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 2

조선 왕릉(65) : 제3구역 헌인릉(7)

양녕은 태종이 죽고 세종이 즉위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구설수에 올랐다. 지정된 주거지에서 탈출해 사냥하기, 국상 때 술 마시고 놀기, 남의 첩과 간통하기 등 과거의 행보를 지속했다. 여하튼 충녕이 왕위에 오른 후 양녕에 대한 문제는 계속 불거졌다. 심지어 양녕이 군사를 동원하여 한양을 점령하려한다는 유언비어조차 나돌았는데 그것은 양녕이 충녕에게 불만이 있었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세종 치세에 양녕은 항상 ‘뜨거운 감자’였다. 실제로 세종은 양녕을 극형에 처하기를 원하는 신하들의 상소에 시달리느라 병이 들 지경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끝까지 양녕을 두둔하며 처벌하지 않았다. 태종이 사망했을 때 양녕은 경기도 이천에 귀양살이하고 있었는데 슬퍼하지도 않고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소주를 마셨다. 이천군수가 이날 소..

조선 왕릉(11) : 제1구역 동구릉(8)

조선왕실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는 혼례식을 들 수 있다. 왕과 왕세자, 왕세손 등 지위에 따라 격을 달리하는 혼례식이 벌어졌고 시대별로 내용에 조금씩 변화가 있었는데 영조 35년 (1759) 즉 66살에 15세의 신부 정순왕후와의 결혼식은 여러 가지 면에서 하이라이트라고 볼 수 있다. 왕과 왕비의 나이 차이는 51세로 조선왕실의 최고 기록인데 두 사람의 혼례식이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에 상세히 기록되어 250여 년 전의 왕실 혼례 정황을 상세히 알게 해 준다. 왕실에서 혼례식이 있게 되면 먼저 총괄본부인 ‘가례도감’이 구성되어 총책임자인 도제조는 정승급, 부책임자인 도제는 판서급에서 임명했다. 도제 3인 중 2인은 호조판서와 예조판서인데 의식절차에 대한 것은 예조판서, 행사에 들어가는 총비용은 호조판서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