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주 2

조선 왕릉(86) : 제4구역 융건릉(2)

사도세자 비극에서 가장 잘 알려진 ‘뒤주’가 『영조실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영조실록』 38년(1762) 윤 5월 13일의 기록에는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안에다 엄히 가두다(自內嚴囚)’라는 말이 나온다. ‘안에다 가둔다’는 기록을 국사편찬위원회의 김범 편사연구사는 뒤주와 같은 협소한 공간에서 9일 동안 살아있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함규진의 논거를 들어 뒤주 사망설을 부정하는 견해도 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도 뒤주라는 표현이 혜경궁홍씨의 『한중록』에 나오며 『정조실록』에는 ‘한 물건(一物)’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볼 때 뒤주가 사망에 중요한 도구가 된 것은 사실로 생각된다고 첨언했다. 실제로 복원된 화성행궁에는 일반인들을 상대로 뒤주 체험이 있을 정도로 뒤주는 한국민의 뇌리에 큰 영향..

유네스코 세계유산, 수원화성(8) : 행궁 및 을묘원행(II)

youtu.be/y_i2GLuObE0 화성행궁이 완성되기 전부터 정조는 헌융원에 참배하기 위해 수원을 여러 차례 들렀으며 행궁이 완성된 후에는 이곳에 머물면서 친히 활을 쏘거나 노인들을 불러모아 연회를 베풀기도 하였다. 그러한 행사 중에 여러 가지 깊은 뜻을 갖고 벌인 행사가 혜빈궁 홍씨의 화갑(華甲)을 맞이한 1795년이다. 온 백성의 이목이 집중되는 회갑 행차는 화성민을 비롯한 조선 백성들을 선무하고 대대적인 군사 훈련을 실시하여 자신의 군대 장악력을 과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더구나 아버지 사도 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자신의 왕권마저 넘보는 구세력인 노론 벽파를 제압하겠다는 정치적 의도를 보이는 데도 안성맞춤이었다. 작게는 비명에 간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참배하여 어머니의 한을 풀어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