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 2

조선 왕릉(78) : 제4구역 영녕릉(4)

문제는 효종의 바람과 달리 송시열은 북벌론을 실현에 옮길 인물은 아니었다. 효종의 결연한 북벌 정책에 동조하지 않고 격물치지(格物治知)를 이야기하며 치국 이전에 수신(修身)이 먼저라고 다그쳤다. 마음 수양과 민생 안정이 우선이라는 것으로 군신관계였던 명을 파멸시킨 청에 대해 관념적인 복수심은 있어도 현실적으로 복수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인식으로 효종의 북벌에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효종이 이를 모를리 없으므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씻기 어려운 수치심이 있는데도 모든 신하들이 이를 생각하지 않고 매양 나에게 수신(修身)만을 권하고 있으니 이 치욕을 씻지 못하면 수신만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효종이 즉위 5년경에 발표한 교서의 내용이다. 이 말은 효종의 북벌에 대한..

조선 왕릉(24) : 제2구역 서오릉(3)

숙종의 반격은 생각보다 빨랐다. 장옥정이 아들을 낳은 다음해인 1689년 1월, 숙종은 신하들 앞에서 왕자의 명호를 정하겠다고 밝힌다. 새로 태어난 왕자를 ‘원자(元子)’로 삼겠다는 것으로 장옥정의 아들이 태어난 지 단 4개월 후다. 원자는 상속권, 즉 왕위계승권을 가진 임금의 맏아들을 뜻한다. 조선시대 왕의 장자는 통상 2〜3살에 원자가 되고, 7〜8살에 세자로 봉해져 후계자 수업을 받았다. 그런데 태어난 지 두어 달밖에 안 된 갓난아기에다 그것도 궁녀 출신 후궁의 소생을 원자로 삼겠다니 그야말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서인들이 벌떼와 같이 일어났다. 서인이 가장 크게 반발한 것은 당시 인현왕후가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이므로 앞으로 임신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된 다음에 선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