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시작은 매우 좋았다. 홍경래난은 조선왕조에서 일어난 사건 중 현대사와 직결되므로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데 의 글 등을 참조하여 설명한다. 12월 18일 홍경래에 의해 다복동에 모인 500여 명의 반군들은 격문을 낭독하고 거병식을 마친 뒤 남진군과 북진군으로 나뉘어 출병했다. 홍경래가 이끌고 홍총각(洪總角)이 선봉장이 된 남진군은 가산 관아를 공격해 군수를 살해하고 무기를 수습했다. 이들은 다음날 꼬박 하루를 행진해 가산의 동남쪽 박천군(博川郡)에 도착하여 기병 40여 명, 보병 500명을 이끌고 공격했다. 인근 서운사(棲雲寺)에 숨어 있던 군수 임성고(任聖皐)는 노모의 구금 소식을 듣고 항복했다. 남진군은 원래 박천을 점령한 뒤 영변부(寧邊府)를 공격하고 이어서 안주(安州)를 함락시킬 계획을 세웠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