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멜표류기 4

조선 왕릉(79) : 제4구역 영녕릉(5)

고향으로 돌아간 하멜은 13년간 조선에서의 억류 생활을 생생하게 정리하여 글을 썼다. 하나는 조선에 억류된 기간 동안 급여를 동인도회사에 청구하기 위해 쓴 ‘일지’이고 다른 하나는 보고 듣고 겪은 조선의 풍물에 대한 것이다. 이 글들을 엮어 출간한 책이 『하멜표류기』다. 이방인이 눈으로 본 단상이지만 『하멜표류기』는 조선을 서양에 최초로 소개한 책자로 의의가 깊다. 17세기 조선 사회의 모습과 함께 효종과 현종이 표착 서양인에 대해 취한 정책을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는데 인조에게 사약을 받아 죽은 소현세자 부인 민회빈 강씨에 대한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다. ‘왕이 버린 선고에 복종하지 않고 트집을 잡으면 사형이다. 우리가 조선에 있을 때 이와 유사한 사건이 있었다. 왕의 형수인 민회빈 장씨가 바느질..

조선 왕릉(78) : 제4구역 영녕릉(4)

문제는 효종의 바람과 달리 송시열은 북벌론을 실현에 옮길 인물은 아니었다. 효종의 결연한 북벌 정책에 동조하지 않고 격물치지(格物治知)를 이야기하며 치국 이전에 수신(修身)이 먼저라고 다그쳤다. 마음 수양과 민생 안정이 우선이라는 것으로 군신관계였던 명을 파멸시킨 청에 대해 관념적인 복수심은 있어도 현실적으로 복수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인식으로 효종의 북벌에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효종이 이를 모를리 없으므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씻기 어려운 수치심이 있는데도 모든 신하들이 이를 생각하지 않고 매양 나에게 수신(修身)만을 권하고 있으니 이 치욕을 씻지 못하면 수신만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효종이 즉위 5년경에 발표한 교서의 내용이다. 이 말은 효종의 북벌에 대한..

조선 왕릉(77) : 제4구역 영녕릉(3)

② 영릉(寧陵) 세종대왕릉에서 약 500미터 지점에 제17대 효종(1619〜1659)과 인선왕후(1618〜1674) 정씨의 쌍릉인 영릉(寧陵)이 있다. 그러므로 두 능을 합하여 영녕릉(英寧陵)이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세종대왕릉만 알려져 있는데 덤으로 또 한 릉을 볼 수 있는 셈이다. 효종은 1619년 인조의 둘째아들로 봉림대군에 봉해졌고 12살에 한 살 위인 신풍부원군 장유의 딸인 인선왕후 덕수 장씨와 가례를 올려 1남 6녀를 두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피신했으나 1637년 인조가 청 태종에게 삼전도에서 항복하자 볼모로 소현세자와 함께 심양(瀋陽)으로 잡혀간다. 이후 그는 청나라에 이끌려 서쪽으로는 몽골, 남쪽으로는 산해관과 금주위(錦州衛), 동쪽으로는 철령위(鐵嶺衛), 동북쪽으로..

조선 왕릉(9) : 제1구역 동구릉(6)

④ 숭릉 : 제18대 현종(1641〜1674) 및 명성왕후 김씨(1642〜1683)의 능이다. 숭릉은 동구릉 안에 있는 왕릉 중에서 유일하게 비공개였는데 2013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한시적으로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동구릉 9개 중 입구에서 볼 때 가장 좌측에 있는데 숭릉 안내판에서 왕릉까지 적어도 10〜15분 정도 걸어야 하지만 이 정도의 발품을 팔면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현종은 효종의 맏아들로 1641년 봉림대군(효종)이 심양에 볼모로 가 있을 때 태어났다. 조선의 역대 왕 중에서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것이다. 1644년 귀국하였고 아버지 봉림대군이 세자에 책봉됨에 따라 1649년 왕세손으로 책봉되었다가 1659년 그의 나이 19세에 효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조선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