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륵사 2

조선 왕릉(81) : 제4구역 영녕릉(7)

효종의 무덤은 건원릉 서쪽 능선에 있는 현재 구리시에 위치한 영조 무덤인 원릉으로 정해진 후 10월 말 계획대로 안장되었다. 그런데 막상 효종의 시신을 관에 넣는데 문제가 생겼다. 그동안 효종의 어깨가 너무 넓어 시신을 넣기 위해 준비한 관이 맞지 않은 것이다. 조선 시대의 왕의 장례 절차는 왕이 즉위하자마자 관을 짜고, 왕이 사망하기 전까지 매년 옻칠을 덧칠해서 보관한다. 효종의 재위 기간인 10년 동안 어깨가 더 굵고 넓어졌다는 뜻이다. 효종이 북벌에 신경을 쓰기 위해 체력을 단련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실록에 의하면 송시열이 ‘효자는 염을 단단히 묶지 않는데 이는 부모가 살아나기를 바라는 효심을 보이는 법이라고 주장했다. 염을 단단히 묶지 않아 시신이 부패하면서 부풀어 올라 관이 맞지 않았다는 설명..

조선 왕릉(54) : 제3구역 태강릉(2)

조선시대에 불교가 이단으로 배척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찰들이 유교로 똘똘 뭉친 유생들이나 관아의 수탈을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은 당대의 상황으로 볼 때 그야말로 기적이나 마찬가지다. 역사상 종교 문제로 수많은 문제를 일으켰는데 조선의 유교와 불교의 싸움도 이에 못지 않다. 조선이 불교를 반대하고 일어선 유교국가이므로 더욱 그러한데 이유는 간단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사라지지 않았는데 이는 조선시대 불교를 보호하는 큰 버팀목이 있다는 뜻이다. 이유는 왕실 여인들의 적극적인 정치적·경제적 비호가 있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그 중에서도 조선시대 최고의 대화주로 단연 정희왕후와 문정왕후를 꼽는다. 정희왕후부터 설명한다. 그녀는 해인사에서부터 원각사, 상원사, 신륵사, 용문사, 낙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