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실록 3

조선 왕릉(65) : 제3구역 헌인릉(7)

양녕은 태종이 죽고 세종이 즉위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구설수에 올랐다. 지정된 주거지에서 탈출해 사냥하기, 국상 때 술 마시고 놀기, 남의 첩과 간통하기 등 과거의 행보를 지속했다. 여하튼 충녕이 왕위에 오른 후 양녕에 대한 문제는 계속 불거졌다. 심지어 양녕이 군사를 동원하여 한양을 점령하려한다는 유언비어조차 나돌았는데 그것은 양녕이 충녕에게 불만이 있었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세종 치세에 양녕은 항상 ‘뜨거운 감자’였다. 실제로 세종은 양녕을 극형에 처하기를 원하는 신하들의 상소에 시달리느라 병이 들 지경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끝까지 양녕을 두둔하며 처벌하지 않았다. 태종이 사망했을 때 양녕은 경기도 이천에 귀양살이하고 있었는데 슬퍼하지도 않고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소주를 마셨다. 이천군수가 이날 소..

조선 왕릉(29) : 제2구역 서오릉(8)

윤씨가 폐비되자 그야말로 진행된 내용은 어지러울 수밖에 없다. 왕실의 윗전이었던 정희왕후는 원자가 사가에서 폐비와 만나지 못하도록 폐비가 폐출되는 날, 당시 둘째 대군을 낳은 지 100일도 채 되지 않았는데 이들을 만나지 못하게 했다. 어미와 유모의 손길이 필요했지만 손도 쓰지 못하게 했는데 결국 5일 뒤 사망한다. 그런데도 성종은 그로부터 불과 석 달 뒤에 숙의 권씨를 새로운 후궁으로 간택하여 입궁시킨다. 이후 윤씨가 사사되는데 대부분의 사극 등을 보면 시어머니 인수대비가 가장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당대의 정황을 여러 각도로 분석한 학자들은 성종이 보다 적극적으로 일을 진행했다고 생각한다. 성종은 중전의 폐위문제에 대해 대간과 성균관 유생 65명이 죄도 명확하지 않은 중전을 폐비시킨다는 것은 ..

조선 왕릉(28) : 제2구역 서오릉(7)

연산군의 어머니이자 그녀의 며느리인 윤비(尹妃)의 초창기는 매우 좋았다. 원래 성종의 부인은 한명회의 딸인 공혜왕후였으나, 성종의 왕비인 공혜왕후가 몸이 약하고, 결혼 후 6년 가까이 아이가 없어 신하들이 후궁을 들일 것을 청해 숙의 윤씨가 궁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궁에 들어온 지 1년 후 공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성종은 따로 중전을 간택하지 않고 후궁인 숙의 윤씨를 중전으로 승격시켰다. 당시 숙의 윤씨는 임신 6개월이었다. 중전이 된 후 아들을 낳았는데 바로 연산군이다. 성종은 적장자인 연산군을 원자로 책봉하였다. 그런데 인수대비와 윤비는 물과 기름사이가 않을 수 없었다. 인수대비는 남다른 지식인이지만 윤비(尹妃)는 『내훈』의 법도와는 다소 거리가 먼 여인이라는 점이다. 사실 시어머니가 남다르게 인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