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세계문화유산(UNESCO)/조선왕릉

조선 왕릉(69) : 제3구역 헌인릉(11)

Que sais 2021. 4. 12.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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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의 천하>

홍경래 난은 조선 초유의 반란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이후에도 계속 사회혼란이 일어나 1813년 제주도와 1815년 용인에서 민란이 일어났고 계속하여 민란과 모반사건이 일어났다. 급기야 1821년에는 서부지방에서 전염병이 크게 번져 무려 10여 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국내에서 우환이 계속됨에도 불구하고 순조는 백성을 살피려는 마음을 잊지 않았다고 알려진다. 어린 나이에 즉위해 정권의 험한 물살에 휩쓸린 순조이지만 순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왕이라는 설명이다. 순조26(1826) 봄 굶주리는 백성들을 보고 순조는 한탄한다.

 

집집마다 들어가 보면 텅 비어 있고 마을마다 나가 보면 밥 짓는 연기가 끊겼다. 백성의 부모가 되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충분히 먹고 배를 두드리는 즐거움을 누리게 하지는 못할지언정 흉년 들어 굶주려 죽는 이들조차 구제하지 못하니, 내가 무슨 마음으로 쌀밥과 비단옷을 편안하고 아름답게 느끼겠는가?’

 

순조는 굶주린 백성들의 처참한 상황을 알고 왕실 곳간을 열어 백성들을 구제하는데 앞장 섰다. 홍경래의 난을 진정시킨 뒤에도 가장 먼저 살핀 것 역시 민생이었다. 그러나 그가 민생에 신경을 기우렸다고 해도 세상의 문제점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시대부터 안동김씨가 권력을 잡아 헌종철종대에 이르는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결국 조선왕조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지적하는 학자들도 있다.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는 영안부원군 조순의 딸로 1800년 초간택재간택을 거쳐 정조가 갑자기 사망하여 삼간택이 연기되었다가 180210월 왕비로 책봉되었다. 삼간택 문제를 놓고 시벽파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 당시 정순왕후의 오빠인 김관주는 순원왕후의 간택을 방해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왕비로 책봉되었고 가례를 올린 지 7년 만인 180920세 때 효명(孝明)세자인 문조를 낳았다. 문조는 1812년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830년 왕이 되지 못하고 22살에 사망했다. 아들 헌종이 즉위하여 1834년에 익종으로 추종되었다.

그녀는 그뒤에도 세 명의 공주를 계속 순산하는 등 대체로 다복한 생활이었다고 말할 만하다. 특히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중심에 서서 헌종철종까지 두 번의 수렴청정을 하는 특별한 경력을 남겼다.

조선시대에 수렴청정은 모두 7차례 시행되었는데, 19세기 이후에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성종 때 세조비 정희왕후(7), 명종 때 중종비 문정왕후(8), 선조 때 명종비 인순왕후(8개월), 순조 때 영조비 정순왕후(4), 헌종·철종 때 순조비 순원왕후(7, 3), 고종 때 익종비 신정왕후(4)이다.

순원왕후는 헌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영조의 혈맥을 잇기 위해 전개대원군의 셋째 아들을 지목해 소위 강화도령인 철종으로 왕통을 잇게 하고 자신의 친정인 김문근의 딸을 철종의 왕비로 삼게 함으로써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절정기를 이루었다.

조선 왕조의 실세가 안동김씨로 넘어갔다고는 하지만 순정왕후가 수렴청정에서 가장 중점을 두었던 현안은 민생이었다. 왕후는 자연재해 등으로 고통을 겪는 백성에게 조세를 탕감해 주고, 다른 지방의 곡식을 이용해 진휼(賑恤) 즉 흉년을 당하여 가난한 백성을 도왔으며 부족한 재정은 왕실 재정인 내탕(內帑)으로 해결했다. 물론 순원왕후가 남다른 민생에 공을 들였다고 하지만 문제의 근본은 그녀가 일원이었던 세도정치에 있었으므로 궁극적으로 대부분의 시책은 부분적인 효과로 그칠 수밖에 없었다.

순조의 릉은 원래 파주에 있는 인조의 장릉(長陵) 좌측에 조성되었으나 풍수가 좋지 않다 하여 철종 7(1856) 현 위치로 이장했으며 다음해에 순원왕후도 순조와 함께 합장되었다. 인릉 천장에서 가장 두드러진 사실은 근처에 있던 구 영릉, 구 희릉의 석물을 재사용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인릉의 영역에 이미 선대의 능소로 사용되었던 구 영릉(英陵)과 구 희릉(禧陵)이 포함되었고 그 가운데 구 영릉 혈에 인릉 혈을 사용했음을 의미한다.

 

인릉 천릉 당시 먼저 구 영릉의 발견석물을 쓰고 모자라는 것은 구 희릉의 것으로 사용했으며 일부는 파주 인릉의 구릉지의 석물을 가져다 썼다. 그래도 부족하면 새로 제작했다.

인릉은 하나의 봉분에 순조와 순원왕후를 합장한 합장릉이지만 외형상 혼유석을 1좌만 설치한 단릉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봉분에는 난간석을 두르고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능상에는 곡장 3면과 난간석 12, 석양과 석호 각 2, 혼유석 1, 망주석 1, 장명등 1, 문무인석 각1쌍과 석마가 배치되어 있다. 봉분 형식은 크게 네 가지다.

 

병풍석과 난간석이 감싸고 있는 봉분

병풍석에 난간석이 없는 봉분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만 있는 봉분

병풍석과 난간석 모두 없는 봉분

 

인릉의 석상은 봉분 앞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데 인릉 천릉 시 근처 세종 영릉의 구릉지에 매설되었던 석상을 재활용한 것이다. 또한 족석 역시 1466년 영릉(소헌왕후릉)을 처음 조성할 때 제작된 것을 재활용 한 것이기 때문에 표면에 새겨진 나어두문은 19세기 양식이 아니라 15세기 문양 형태로 조각되었다.

인릉의 망주석은 서로 다른 시기에 조성된 석대로 구성되어 있다. 망주석의 원수와 주신, 대좌의 상대석은 1856년 천릉 시 새로 조성하였으며 대좌의 증대, 하대석은 1515년 조성된 구 희릉의 석물을 재활용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인릉 망주석은 신구 양식을 모두 가지고 있어 조선왕릉 망주석 중에서도 특이한 사례에 포함된다. 인릉 장명등은 전체 높이 261cm의 팔각 장명등이다. 그러나 이 장명등도 1445년에 조성된 구 영릉 석물을 각각 개수하여 재사용했으므로 인릉 자체는 19세기에 조성되었지만 장명등은 1516세기 초 양식을 나타낸다.

4기의 문인석과 무인석은 사람의 생김새는 물론 석물의 생김새도 각각이지만 생기 있는 표정과 이목구비의 표현 등이 매우 사실적으로 새겨져 섬세하고 아름답다. 이런 현상은 석물을 만든 사람이 한 사람이 아니므로 각각 다른 형태로 조각했다고 추정한다. 18세기 후반의 사실주의적 양식이 도입된 것으로 조선 후기 석물조각의 대표적 석물로 꼽힌다. 특히 무인석은 순조 때 홍경래의 난 등 각종 민란을 물리친 무인상의 모습처럼 우람하고 근엄하게 조각돼 있다.

인릉의 정자각은 정전 3, 배위청 2칸으로 하는 5칸 정자각이며 정전의 구체적인 간잡이는 정면 3, 측면 2칸이다. 정자각 상부의 가구 구조는 5량가, 배위청은 3량가다. 지붕은 정전과 배위청 모두 맞배에 겹처마로 박공면에는 풍판을 설치했다. 포작은 정전이 출목 2익공, 배위청이 출목이 없는 2익공이다. 지붕 용마루는 적새를 쌓고 전후면에 회를 발라 마감하는 양상도회했으며 좌우에 취두를 설치했다. 잡상은 정전과 배위청의 내림마루에 각 3개씩 설치했다. 정전 내외부와 배위청에는 모두 단청을 하고 정전의 좌우면과 뒤쪽의 벽은 중방까지 벽돌을 쌓아 화방벽으로 마감했다.

 

정자각의 내외부 기둥, 인방 및 중방은 모두 석간주칠, 창방 이상은 부재 끝부분만 문양을 넣고 가운데는 긋기로 마무리한 모로단정으로 되어 있으며 벽면은 육색칠이다. 정자각의 후면 어칸에 설치된 신문과 정면 3칸에 설치된 세살청판사분합문에는 양록칠이 되어 있다. 정전 및 배위청의 기둥하부의 주근도배 흔적에 따라 분칠 바탕에 청색띠칠되어 있다.

인릉의 비각에는 2개의 비석이 있는데 하나는 철종 8(1857) 천장 후 조영을 할 때 철종이 자신을 일개 농군 강화도령에서 왕으로 발탁해준 순원왕후에 대한 고마움에서 직접 표석의 글을 써서 세운 것이고, 또 하나는 고종이 순조를 순조숙황제로 추존하면서 1900년에 세운 것이다. 인릉의 석물 일부는 선대 세종과 소헌왕후의 영릉 바로 옆에 조영됐던 희릉 초장지의 석물을 사용해 조영한 것으로 산릉도감의궤조선왕조실록에 전한다. 이창환 교수는 이러한 기록물은 조선 왕릉이 세계유산에 등재될 때 진정성을 인정받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적었다.

재실은 헌인릉으로 들어가는 목전에 있는데 당초에는 능역 안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중간 부분이 한국전쟁 이후 농지 등으로 분리되어 현재의 헌인릉 구역과는 완전히 다른 곳에 위치하며 현재 관리사무소로 사용되고 있다.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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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엔 다빈치코드뺨치는 컬처코드, 윤완준, 동아일보, 2009.06.29.

[을 만나다·31]헌릉 (3대 태종·원경왕후), 정종수, 경인일보, 2010.04.29.

[을 만나다·32]인릉 (23대 순조·순원왕후), 염상수, 경인일보, 2010.05.06

[을 만나다·39]의릉 (20대 경종·계비 선의왕후), 이창환, 경인일보, 2010.07.08.

수렴청정과 세도정치 왕은 허수아비 신세였다, 이창환, 주간동아, 2011.01.24.

순원왕후, 김범, 네이버캐스트, 2012.04.09

[박현모의 실록 속으로] 태종 이방원의 외교 전략 먼저 나서 사태를 제압한다, 박현모, 조선일보, 2021.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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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대군/생애, 나무위키

양녕대군, 위키위키

http://www.chunji-in.com/news/articleView.html?idxno=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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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여는 과학문화유산답사기1 : 조선왕릉, 이종호, 북카라반, 2014

우리도 몰랐던 한국사 비밀 32가지, 이수광, 북오선, 2015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 VIII, 국립문화재연구소,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