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성 2

유네스코 세계유산, 수원화성(2)

youtu.be/vjBMAD4_CfM 정조가 이렇게 활발하게 내외적인 업적을 쌓아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정조에게는 한 가지 개인적인 걸림돌이 있었다. 그것은 불명예스럽게 뒤주 속에서 사망한 사도 세자의 아들이라는 멍에였다. 그래서 정조는 통치 기간 내내 아버지 사도 세자에 대한 효성과 추모 사업을 가장 중요한 정치적인 명분으로 내세웠다. 1762년 영조(英祖) 38년 윤 5월 21일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는 한여름 뒤주 속에 갇힌 지 8일 만에 죽었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왕세자로 책봉되어 한때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국정을 돌보기도 했다. 그러나 정권 쟁취를 위해 대립하고 있던 노론과 소론 간의 권력 다툼에서 패배하여 부친의 미움을 사 28세란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한국(동이)과 중국(화이), 민족이 다른 이유(11) : 치성(석성)

youtu.be/kUod9Ocy9hI 12. 치(雉)를 갖춘 석성(石城) 고구려는 중국과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혈투를 벌렸다. 인구가 적고 자원이 많지 않은 고구려가 자원이 많고 인구가 많은 중국과 이와 같이 혈투를 벌일 수 있었다는 것은 나름대로 중국에 비견할 수 있는 노하우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구려의 2대 전략이자 전술은 산성전투와 청야전투다. 고구려는 200여개소가 넘는 산성을 요충지에 건설했다. 그런데 고구려는 남다른 산성 축조 방법 즉 산성에 치성(雉城 또는 치) 또는 마면((馬面)을 기본으로 건설했다. 성벽을 직선으로 쌓으면 시각이 좁아 사각지대가 생기므로 성벽 바로 밑에서 접근하는 적을 놓칠 수 있고 공격할 때도 전면에서만 공격이 가능하다. 따라서 성벽 구조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