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 3

조선 왕릉(70) : 제3구역 선정릉(1)

선정릉(宣靖陵, 사적 199호)을 외국인과 함께 방문하면 그야말로 놀라는데 이유는 한국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데다 복잡한 도심의 한복판이라고 알려진 강남구 삼성동에서 무려 72,778평에 달하는 거대한 면적이 숲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봄가을의 소풍객, 마음의 여유를 위해 산책길에 오른 삼성동 일대의 회사원, 답사객들에게 편안한 안식처를 제공해 주는데 사실 서울에서 가장 부동산 가격이 비싼 곳에 위치했음에도 선정릉에 대한 내역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특히 지하철 선릉역에서 5분 정도만 걸어가면 선릉에 제9대 왕인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가 모셔져 있다는 것은 더더욱 모른다. 일반적으로 성종의 아들 중종의 묘도 함께 있으므로 선정릉이라고 하는데 지하철 역 이름이 선릉역이라는 것은 선릉이 보다 잘 알려졌다는..

조선 왕릉(54) : 제3구역 태강릉(2)

조선시대에 불교가 이단으로 배척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찰들이 유교로 똘똘 뭉친 유생들이나 관아의 수탈을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은 당대의 상황으로 볼 때 그야말로 기적이나 마찬가지다. 역사상 종교 문제로 수많은 문제를 일으켰는데 조선의 유교와 불교의 싸움도 이에 못지 않다. 조선이 불교를 반대하고 일어선 유교국가이므로 더욱 그러한데 이유는 간단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사라지지 않았는데 이는 조선시대 불교를 보호하는 큰 버팀목이 있다는 뜻이다. 이유는 왕실 여인들의 적극적인 정치적·경제적 비호가 있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그 중에서도 조선시대 최고의 대화주로 단연 정희왕후와 문정왕후를 꼽는다. 정희왕후부터 설명한다. 그녀는 해인사에서부터 원각사, 상원사, 신륵사, 용문사, 낙산사..

조선 왕릉(28) : 제2구역 서오릉(7)

연산군의 어머니이자 그녀의 며느리인 윤비(尹妃)의 초창기는 매우 좋았다. 원래 성종의 부인은 한명회의 딸인 공혜왕후였으나, 성종의 왕비인 공혜왕후가 몸이 약하고, 결혼 후 6년 가까이 아이가 없어 신하들이 후궁을 들일 것을 청해 숙의 윤씨가 궁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궁에 들어온 지 1년 후 공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성종은 따로 중전을 간택하지 않고 후궁인 숙의 윤씨를 중전으로 승격시켰다. 당시 숙의 윤씨는 임신 6개월이었다. 중전이 된 후 아들을 낳았는데 바로 연산군이다. 성종은 적장자인 연산군을 원자로 책봉하였다. 그런데 인수대비와 윤비는 물과 기름사이가 않을 수 없었다. 인수대비는 남다른 지식인이지만 윤비(尹妃)는 『내훈』의 법도와는 다소 거리가 먼 여인이라는 점이다. 사실 시어머니가 남다르게 인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