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 국가에서의 불교>
조선시대에 불교가 이단으로 배척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찰들이 유교로 똘똘 뭉친 유생들이나 관아의 수탈을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은 당대의 상황으로 볼 때 그야말로 기적이나 마찬가지다.
역사상 종교 문제로 수많은 문제를 일으켰는데 조선의 유교와 불교의 싸움도 이에 못지 않다. 조선이 불교를 반대하고 일어선 유교국가이므로 더욱 그러한데 이유는 간단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사라지지 않았는데 이는 조선시대 불교를 보호하는 큰 버팀목이 있다는 뜻이다. 이유는 왕실 여인들의 적극적인 정치적·경제적 비호가 있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그 중에서도 조선시대 최고의 대화주로 단연 정희왕후와 문정왕후를 꼽는다. 정희왕후부터 설명한다.
그녀는 해인사에서부터 원각사, 상원사, 신륵사, 용문사, 낙산사, 봉선사, 회암사 등 수많은 사찰의 창건과 중건에 관여했다. 그녀가 조선시대 최대의 화주로 이름을 남긴 데에는 그럴만한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그녀 자신뿐만 아니라 남편인 세조 또한 조선 최고의 호불군주(護佛君主)로 꼽힐 정도로 독실한 불자였다는 점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그들이 노골적으로 호불을 내세웠던 가장 큰 이유는 세조가 유교 이데올로기 내에서는 결코 인정받을 수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문종도 조기에 사망토록 유도했다는 의혹을 받으면서 왕위에 오른 세조는 유교적 명분론 내에서는 결코 인정받을 수도 인정되어서도 안 되는 패륜아에 지나지 않았다.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스스로 주공(周公)이 되겠다고 만천하에 약속했지만 단 4년이 지나 그 약속을 번복하고 어린 조카를 왕위에서 몰아내었고 뒤이어 자객을 보내 살해까지 했다. 그러므로 결코 자랑스러운 과정을 거쳐 왕위에 오르지 못한 세조는 자신을 부정하는 유교 대신 불교적 이상세계를 표방하는 군주임을 자처했다.
남편인 세조가 불교를 옹호하는 정책을 펼치므로 정희왕후 또한 불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다른 왕비들에 비해 정희왕후의 이름이 유난히 사찰의 중창기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그녀가 다른 이들에 비해 훨씬 자유롭게 자신의 불교신앙을 드러낼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로는 정희왕후 개인의 불행을 들 수 있다. 정희왕후는 살아생전 남편과 자신이 낳은 세 자식을 모두 저세상으로 떠나보냈다. 세조가 왕이 된지 3년 만에 추후 덕종으로 추종되는 첫째아들 의경세자를 잃었다. 그를 이어 세자의 뒤를 이은 둘째아들 예종은 한명회의 딸과 결혼했으나 1461년 세자빈이 아들을 낳은 지 5일 후 사망했고 원자 역시 2년 뒤에 죽고 말았다.
또한 세조는 왕위에 오른 후 온몸에 종기가 나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다가 1468년에 세상을 떠났고, 예종 또한 보위에 오른 지 1년 만에 죽었다. 8년 뒤에는 외동딸 의숙공주마저 요절했다. 그야말로 줄줄이 상을 치룬 것이다.
의경세자는 죽기 전에 항상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 권씨의 악몽에 시달렸더고 알려지며 세조의 꿈에 현덕왕후가 나타나 침을 뱉자 세조의 온몸에 종기가 났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야사로 전해온다.
자식들이 연달아 죽고, 남편이 피부병으로 고통 받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정희왕후는 남편의 손에 죽은 많은 사람들의 원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히 세조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봇물같이 등장하는데 이 단계에서 세조는 단종을 보필하던 김종서와 황보인에 이어 단종복위운동을 벌인 사육신들을 죽인 다음, 결국 자신의 조카마저 죽였다.
더불어 세조가 왕위에 오른 직후부터 연달아 자식들이 죽어갔으니 그녀가 이를 무참히 죽어간 원혼들과 관련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리한 일은 아니다. 특히 민심이 흉흉하여 하늘이 버린 왕실이라는 소문이 퍼진다면 세조는 물론 조선왕실의 존립조차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죄의식과 위기감은 그녀로 하여금 더욱더 불사에 열중하도록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세조의 왕위찬탈 과정에서 희생된 이들의 원한을 달래기 위해, 또한 자신의 업보를 갚기 위해 불사에 열을 올렸다는 설명이다.
세조가 몸져누웠을 때 그녀는 속리산으로 신미 스님을 찾아가 고통을 호소했고, 스님은 그녀에게 오대산 중턱에 사찰을 지으라고 권유했다. 이렇게 해서 지어진 사찰이 바로 오대산 상원사다. 또 세종의 능지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라는 말에 세종의 무덤을 여주로 천장하고, 부근에 폐사한 절을 중창해 신륵사를 세웠다.
더불어 정희왕후가 조선 최초로 섭정의 지위에 오른 대비였다는 점 또한 그녀가 대화주로서 명성이 높은 이유 중의 하나다. 예종이 재위 1년 만에 갑자기 죽자 정희왕후는 의경세자의 둘째아들 자산군을 성종으로 세웠다.
당시 열세 살에 불과했던 어린 성종을 대신하여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됐다. 왕실의 최고 어른이자 왕권의 대행자가 된 그녀는 더욱 적극적으로 전국 명산대찰의 불사를 지원했고, 불경을 편찬했으며, 이로 인해 조선불교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
정희왕후는 자신의 삶에 드리워진 죄의식과 두려움을 불교를 통해 극복하려고 했다.
물론 세조와 정희왕후가 불교를 보호하고 장려한 독실한 불자였다고 해서 그들이 지은 악업마저 모두 가려지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탁효정 기자는 그들이 불자인 동시에 권력의 생리를 좇았던 야심가들이었고, 욕망하는 바를 성취하기 위해 자신들이 생각하는 ‘작은 선(善)’을 무시하고 무조건 앞으로 나아갔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간단하게 말하여 세조가 정말 자신의 잘못을 후회했는지, 후대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지어냈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세조는 말년에 이르러 자신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 깊이 참회했다는 말은 많이 알려져 있다. 여하튼 그런 여파에 의해 세조와 정희왕후의 발원으로 조성된 수많은 불교 유산들이 현재 우리들에게 보임은 물론이다.
<호불왕비 문정왕후>
정희왕후의 후대인 문정왕후야말로 호불왕비(護佛王妃)로 불리는데 그녀는 바로 이 때문에 수많은 역사서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하는 왕비 중 한 명이다. 조선사에서 그녀가 이와 같은 대접을 받는 것은 그녀에 의해 실질적으로 불교가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김용대 박사는 그녀에 의해 불교가 기사회생의 전기를 마련했다고 말하는데 어린 명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에 어느 정도 이력이 쌓이자 문정왕후는 명종 5년(1550) 선종과 교종의 양종을 다시 세우는 명을 영의정 상진에게 내렸다.
‘승도의 수가 날로 늘고 군액이 점차 감소하고 있는데 승도를 다스리지 못하면 잡승을 금하기 어렵다. 조종의 『경국대전』에서 선종과 교종을 설립했던 것은 불도를 숭앙하기 위해서가 아니며 승려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근래 이것이 혁파되면서 그 폐단을 장차 구제하기 어려우니 양종을 다시 세우고 『경국대전』의 승과와 도승조를 다시 거행하는 것이 좋겠다.’
이를 보면 공식적으로 양종과 승과를 재개시켜 승도의 증가로 인한 폐단을 최소화하고 교단을 통제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운 것이다. 문정왕후가 언관과 유생 등의 격렬한 반대와 빗발치는 상소에도 불구하고 굳굳히 자신의 소신을 밀고 나간 것은 이와 같이 나름대로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문정왕후는 이단의 가르침에 미혹된 것이 아니며 시세에 맞추어 국가의 폐단을 구제하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여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양종의 재건 이유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이지만 양종의 재건은 역을 피해 승려가 된 무도첩 승려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정책방향에 의한 것이다. 이는 불교를 공인해 국가에서 직접 관리하고 규제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라는 현실적 판단에서 기인한다. 중종 후반기인 1530년대에 불법적 승도의 급증이 정치쟁점화 되었는데, 당시 조정의 논의를 보면 매우 흥미있는 이야기가 나온다.
‘지금 불교의 쇠퇴함이 가장 심하지만 승도의 수가 많은 것도 이전보다 매우 심하므로 제방을 쌓는 역사 등에 승도를 동원할 방도를 강구해야 한다. 지금 사찰이 여전히 많고 승속이 섞여서 문제를 일으키는 등 불교를 숭봉할 때보다 그 해로움이 더 하므로 제어할 필요가 있다.’
그 방안으로 대규모 공역에 승도를 활용하고 대가로 호패를 지급하는 ‘역승급패’의 방안이 시행되었다. 양종이 복립되고 나서 1555년에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승군이 조직되었는데 이 또한 승도를 국가정책상 활용해야 하는 현실적 필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불교 중흥책과 비견하여 주목되는 것은 선교양종의 재건과 함께 연산군과 중종 때 중단되었던 승과가 시행되었다는 점이다. 양종판사의 주관과 예조정랑의 참관 하에 거행되었는데 1552년 4월에 승과에서 선종 21명, 교종 12명이 최종 합격되었다. 과거 즉 승과를 통과한 승려들은 남다른 자부심을 갖고 있었는데 이들은 승직을 부여받고 내원당 등 왕실 관련 사찰의 주지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들 승과 출신이 불교계를 주도하게 되었는데, 예를 들어 처음 열린 승과 출신인 휴정(1520~1604)은 1555년 교종판사에 이어 선종판사를 겸임하였고 보우가 맡았던 선종본사 봉은사 주지를 맡았다. 유정(1544~1610) 즉 사명대사 또한 1561년의 승과 급제 후 봉은사 주지로 천거되는 등 두각을 나타냈다. 봉은사가 당대 최대 사찰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들이 승과에 급제했으므로 이와 같은 파격적인 임명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학자들은 당시 승과는 교계를 주도하는 고위급 승려를 배출하는 원래의 목적 외에 도승을 위한 편법으로 활용되었다고 설명한다. 이는 이전부터 급증한 무도첩 승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일종의 미봉책이었는데, 양종이 재건된 다음 해인 1551년에 식년이 아님에도 선종의 시경 시험을 보았고 이때 406명이 합격하였다. 또 1552년 정식 식년시 때도 도별로 인원이 배정되어 총 2,600명이 선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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