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암성 2

유네스코 세계유산, 수원화성(3)

youtu.be/m7V9L2nFCls 〈철저한 설계도면에 의한 다양한 건축〉 화성에 대한 기본 계획이 수립되자 조선 역사상 한양 건설 이후 가장 큰 도시의 건설을 명령한다. 성역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된 것은, 정조17년(1793) 1월 수원을 유수부로 승격시킨 전후의 일이었지만 정조14년 6월에 수원화성에 견고한 성곽을 갖춘 대도시를 건설하는 구상은 부사직(副司直) 강유(姜遊)의 제안에서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현륭원 천봉 직후 강유는 수원에 축성설참(築城設塹)할 것을 제안하였다. ‘수원(水原)은 곧 총융청(摠戎廳)의 바깥 군영으로서 국가의 중요한 진(鎭)이고 더구나 또 막중한 능침을 받드는 곳이니, 의당 특별한 조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번에 새 읍을 옮겨 설치하였으나 성지(城池)의 방어설치가 없습니..

한국(동이)과 중국(화이), 민족이 다른 이유(11) : 치성(석성)

youtu.be/kUod9Ocy9hI 12. 치(雉)를 갖춘 석성(石城) 고구려는 중국과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혈투를 벌렸다. 인구가 적고 자원이 많지 않은 고구려가 자원이 많고 인구가 많은 중국과 이와 같이 혈투를 벌일 수 있었다는 것은 나름대로 중국에 비견할 수 있는 노하우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구려의 2대 전략이자 전술은 산성전투와 청야전투다. 고구려는 200여개소가 넘는 산성을 요충지에 건설했다. 그런데 고구려는 남다른 산성 축조 방법 즉 산성에 치성(雉城 또는 치) 또는 마면((馬面)을 기본으로 건설했다. 성벽을 직선으로 쌓으면 시각이 좁아 사각지대가 생기므로 성벽 바로 밑에서 접근하는 적을 놓칠 수 있고 공격할 때도 전면에서만 공격이 가능하다. 따라서 성벽 구조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