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실록 2

조선 왕릉(64) : 제3구역 헌인릉(6)

양녕의 실수는 조선 건국이 남다른데다 세계정세가 바뀌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양녕은 조선이 무력으로 탄생했으므로 무력을 기본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왕이 되려는 자신이 무를 닦는 것도 언제 닥칠지 모르는 전란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태종은 이미 조선을 건국했으므로 조선을 장기적으로 존속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성계와 자신이 무력으로 조선을 창건했지만 무력을 앞세운다면 자신들에게 대들을 세력은 결국 무인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무를 바탕으로 형제들을 살해하고 엄밀하게 말하면 태조 이성계와 형인 정종을 겁박하여 왕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양녕이 바로 할아버지와 자신을 똑 닮아 무를 우선했다. 그런데 태종이 방심할 수 없는 것은 양녕이 처가 즉 무인인 외삼촌들과 ..

조선 왕릉(6) : 제1구역 동구릉(3)

이성계가 이방원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출범한지 얼마 되지 않는 조선왕조의 미래가 어둡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위야 어떻든 조선 개창은 이성계였지 이방원이 아니었으므로 이성계가 이방원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로부터 도전을 받을 수 있는 빌미였다. 더구나 이성계는 태종을 거부할 수는 있지만 태종은 이성계를 거부할 수 없다는 점이다. 방법론은 단 하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함흥에 은거해 있는 태조를 자신이 있는 수도로 모셔오는 길이다. 그러나 태상왕인 이성계를 강제로 납치해 올수는 없으므로 태조를 움직일 수 있는 인물들을 함흥으로 보내 설득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 번 가면 돌아오지 못한다는 유명한 함흥차사(咸興差使)라는 말이 생긴다. 태종은 함흥차사로 태조의 옛 친구인 성석린(成石璘)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