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다리 2

조선 왕릉(87) : 제4구역 융건릉(3)

왕릉의 일반적인 진입 공간은 연지, 재실, 금천교, 홍살문으로 이어지는데 융릉의 연지는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연지의 형태가 방지원도임에 반하여 융릉은 원형으로 조성되었다. 원형의 호안은 곡선 장대석으로 원형석축을 쌓아 놓았으며 연지의 지름은 약 186미터다. 융릉의 정자각은 정전 3칸, 배위청 2칸으로 하는 5칸 정자각이며 정자각 상부의 가구 구조는 5량가, 배위청은 3량가다. 지붕은 정전과 배위청 모두 맞배에 겹처마로 박공면에는 풍판을 설치했다. 포작은 정전이 출목 2익공, 배위청이 출목이 없는 2익공이다. 지붕 용마루는 적새를 쌓고 전후면에 회를 발라 마감하는 양상도회했으며 죄우에 취두를 설치했다. 정전과 배위청의 전후 내림마루에는 용두와 잡상 각 4개씩을 설치했다. 정전 내외부와 배위청에는 모두 단청..

유네스코 세계유산, 수원화성(8) : 행궁 및 을묘원행(II)

youtu.be/y_i2GLuObE0 화성행궁이 완성되기 전부터 정조는 헌융원에 참배하기 위해 수원을 여러 차례 들렀으며 행궁이 완성된 후에는 이곳에 머물면서 친히 활을 쏘거나 노인들을 불러모아 연회를 베풀기도 하였다. 그러한 행사 중에 여러 가지 깊은 뜻을 갖고 벌인 행사가 혜빈궁 홍씨의 화갑(華甲)을 맞이한 1795년이다. 온 백성의 이목이 집중되는 회갑 행차는 화성민을 비롯한 조선 백성들을 선무하고 대대적인 군사 훈련을 실시하여 자신의 군대 장악력을 과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더구나 아버지 사도 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자신의 왕권마저 넘보는 구세력인 노론 벽파를 제압하겠다는 정치적 의도를 보이는 데도 안성맞춤이었다. 작게는 비명에 간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참배하여 어머니의 한을 풀어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