가 되었다.

철인왕후는 순조의 비였던 순원왕후 김씨 헌종의 첫번째 비인 효현왕후 김씨에 이어 세 번째로 안동 김씨로서 왕비가 된 이후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는 절정에 달하였다. 그러나 안동 김씨 친정을 위한 주청을 계속하다가 철종으로부터 신의를 잃게 되었고 이후 철종은 철인왕후를 찾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 반대로 왕후 본인은 한 번도 정사에 나서거나 가문을 두둔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어 신망을 얻었다는 말도 있다.

그런데 철인왕후의 호칭에 다소 혼동이 있다.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원칙적으로 선왕의 정실부인의 정식 명칭은 왕대비(王大妃). 하지만 보통 줄여서 대비라고 부른다. 따라서 소혜왕후인 인수대비, 인목왕후인 소성대비 등의 정식 존호는 인수왕대비, 소성왕대비다.

그런데 조선 말기로 오면서 순조헌종이 젊은 나이에 사망하는데 헌종이 아버지인 효명세자를 왕으로 추존하면서 왕실에 여성 웃어른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그래서 철종 대에는 선선선대왕비로 순조비 순원왕후, 선선대왕비로 추존 문조비 신정왕후 조씨, 선대왕비인 헌종비 효정왕후가 모두 생존해있으므로 대왕대비 위나 왕대비 아래에 새로운 단계를 만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왕대비 아래에 '대비'라는 단계를 새로 만들었다.

선대 왕비들의 서열이 대왕대비- 왕대비의 2단계에서 대왕대비 - 왕대비 - 대비의 3단계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효정왕후는 정희왕후, 소혜왕후, 문정왕후, 인원왕후, 정순왕후 등 이전 왕비들이 왕대비로 존봉된 것과는 다르게 '대비'로 불렸다. 그런데 철종 역시 젊은 나이에 사망하자 철인왕후도 왕대비가 아닌 '대비'의 칭호를 받았다.

고종이 즉위할 당시 선선선대 왕비 효명세자비 신정왕후 조씨와 선선대 왕비인 헌종비 효정왕후 홍씨가 모두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철인왕후는 철종 사망 15년 후인 1878년 자손 없이 42세로 1878년 창경궁 양화당(養和堂)에서 사망하였다.

 

<왕이 된 강화도령>

18496, 조선 24대 헌종이 23살의 젊은 나이로 후사도 없이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는다. 왕위 계승 지명권은 왕실 최고 어른인 순조비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갖고 있었는데 제25대 왕은 그야말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녀의 명을 받아 영의정 정원용(1783~1873)이 왕을 모시는 봉영(奉迎) 임무를 받았는데 그가 달려간 곳은 강화도다. 그런데 정원용조차 용상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나이는 얼마이며,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정원용의 경산일록(經山日錄)에 다음과 같은 당시의 일이 적혀있다.

 

내가 갖고 있는 유일한 단서는 대왕대비 전교에 적힌 이름뿐이었다. 강화도 갑곶나루에 이르러 배에서 내리니 강화유수 조형복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강화유수도 전교의 이름을 모르기는 매한가지였다.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한 초가집에 도착해서야 관을 쓴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가리키며 이름이 모(), ()자이고 나이는 열아홉이라고 말하는데 바로 전교에 나와 있는 이름자였다.’

 

강화도령 이원범(18311863)이 제25대 왕으로 되는 순간의 일이다.

 

흥선대원군

사실 순원왕후에 올려진 후보는 이원범 외에 3명이 더 있었다. 이하응, 이하전, 이경응이다. 이하응(18201898)은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으로 헌종이 승하했을 때 이미 30세였던 데다 종친부 고위직을 맡고 있어 제외됐다.

사도세자의 손자인 전계대원군의 아들이자 철종의 이복형인 이경응(18281901)22세나 되는데다 역적 집안이라 배제됐다.

선조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의 12대손 완창군의 아들인 이하전(18421862)은 헌종 사망당시 8세였으며 명석하고 기개도 넘쳐 왕위 계승자로 자주 언급되었으므로 결격 사항이 없었다. 문제는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안동 김씨에게 영특한 왕은 필요치 않다는 점이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기틀을 마련한 김조순(1765~1832)의 딸이었던 대왕대비 순원왕후는 안동 김씨 권력에 방해가 되지 않을 허수아비 왕을 원했고 적임자가 바로 이원범이었다.

사도세자는 후궁과의 사이에서 아들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 3명을 두었는데 은언군과 은신군은 행실이 좋지 않다고 하여 영조47(1771) 2월 제주도로 귀양을 갔고 은신군은 그곳에서 사망했다. 은신국이 사망하자 은언군은 3년 후 서울로 돌아와 왕족으로서 대우를 받고 살았다.

한편 은전군은 정조 즉위 후 홍상범 등이 꾸민 역모사건이 발생하자 누구를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느냐고 문초했을 때 은전군의 이름이 거론되어 은전군은 자진하도록 명을 받고 자진하였다.

은언군의 큰아들 상계군은 홍국영이 정조의 양자로 세우려다가 실패되자 강화도로 유배되고 그곳에서 자살하였다. 그래도 정조는 같은 아버지의 핏줄이라고 은언군과 조카들을 잘 보살펴 주었다. 그런데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여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정조를 따르는 무리들을 처치하기 위하여 벌인 순조1(1801) <신유박해> 때 은언군의 부인과 은언군의 아들인 상계군의 부인이 포함된다. 왕족인데도 천주교를 믿다가 발각되자 은언군과 그 부인, 상계군의 부인 송씨 그리고 며느리 신씨 즉 상계군의 부인이 함께 사사(賜死)된 것이다. 한편 은언군의 둘째인 풍계군과 막내인 전계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순조 30(1830) 무려 30년 후 풍계군과 전계군을 다시 서울에 와서 살도록 하여 이들은 왕족으로서 대우를 받고 살았다. 그런데 헌종10(1844) 민진용의 역모사건이 발생하여 이들이 전계군의 큰아들인 회평군을 왕위에 옹립하려 했다하여 전계군과 회평군은 사사되고 전계군의 둘째아들인 영평군과 막내아들인 원범이 강화도로 유배된 것이다.

현대 학자들의 판단에 의하면 이원범은 사실 4명 중 후계자로서 가장 부적절한 후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4년 뒤 이원범은 사약을 든 금부도사 대신 자신을 왕으로 모시려는 봉영 행렬을 맞았다. 서울 바깥에 살던 왕족이, 그것도 역모에 몰려 유배에 처한 죄인이 왕에 등극한 것은 고려와 조선 역사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