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국대전 4

조선 왕릉(46) : 제2구역 파주삼릉(2)

궁중사를 보면 왕비로 인해 수많은 사건들이 일어나는데 대체 왕비가 어떤 위세가 있길래 그렇게 이전투구하느냐 의문이 들 것이다. 조선시대 국왕의 정실부인을 왕비라고 부르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법전에서도‘왕비’나 ‘왕비전’이라는 용어만 사용하였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여러 자료에는 왕비의 칭호로 ‘중궁’도 자주 보인다. 『세종실록』세종 9년 1월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왕이 여러 신하에게 말하기를, “동전(東殿)이라는 칭호를 어느 시대부터 부르게 되었는가? 만약에 ‘중궁(中宮)’이라 한다면 황후와 비슷하여 참람한 듯하니, 칭호를 고치는 것이 옳겠다. 또 왕비에게 아름다운 칭호를 더하여 덕비(德妃)·숙비(淑妃) 같은 칭호는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이전 왕조에서 왕비가 많아 6〜7..

조선 왕릉(37) : 제2구역 서삼릉(3)

의녀가 무엇인지 일반인들이 모두 알게 된 것은 공전의 흥행에 성공한 2003년 TV드라마 「대장금」 때문이다. 이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사극으로, ‘장금’이 여인의 몸으로 조선시대 최고 의녀의 길을 걷는다는 이야기다. 이와 같이 대장금이 최고의 의녀로서 궁중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유교 사상이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획기적인 의료제도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여자 의사의 양성이다. 성리학의 영향으로 ‘남녀칠세부동석’의 원칙이 철저히 지켜질 정도로 남녀의 구별이 엄격해지자 많은 부녀자들이 남자 의사의 진찰을 거부하였고, 그로 인해 불필요한 희생자들이 생겨나기 일쑤였다. 아무리 가벼운 병이라도 전문인으로부터 진단과 치료를 받지 못하면 곧바로 악화되고 생명을 잃을 수도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

조선 왕릉(8) : 제1구역 동구릉(5)

③ 목릉 조선왕조에서 파란만장한 생으로 수많은 일화를 만들어낸 목릉은 제14대 선조 및 의인왕후 박씨, 계비 인목왕후 김씨 능으로 건원릉 동쪽 언덕에 있다. 제일 좌측이 선조의 능이고, 중앙 의인왕후, 우측이 인목왕후의 능이다. 선조의 릉을 목릉이라고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끌고 이황 등 훌륭한 인재들이 많이 나와 ‘목릉성세’라고 불려지는 것에서 유래되었다. 선조는 중종의 아들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로 1552년 인달방 사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처음에는 하성군에 책봉되었는데 명종의 후사가 없어 후계자로 지명되었고 1567년 명종이 사망하자 16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처음에는 명종의 비 심씨(沈氏)가 수렴청정을 하다가 이듬해부터 친정을 한다. 일반적으로 수렴청정은 2..

조선 왕릉(6) : 제1구역 동구릉(3)

이성계가 이방원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출범한지 얼마 되지 않는 조선왕조의 미래가 어둡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위야 어떻든 조선 개창은 이성계였지 이방원이 아니었으므로 이성계가 이방원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로부터 도전을 받을 수 있는 빌미였다. 더구나 이성계는 태종을 거부할 수는 있지만 태종은 이성계를 거부할 수 없다는 점이다. 방법론은 단 하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함흥에 은거해 있는 태조를 자신이 있는 수도로 모셔오는 길이다. 그러나 태상왕인 이성계를 강제로 납치해 올수는 없으므로 태조를 움직일 수 있는 인물들을 함흥으로 보내 설득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 번 가면 돌아오지 못한다는 유명한 함흥차사(咸興差使)라는 말이 생긴다. 태종은 함흥차사로 태조의 옛 친구인 성석린(成石璘)을 보냈다...