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세계문화유산(UNESCO)/조선왕릉

조선 왕릉(38) : 제2구역 서삼릉(4)

Que sais 2021. 4. 4.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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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녀들은 대부분 관비 출신이었던 만큼 천비의 신분에서 벗어나고자 부단히 애를 썼는데 그 유일한 방법은 양반의 첩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의녀를 첩으로 삼은 양반은 자신이 소유한 여종을 의녀 대신 관비로 넣고 의녀를 관비 신분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그렇게 되면 의녀는 양인 신분이 되고, 비록 서출이지만 그녀의 자식도 양인으로 살 수 있었다.

당시 의녀들은 양반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기녀처럼 노골적으로 술을 따르고 몸을 팔지 않으면서도 은밀히 정을 통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의녀들로서도 양반들과 비교적 가까이 상대할 수 있으므로 양반의 첩으로 들어가 신분상승을 꾀하는 것은 그녀들이 원하는 최고의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모

의녀의 기본 임무는 간병이다. 부인병에 대해서는 의원으로서 진맥·시침하고 임산부가 있으면 조산원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처방은 반드시 의원을 통해서 해야 하며 직접 처방을 지시할 수는 없었다.

여러 가지 제약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사회 참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조선시대에 여성들이 전문성을 갖고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점에서 의녀 제도는 매우 의미가 깊다. 더욱이 의녀는 침구뿐만 아니라 산부인과 교육도 특별히 받았기 때문에 산파의 기능도 갖고 있어 뒤에는 독립된 직업인으로서의 산파가 나타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의녀가 부녀자에 대한 의료 시혜라는 측면과 새로운 여성 직업인을 탄생하게 하는 등 사회에 기여한 공이 적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상의 설명을 보면 사실 조선왕조에서 가장 중요한 여성 전문 의료는 모두 의녀가 담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보다는 약간 급이 낮지만 다모의 역할도 중요했다. 특히 수사관은 의학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 있어야 하는데 의녀 수업에서 탈락해 다모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의학에 대한 기본 지식을 갖고 있었음은 틀림없다.

이는 의녀의 교육과정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박영규 박사는 의녀가 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의녀는 총 3단계로 나뉘는데 첫 단계는 초학의로 오직 학업에만 전념하는 시기다. 기간은 대체로 3년으로 그동안 천자문, 효경, 정속편등의 책을 익히고 인재직지맥, 동인침혈침구경, 가감십삼방, 태형혜민화제국방, 부인문산서등 의서와 요즘의 수학인 산서를 배운다.

성적이 나쁘면 원래 신분인 관비의 자리로 돌려보내는데 이때 생기는 빈자리는 비자 중 한 명을 선택해서 채운다. 초학의 3년 기간이 끝나면 간병의(看病醫)가 된다. 이 때는 의원을 보조하고 간병을 하며 병에 대해 익힌다. 기간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은데 특정 분야를 빨리 익혀 뛰어난 의술을 보이면 내의로 발탁되고 그렇지 않으면 40살까지 간병의로 남아야 한다. 40살이 지났는데도 전문의가 되지 못하면 본역인 관비 신세로 돌아가야 한다.

간병의 중에 뛰어난 능력을 보인 2인을 선택하여 내의녀(內醫女)가 되게 하는데 내의녀가 되면 비로소 월급이 나오며 계절에 한 번씩 녹봉을 받을 수 있는 체아직에 임명된다. 명실 공히 관직을 얻는 것이다.

체아직이란 특별한 경우에 녹봉을 주기 위해 만든 관직으로 정해진 녹봉은 없고 1년에 네 차례 근무 평정에 따라 녹봉이 주어지지만 직책은 보장되지 않는다. 조선시대의 무반직 중 하급직은 대부분 체아직이었으며 기술 관료나 훈도들도 체아직이었는데 대장금에게 체아직의 녹봉을 주라고 한 것은 대장금이 얼마나 탁월했음을 알 수 있다.

 

<장경왕후 희릉>

장경왕후의 처음 능지는 태종이 묻힌 헌인릉 옆에 있는 산줄기이다. 그런데 장경왕후의 장사는 그야말로 속전속결로 그녀가 사망한지 불과 두 달 만에 매장을 완료했다. 원래 왕과 왕비는 법으로 5개월 장을 치르도록 돼 있으므로, 3월에 사망했으니 7월에 장례를 치르는 것이 정상이다. 일부 신하들이 신속한 장례를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속전속결로 장례를 치른 것은 당대의 절후 때문이다. 5월에는 좋은 날이 없고, 6월은 장마철이라 땅이 질 염려가 있고, 또 장지로 가려면 많은 나루를 건너야 하는데, 장마로 물이 불으면 건너기가 어렵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결국 장삿날 왕비의 관을 실은 대여는 한강을 건너기 위해 무려 배 500척을 동원한 부교 즉 배다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장경왕후의 능은 중종 32(1537) 지금의 서삼릉 자리로 이장했다. 희릉이 이곳으로 옮겨진데도 깊은 사연이 있다. 장경왕후는 인종과 효혜공주를 낳았다. 이조판서 김안로는 자신의 아들 희가 효혜공주와 혼인해 중종의 부마가 되자 권력을 남용하다가 영의정 남곤, 대사간 이항 등에 의해 탄핵을 받고 유배됐다.

그런데 그가 복귀하여 정적들을 제거하려고 세자(인종)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옥사를 일으키는데 그중 하나가 희릉 천장사건이다. 김안로는 정적인 정광필, 남곤 등에게 중죄를 주려고 희릉 밑에 큰 돌이 깔려 있는데도 그대로 공사를 감행했다고 주장했다.

풍수지리상 돌이 광 밑에 깔리면 불길한데 희릉 광중에 큰 돌이 깔렸음에도 그대로 공사를 감행했다며 왕비의 능을 이장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왕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음에도 계속 왕을 압박했다. 땅속에 흐르는 생기는 흙을 몸으로 하고 있어 돌산에 장사를 치른다면 흉이 생겨나고 이미 받고 있는 다른 발복도 소멸된다는 주장이다.

중종은 20여 년 동안 아무 일 없었는데 새삼스럽게 문제 삼는다며 이장에 신통치 않은 반응을 보였지만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는 말에 결국 장경왕후의 천장에 동의하여 중종 32(1537)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김안로는 이를 이용해 공사당시 총호사였던 정광필과 지관, 공사를 담당했던 관리들을 대역죄인으로 몰아 결국 신분을 박탈하고 자손까지 처벌하였다. 당시 경빈 박씨와 소생 복성군을 '작서(灼鼠)의 변()'을 일으켜 쫓아내고 사사한 사건 등이 모두 김안로가 꾸며낸 일들이었다.

작서의 변이란 중종의 1계비 장경왕후 윤씨가 세자를 낳고 산후병으로 죽자, 왕의 총애를 받은 경빈(敬嬪) 박씨는 자기 소생인 복성군을 세자로 책봉할 야망을 품고 있었다때마침 15272월 세자(인종) 생일에 쥐를 잡아 사지와 꼬리를 가르고, ··눈을 불로 지져서 동궁의 북정(北庭) 은행나무에 걸어 세자를 저주한 사건이 일어나자, 김안로 등은 이것을 복성군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경빈의 짓이라 하여, 경빈과 복성군의 작호(爵號)를 빼앗아 서인으로 내친 후 1533년에는 모자를 모두 사사(賜死)하였다. 1541년에 이 사건을 조작한 자가 김안로의 아들 김희(金禧)라는 것이 밝혀져, 경빈과 복성군은 신원되었다.

천장 후 옛 희릉에 묻혀 있던 석물들은 철종 8(1857) 순조의 인릉을 천봉하면서 일부를 상설에 이용하였고 옮기지 않은 석물은 다시 땅 속에 묻었다.

그러므로 희릉은 천장되면서 곡장, 난간석, 석호 및 석양 각 2, 혼유석 1, 장명등 1, 문무석인 각 1, 석마 2쌍이 놓였다. 희릉은 병풍석이 없고 12간의 난간석만 둘렀지만 조선 전기의 왕능제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는데 특징이 있다. 왕릉의 격에 맞게 조성됐으므로 단명한 왕후의 능치고는 석물도 매우 규모가 크고 곡장이 둘려지고 석양과 석호가 봉분을 호위하고 있다.

문석인 2구는 중계, 무석인 2구는 하계에 자리잡고 있다. 높이는 약 320cm인데 과거에 비해 더 크고 육중해졌으며 얼굴이 크고 움츠린 자세여서 신체비례가 3등신으로 보인다. 석인상의 크기는 희릉과 태릉이 최대치를 보이는데 이는 16세기 석인상의 특징이기도 하다.

정자각은 정전 3, 배위청 3칸이며 가구는 정전이 5량가, 배위청은 3량가다. 지붕은 정전과 배위청 모두 맞배 겹처마로 박공면에 풍판을 설치했다. 포작은 정전이 이익공이고 배위청은 초익공이다. 용마루에는 적새를 쌓고 앞뒷면에 회를 바르는 양상도회를 했으며 정전의 내림마루에만 잡상을 설치했다. 배위청 앞과 좌우에 월대를 설치했는데 정면 폭은 정전의 기단너비에 맞추고 월대 전면너비는 1,500mm로 비교적 좁은 편이다. 월대의 경우 처마 바깥 부분은 비가 쉽게 흘러내리게 하기 위하여 바깥쪽으로 약간 경사를 두었다.

 

홍살문은 팔각 초석을 3,995mm 간격으로 배치하고 그 위에 5,613mm의 기둥을 세워 만들었다. 기둥의 아래 뿌리를 초석에 깊이 박았지만 비가 오면 초석과 기둥 틈사이로 스며든 물을 배수하기 위해 초석의 하단부에 구멍을 내었다.

이창환 교수는 팔각장명등은 영조 때 추봉돼 만든 온릉 등에 비해 세련되고 웅장해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걸작이라고 평가했다. 조선왕실의 능제도를 충실하게 도입했으므로 입구인 홍살문부터 왕릉 출입시 참배하는 곳인 배위, 정자각, 비각, 제향 후 축문을 태우는 예감 등을 일목연하게 볼 수 있다.

우리나라 마을 앞 정자나무의 대부분이 느티나무다. 오래 살고 가지를 많이 뻗어 쉼터를 충분히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나무는 결이 곱고 황갈색의 색깔에 약간 윤이 나며 썩거나 벌레가 먹는 일이 적은 데다 무늬도 아름답다. 갈라지거나 비틀림이 적고 마찰이나 충력에 강하며 단단하기까지 하여 나무가 갖추어야 할 모든 장점을 갖고 있다. 왕릉의 중요부분에 많은 느티나무를 심었는데 희릉 정자각 옆의 느티나무는 특별히 거대하다.

 

참고문헌 :

醫女 장금, 역사적 사실과 드라마 속 모습 차이, 주정, 중앙일보, 2004.02.02.

의녀, 남녀칠세부동석의 산물, 이남희, 월간중앙 역사탐험, 2004.02

[을 만나다·15]서삼릉-희릉(11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정종수, 경인일보, 2010.01.07.

숙의에서 행운의 왕비로인종 낳고 산후병으로 승하, 이창환, 주간동아, 2010.07.26.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국왕 주치의 '대장금', 이기환, 경향신문, 2013.03.06

'대장금''여인천하' 부른 장경왕후의 최후, 권경률, 머니투데이, 2017.07.01.

[세계유산 조선왕릉 - 고양 서삼릉의 희릉(高陽 西三陵 禧陵. 사적 제200)], 문화유산여행, 문화유산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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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과 궁녀, 박영규, 김영사, 2004

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 전 한국을 걷다, 아손 그랩스트, 책과함께, 2005

조선을 위흔든 16가지 살인사건, 이수광, 다산초당, 2006

파시, 여설하, 도서출판 큰방, 2007

조선 최대의 과학수사 X파일, 이종호, 글로연, 2008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 III, 국립문화재연구소, 2012

역사로 여는 과학문화유산답사기1 : 조선왕릉, 이종호, 북카라반,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