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릉 2

조선 왕릉(86) : 제4구역 융건릉(2)

사도세자 비극에서 가장 잘 알려진 ‘뒤주’가 『영조실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영조실록』 38년(1762) 윤 5월 13일의 기록에는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안에다 엄히 가두다(自內嚴囚)’라는 말이 나온다. ‘안에다 가둔다’는 기록을 국사편찬위원회의 김범 편사연구사는 뒤주와 같은 협소한 공간에서 9일 동안 살아있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함규진의 논거를 들어 뒤주 사망설을 부정하는 견해도 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도 뒤주라는 표현이 혜경궁홍씨의 『한중록』에 나오며 『정조실록』에는 ‘한 물건(一物)’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볼 때 뒤주가 사망에 중요한 도구가 된 것은 사실로 생각된다고 첨언했다. 실제로 복원된 화성행궁에는 일반인들을 상대로 뒤주 체험이 있을 정도로 뒤주는 한국민의 뇌리에 큰 영향..

조선 왕릉(85) : 제4구역 융건릉(1)

조선왕릉 답사의 마지막 행선지는 사적 제206호인 융건릉(隆健陵)이다. 조선 제22대 정조의 아버지 장조(사도세자)와 현경왕후를 모신 융릉, 정조와 효의왕후를 모신 건릉을 합쳐 부르는 이름이다. 건릉은 열 살 때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아들의 무덤이고, 융릉은 아버지로부터 죽임을 당한 아들의 무덤이다. 세상에는 비극의 주인공도 많고 그 사연도 제각각이다. 왕조의 비극과 권력의 비정함을 상징하는 마의태자와 단종이 역사에 자주 나오는 비극의 주인공들이지만 사도세자의 비극은 그 누구보다도 애절하다. 28세의 꿈같은 나이에 왕세자임에도 불구하고 뒤주에 갇혀 당쟁의 제물이 되었으니 말이다.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하기까지의 정황은 다소 복잡하다. 사도세자의 아버지인 영조는 노론 세력의 지지를 받으며 왕으로 등극했으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