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자시강원 2

조선 왕릉(66) : 제3구역 헌인릉(8)

양녕대군은 1404년에 왕세자가 된 후 14년 간이나 세자로 있다가 1418년 폐세자가 되었다. 세자 양녕과 충녕의 일화 즉 태종이 세자인 양녕을 폐위하고 충녕에게 왕위를 준 이유 중 하나가 양녕이 글공부를 싫어하여 결국 왕위를 충녕에게 빼앗겼다는 야사는 많이 알려진 이야기다. 그러나 이는 매우 와전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나 왕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세자가 된다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로 왕이 되는 직행로임에도 이를 동생에게 빼앗겼다는 것은 양녕이 천치가 아닌 한 원하는 일이 아니었음은 분명한 일이다. 그것도 무려 14년이나 세자로 생활한 후다. 일단 세자가 되면 세자의 생활이 만만치 않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데 대체 세자 생활이 어떻기 때문에 왕위를 앞에 두고 양녕이 낙마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지 ..

조선 왕릉(61) : 제3구역 헌인릉(3)

조선왕조 전체를 볼 때 놀라운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태종이 세자인 양녕대군을 폐세자로 만들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봉했다는 점이다. 충녕대군이 한국 역사상 가장 걸출한 왕이 되어 광개토대왕과 함께 대왕으로 불리는 두 명 중 한 명이므로 태종의 안목이 매우 높았다는 설명도 있지만 양녕대군의 폐세자는 그렇게 간단하게 진행된 것은 아니다. 양녕대군은 태조 3년(1394), 조선이 창건된 직후 당시 정안군이던 이방원의 맏아들과 다름없이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이방원의 처지는 최악이었다. 당시 이방원은 세자 자리를 이복동생에게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개국공신에도 제외되어 낙담하고 있었다. 더구나 양녕대군보다 앞에 태어났던 세 명이 모두 강보에서 죽어 양녕대군은 태종과 원경왕후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