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세계문화유산(UNESCO)/조선왕릉

조선 왕릉(53) : 제3구역 태강릉(1)

Que sais 2021. 4. 8.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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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북부에 있는 제1구역과 제2구역의 능을 답사한 후 3번째의 답사는 기본적으로 서울 시내에 있는 왕릉이다. 3구역은 태강릉, 의릉, 헌인릉, 선정릉을 목표로 하는데 서울시에 있음에도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서울이라는 도회지 안에 있으므로 오히려 유명세를 받지 못하고 푸대접 받고 있다고 설명될 정도다. 다행히 이들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자 일반인들의 관심들도 높아져 근래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각각의 왕릉이 갖고 있는 뜻 깊은 의미를 잘 모르는 것은 사실이다. 이들은 서울시내에 있으므로 자동차보다는 지하철, 버스 등 대중교통을 추천한다.

태강릉(太康陵, 사적 201)은 제11대 중종 제2계비 문정왕후 윤씨의 능인 태릉과 제13대 명종 및 인순왕후 심씨의 능인 강릉으로 나뉜다. 원래 동일한 능역 안에 있었지만 개발 등의 여파로 완전히 분리된 상태나 마찬가지로 태릉과 강릉의 입구도 다르다. 태릉의 입구에 <조선왕릉박물관>이 건설되어 있는데 전시관 안에는 국장 절차와 조선왕릉의 건설 방법과 부장품, 조선왕릉에 담긴 역사와 문화, 산릉제례를 포함한 왕릉의 관리 등에 대한 상세를 보여주고 있다. 왕과 왕비가 사망한 후 왕릉에 묻히기까지의 국장 절차를 살펴본다.

 

사망 당일 초종(初終)이라 하여 사망을 확인 후 돌아가신 왕의 혼을 부른다.

이를 복()이라 하며 곧바로 삼도감을 설치한다. 장례는 철저한 격식에 의해 진행되는데 습()이라 하여 시신을 목욕시키고 9겹의 옷을 입힌다. 또한 종묘와 사직에 고하는 고사묘(告社廟)를 거친다. 이후 소렴(小殮)이라 하여 19겹의 옷을 입히고 이불로 감싼다(3일째). 5일째에는 대렴(大斂)으로 90겹의 옷을 입히고 재궁으로 모시고 빈전으로 운반하는데 이를 성빈(成殯)이라 한다. 신하들은 모두 상복으로 갈아입으며 사위(嗣位)라 하여 새 왕이 즉위식을 올린다. 이후 발인(發靷)하여 왕을 왕릉에 모신 후 신주를 모시고 궁으로 돌아오는데 이를 반우(返虞)라 한다. 이후 첫 번째 기일(1년째)에 제사를 지내는데 이를 연제(練祭)라 하고 2년 이후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부묘(祔廟)로 조선의 국장은 일단락된다. <조선왕릉박물관>에 이들 내용을 유물과 영상을 통해 볼 수 있으므로 어렵게만 느껴지는 왕릉의 실체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태릉을 답사할 때 반드시 방문하기 바란다.

 

태릉

태릉은 조선 왕조 제11대 왕인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15011565) 윤씨의 능으로 왕비의 봉분 1기만 있는 단릉이다. 문정왕후 윤씨는 중종과 인종, 명종 3대에 걸쳐 왕비와 대비로 있으면서 정권에 개입하는 등 조선왕조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조선을 회오리 바람 속으로 몰아넣은 양대 사화와 불교부흥에 앞장선 역사적인 인물로 알려진다.

문정왕후의 불교에 관한 일화는 뒤에서 설명하며 을사사화와 연계된 정난정에 대한 에피소드만 적는다. 정난정의 일화는 그야말로 한편의 드라마와 같다. 그녀의 아버지 정윤겸(鄭允謙)은 부총관을 지냈지만 어머니는 관비 출신이므로 위계가 철저한 조선에서 그녀가 일어설 기회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난정은 이 기회를 반전시키기 위해 우선 기생이 되었다. 당대에 기생은 고관과 자주 자리를 어울릴 수 있으므로 격이 낮은 여자가 신분 상승을 꾀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녀의 기대대로 문정왕후의 동생인 소윤 윤원형(尹元衡)의 첩이 되었다. 마침 명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고 모후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정계는 모두 윤원형 쪽으로 쏠린다.

 

곧바로 윤원형은 명종과 문정왕후에게 인종의 척족 윤임(尹任)이 그의 조카 봉성군(鳳城君, 중종의 8)에게 왕위를 잇게 하려 획책한다고 무고하였다. 이는 인종의 외척인 대윤(大尹)과 명종의 외척인 소윤(小尹)의 반목으로 빚어진 권력다툼으로, 대윤의 우두머리인 윤임 등이 이를 근거로 반역음모죄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되는데 이를 을사사화(乙巳士禍)’라고 한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정난정은 윤원형의 정실 김씨를 몰아내고 적처(嫡妻)가 되었고 윤원형의 권세를 배경으로 상권을 장악하여 전매, 모리 행위로 많은 부를 축적하였으므로 비난이 자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어 궁궐을 마음대로 출입하였는데 1553년에는 외명부 종1품 정경부인(貞敬夫人)이 되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정난정에 대한 사가들의 평은 비난으로 꽉 차있지만 조선왕조에서 큰 역할을 한 점도 있다고 설명한다. 그녀는 자신의 출신을 잘 알고 있으므로 윤원형을 움직여 적자와 서자의 신분차별을 폐지하고 서자도 벼슬길에 나설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당시로서는 신분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획기적인 정책으로 신분제도 때문에 좌절한 사람들에게 커다란 호응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그녀의 파격적인 행위에 불만을 가진 사대부들은 정난정의 후원자인 문정왕후가 죽기만을 기다렸다. 결론적으로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정난정은 사림의 탄핵을 받아 본래 신분인 천인(賤人)으로 강등되었고 윤원형의 적처였던 김씨를 독살했다는 의심을 받자 독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윤원형도 뒤를 이어 자결하였다. 관비의 출신으로 정경부인이 된 것은 물론 그녀의 마지막도 각본 없는 드라마이므로 문정왕후와 함께 수많은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조선의 측천무후 문정왕후>

문정왕후는 학자들이 중국 당나라의 측천무후, 청나라의 서태후와 비교할 정도로 우리나라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사람으로 억척같은 집념으로 그 아들을 기어코 왕으로 만든 여인이다. 그러나 명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8년 동안 국정을 지휘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여 역사는 그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문정왕후의 가장 큰 피해자로 그의 아들인 명종을 손꼽는다. 명종이 된 아들에게 너는 내가 아니면 어떻게 이 자리를 소유할 수 있었겠느냐?”라며 호통을 치고 왕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자 회초리까지 들기도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명종을 눈물로 왕위를 지킨 왕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근래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그녀의 정치적인 월권은 적어도 국왕의 권위를 누르거나 자신의 정치적 욕심만을 위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수렴청정을 끝내며 문정왕후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원문은 매우 길지만 핵심 내용만 적는다.

 

나는 본래 불민(不敏)한 사람이다. 일찍이 서책(書冊)을 보니, 부인으로서 국정에 참여하는 것은 매우 아름답지 못하다고 하였다. 우리나라가 불행하게도 두 대왕이 연이어 사망하였으므로, 주상이 어린 나이에 보위를 이어 국정을 맡길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부득이 섭정을 하기는 하였으나, 미안한 마음을 일찍이 하루도 잊지 못하였다. 더구나 재변이 계속 이어지고 여러 변고가 함께 발생함이 지금과 같은 적이 없었다. 나는 항상 나의 부덕한 소치 때문이 아닌가 하여 주야로 근심하고 염려하였으며 23년 이래로는 항상 성상께 귀정(歸政)하고자 하였으나, 아직 주상의 학문이 성취되지 못하여 모든 기무를 홀로 결단할 수 없다는 이유로 굳이 사양하는 까닭에 머뭇거리다가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이제 주상의 춘추가 장성하고 학문이 고명하여져서 군국(軍國)의 여러 정사를 재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귀정하고 다시는 정사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니, 대신들은 국사에 마음을 다하고 성상을 잘 보도(輔導)하여 태평스런 정치에 이르도록 힘쓴다면 매우 다행하겠다. 부덕한 나로서는 비록 폐습을 바로잡아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려 하였으나, 잘못되는 일이 많아 끝내 그 효과를 보지 못했으니, 인심에 반드시 맞지 않았을 것이다. 여러모로 생각하여 보건대, 재변이 일어나는 것은 실로 부덕한 나 때문이니 지금 귀정하는 것도 너무 늦은 것이다.‘

 

명종은 친정하기에 아직 이르다고 한사코 거절했으나 문정왕후가 뜻을 굽히지 않아 결국 친정에 임한다. 문정왕후는 명종 204월 회암사에서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위해 찬물로 목욕재계했다가 그만 병을 얻어 사망했다. 명종은 사회적 안정을 도모하고 나라를 평온하게 하기 위해 지금의 터에 어머니 문정왕후를 모셨다 한다. 당시 지관이며 예언가였던 남사고(南師古)동쪽에 태산을 봉한 뒤에야 나라가 안정될 것이다라고 한 예언에 따라 명종은 어머니를 태릉에 모시고 자신도 태릉 옆인 강릉에 안장됐다.

그러나 문정왕후는 자신이 죽으면 남편인 중종 옆에 묻히고 싶어 원래 장경왕후의 희릉 즉 고양시 서삼릉 우측에 있던 중종의 능을 현재의 강남구 삼성동 정릉 터로 옮겨 놓고, 자신도 그 옆에 묻힐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정릉 주위의 지대가 낮아 장마철에 자주 침수되자, 명종이 장마철에 물이 들어온다는 명분을 대고 남사고 등이 국가안정론을 근거로 이곳 태릉에 안장해 결국 그녀의 뜻은 무산된다.

 

태릉은 조선왕릉 가운데 능침과 정자각의 거리가 조선 능원 가운데 가장 길며, 기를 모아 뭉치게 한다는 능침 앞 강()을 약하게 한 것이 특이하다. 상설은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는데 봉분 아래에는 구름과 십이지신을 의미하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다. 병풍석 위의 만석(滿石) 중앙에 십이간지를 문자로 새겨놓았다. 원래 십이간지가 문자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병풍석을 없애고 신상을 대체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등장한 것인데, 여기에서는 신상과 문자가 함께 새겨져 있어 주목된다. 12지신 표시는 그림, 면석에 십이지신상, 우석에 운채를 새겼으며 만석에는 십이지의 방위를 문자로 장식했다. 그리고 주변으로 석양, 석호, 장명등, 망주석 등 석물이 배치되어 있다.

문석인 2구는 중계, 무석인 2구는 하계에 위치하며 높이는 약 325cm로 이들 문무석인은 목이 짧고 얼굴이 상대적으로 매우 큰 형태다. 사람의 실제 키보다는 상당히 큰 키로 관복에 과거 급제자가 홍패를 받을 때 착용하는 복두 차림이다. 두 손으로는 홀()을 공손히 맞잡고 있는데, 좌측의 문인석의 경우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고 있는 반면 우측의 문인석은 그 반대의 자세다. 일반적으로 좌우 문인석이 홀을 잡는 방법이 동일한데 이곳은 예외다.

선릉, 희릉, 정릉, 태릉은 모두 16세기 중반에 조성되었거나 청장된 능이지만 복식의 표현 양식을 보았을 때 희릉과 태릉, 선릉과 정릉으로 구분된다. 즉 희릉과 태릉의 문석인상은 복두 양각을 위로 꺾어 올리고 손을 노출하는 양식을 취하고 있는 반면 희릉과 태릉 사이에 조성된 정릉은 선릉의 예를 따라 복두 양각은 아래로 늘어뜨리고 좁고 넓은 두 가지 소매를 겹쳐 입은 후 그 안쪽에 손을 숨겨둔 모습으로 제작되었다.

무인석은 문인석과 비슷한 크기지만 얼굴이 크고 통방울 눈에 유난히 큰 코와 우락부락한 표정이 특징이다. 갑옷은 갑신(甲身), 갑군(甲裙) 모두 소슬무늬이고 양쪽 허리 아래로 길게 늘어뜨린 골비와 뒤쪽 허리에 댄 배갑은 물고기비늘무늬다. 여기에 양 옆 허리쪽에 화려한 구름무늬의 포두를 두르고 허리띠를 맺다.

 

무인석 모두 얼굴과 몸통의 비례가 14 정도로 머리 부분이 거대하다. 학자들은 이들 형태에 대해 큰 점수를 주지 않는데 안면 부분을 제외하고 입체감이 결여되어 있어 마치 사각기둥이 서 있는 것 같은 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태릉의 정자각은 정전 3, 배위청 3칸이며 가구는 정전 5량가 배위청은 3량가로 한국 전쟁 시 파손되어 석축과 초석만 남아 전하고 있던 것을 1994년에 복원한 것이다. 지붕은 정전과 배위청 모두 맞배에 겹처마로 박공면에 풍판을 설치했다. 포작은 정전이 이익공, 배위청은 초익공이다. 정전과 배위청 기둥 하부는 흰색 바탕에 청색 띠칠을 하여 주근도배를 모방하였다. 용마루에는 적새를 쌓고 앞뒷면에 회를 바르는 양상되회를 했으며 정전과 배위청은 내림마루 모두에 잡상을 설치했다. 배위청 앞과 좌우에 월대를 설치했으며 전면 폭은 정전의 기단너비에 맞추고 월대 전면 너비는 1,100mm로 매우 좁다. 정전 내외부 바닥과 배위청 및 월대의 바닥에 모두 방전(方甎)을 깔아 포장했다. 예감은 정자각 서북쪽 8보되는 지점에 있으며 4면의 판석을 서로 맞춘 방형 우물 정자 형식이다. 규모는 가로 1,013mm, 세로 245mm.

한편 태릉에서는 비교적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한 금천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으며 태릉의 소나무 숲은 신림(神林)으로 불려 질 만큼 울창하여 도시에서 만날 수 없는 풍취를 느끼게 한다.

조선 건국 후 사대부가에서는 신도비 건립이 활발하게 추진되었지만 왕릉 신도비는 문종대 이후로는 더 이상 건립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왕릉 신도비는 태조 건원릉, 태조의 원비인 신의왕후 한씨의 제릉,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능인 헌릉, 세종의 능인 영릉 4곳에만 세워졌다. 대신 조선 후기에는 그보다 규모가 작은 표석 건립이 유행하였다. 태릉의 표석 역시 이러한 17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추진된 능 표석 영건의 일환으로 건립된 것이다. 표석은 모두 백색의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임진왜란 직전 조영된 문정왕후 태릉은 효인이라는 자가 능침 안에 금은보화가 많다고 고자질해 15931월 왜군이 기마병 50명과 주민 50명을 동원해 도굴하려 했으나 삼물의 회()가 너무 단단해서 실패했다는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