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성왕후 3

조선 왕릉(44) : 제2구역 서삼릉(10)

문정왕후가 남다른 국정을 전횡했지만 그녀도 세월의 벽을 넘을수는 없었다. 1565년 4월, 창덕궁 소덕당에서 65세를 일기로 문정왕후가 사망한다. 그녀가 죽자 사관은 실록에 『서경』을 인용해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것은 집안의 다함이다’라고 적었다. 문정왕후의 사망으로 날개를 잃은 윤원형과 그의 첩 정난정은 사림파의 탄핵을 받고 황해도 강음으로 유배된 후 최후를 맞았다. 보우는 유생들의 탄핵을 받아 제주도에 귀양가서 제주목사 변협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문정왕후는 사후 중종 곁에 묻히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중종의 무덤 옆은 이미 인종의 생모인 제1계비 장경왕후가 지키고 있었다. 1542년 문정왕후는 보우와 의논해 현재의 고양시 서삼릉에 있던 중종 왕릉을 성종의 선릉 부근으로 옮겼다. 중종의 무덤이 아버지인 ..

조선 왕릉(42) : 제2구역 서삼릉(8)

③ 효릉 효릉은 제12대 인종(1515〜1545) 및 비 인성왕후(1514〜1577) 박씨 능이다. 인종은 희릉에 안장된 장경왕후의 맏아들로 1515년에 태어났는데 생모 장경왕후가 7일만에 사망하여 문정왕후 윤씨의 손에서 자랐다. 1520년인 여섯 살에 세자로 책봉되었는데 놀라운 것은 3세 때부터 글을 배워 익히고 8살 때 성균관에 입학하여 학문을 익혔다고 한다. 인종은 세자 시절부터 인품이 남달랐다. 언제나 몸가짐에 흐트러짐이 없이 바른 자세로만 앉아 공부에 열중했고, 언동은 때와 장소에 어긋남이 없었다고 한다. 특히 검약하고 욕심이 없어서 일찍이 시녀 가운데 호화로운 옷을 입은 자가 있으면 곧바로 궁궐에서 내보내 궁중 안에서 특별히 엄하게 단속하지 않아도 잘 유지될 수 있었다고 한다. 인종의 성품을 ..

조선 왕릉(35) : 제2구역 서삼릉(1)

서삼릉(사적 200호)은 상당한 우여곡절을 겪은 후 현재와 같은 능역이 된 것으로 유명하다. 처음으로 조성된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능인 희릉은 원래 3대 태종의 헌릉 옆으로 택지가 결정되었으나 권력다툼으로 인해 이곳으로 옮겨졌고 이후 중종의 정릉(靖陵)이 자리를 잡았다가 강남구 삼성동의 선릉으로 옮겨갔고 그 아들인 인종과 인성왕후 박씨의 효릉이 조성되었다. 이후 철종과 철인왕후의 능인 예릉이 들어서면서 ‘서삼릉’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서삼릉에는 의친왕과 의친왕의 모친 덕수 장씨의 묘도 있었으나 1996년 의친왕묘, 2009년엔 의친왕 모친인 덕수 장씨 묘가 서삼릉에서 홍유릉 경역으로 천장하였다. 그러므로 3기의 왕릉 이외에도 3기의 원과 1묘, 왕자·공주·후궁 등의 묘 46기, 태실54기가 자리 잡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